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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nk는 처음에 ‘배’였다?

영어는 언제나 새로운 단어를 만들거나 혹은 수입하면서 영역을 넓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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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가 원조였던 간에 중요한 것은 영어에 tank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이고, 이 말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본래의 의미와 전혀 관계없이 전투용 탱크, 다시 말해서 전차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언어의 본질은 흐르는 것이다. 고여 있는 언어는 죽은 언어다. 이는 고대 라틴어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때 세계어였던 라틴어는 이제 단지 학문적인 언어로 남아 있을 뿐이다. 굳이 라틴어를 사용하는 까닭 역시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시하는 허세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고대 한문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러한 언어들은 여전히 문자로는 남아 있지만, 확장성을 상실한 골동품 같은 언어들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했듯이, 골동품이란 감상을 위한 것이지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고대 라틴어가 급격하게 영향력을 상실한 결정적인 계기는 성서의 속어 번역이었다. 이 속어를 vernacular라고 한다. 이 용어는 라틴어 vernaculus에서 유래되었는데, 이는 "집에서 태어나서 자란 노예"라는 뜻을 가진 verna라는 말에서 왔다. Verna는 지금 토스카나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살던 에트루리아인Etruscan의 말이었다. 한국 자동차 모델 가운데 verna라는 것이 있었는데, 썩 좋은 작명은 아니라고 하겠다. 어쨌든 vernacular라는 말은 노예의 언어라는 뜻을 내포했고, 따라서 성서는 반드시 신의 음성에 가까운 언어, 즉 라틴어로 써야한다는 게 중세시대의 확고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성스러운 말씀'을 라틴어가 아닌 노예의 언어로 번역해서 쓴다고 생각해보라. 경천동지할 일이 아니겠는가. 물론 르네상스의 지식인들은 '우매한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일부러 vernacular를 사용해 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언문과 한문을 구분했던 조선시대 양반들처럼, 그들 역시 엄연히 중요한 이론적 논의는 라틴어로 적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는 단순히 글자의 차이가 아니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의 언어들은 대체로 발음기호라고 생각하면 된다. 발음기호이므로 처음에 표기하는 방식이 제멋대로였다. 이렇듯 다양한 철자법을 근대에 이르러 통일한 것이 바로 민족어로 굳어진 것이다.

이택광

 


철자법과 발음이 완전히 일치한다고 보기 어려운 영어는 발음기호로서 그렇게 훌륭한 기능을 하는 언어는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기준으로 봤을 때, 정말 엉망진창인 언어가 영어다. 심지어 영어의 명사는 유럽어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남성형과 여성형도 갖지 않는다. 말 그대로 '노예의 언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이랬던 영어가 근대로 들어오면서 외국어로서 배우기 쉬운 말이 되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영어를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외국어 사용자들에게는 영어가 학습하기 어렵지 않은 언어로 받아들여진다는 걸 알고 신기했던 적도 있다. 중국인에게도 영어는 다른 외국어에 비해 쉽게 배울 수 있는 언어라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한 여러 가설이 많지만, 무엇보다 몇 가지 기본 규칙만 익히면 그 다음부터는 다양한 변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다양한 모습의 영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인데,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과 영어를 배워서 쓰는 이들이 만나면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가 왕따를 당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심심찮게 일어나곤 한다. 이런 현상을 연구해서 영어교육이론으로 만들어낸 일본 학자도 있을 정도로 영어는 native라는 말이 무색한 언어가 되어버렸다. 사실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사용하는 native speaker라는 말 자체가 라틴어의 관점에서는 '노예의 언어를 쓰는 사람'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감안했을 때, 영어가 점점 라틴어처럼 국제어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면 native speaker는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으로 봐야 한다. 게다가 영어는 라틴어에 비해 훨씬 놀라운 활용성을 갖는 언어다보니, 라틴어처럼 폐쇄적이라는 한계에 부딪혀서 어려움을 겪을 것 같지는 않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영어는 언제나 새로운 단어를 만들거나 혹은 수입하면서 영역을 넓혀왔다. Ciao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20세기 초반에 일어난 세계대전은 영어의 국제화를 이루어낸 결정적인 계기였다.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어는 다른 언어들을 수입하고 동시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한국도 그 영향권 아래 놓였던 대표적인 국가 중 하나일 것이다. 지정학적인 역학관계가 언어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영국의 버버리 코트가 군복에서 차용된 것처럼, 단어들도 영국이 관여한 세계대전과 무관하지 않다.

 

Tank도 이런 단어 중 하나다. Tank는 원래 저수지를 의미했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물탱크라는 말이 바로 이 본뜻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tank라는 말은 인도어 tankh에서 왔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포르투갈어로 들어왔다가 영어로 유입되었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포르투갈어 tanque가 인도로 건너갔다가 다시 온 것이라고도 주장한다. 어느 나라가 원조였던 간에 중요한 것은 영어에 tank라는 단어가 있다는 것이고, 이 말이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본래의 의미와 전혀 관계없이 전투용 탱크, 다시 말해서 전차를 의미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탱크가 왜 무서운 전쟁 무기로 변신했는지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그중 가장 그럴듯한 것은 윈스턴 처칠과 관련된 이야기다. 처칠은 장갑 전차를 처음 발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처질은 전차만 만든 게 아니다. 사진을 찍을 때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 두 개로 표시하는 V-sign을 처음 창안한 사람도 처칠이다. 물 대신 우유를 마시면 건강에 좋다는 믿음을 퍼뜨린 사람 역시 그였다. 처질이 속했던 보수당의 지지기반이 낙농업자들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그림과 문학에도 재능을 보인 처칠은 1953년 노벨문학상까지 받는다. 처질의 상징은 불도그bulldog이기도 했는데,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하나인 <007 스카이폴>에 보면 이 상징이 등장한다. 처칠이야말로 잘나갔던 영국의 한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하겠다.


처칠이 한창 승승장구했던 1911년 유럽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고, 처칠은 First Lord of the Admiralty에 임명되었다. 번역하면 ‘해군성 장관’ 정도인데, 왜 해군성 장관이 장갑 전차를 만들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영국이 육군보다 해군을 주력으로 삼는 국가라는 사실을 상기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처칠이 전차를 처음 구상했을 때 붙인 이름은 landship이었다. 해군성 장관이었으니 당연한 작명이었을 터이다. 육지에서 운항하는 군함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 것인데, 그 모양새도 군함의 형태를 본떠서 설계되었다.

 

이택광

전차 사진 [출처: 위키백과]

 

전차에 왜 대포가 달려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말 그대로 함포가 육지로 올라온 형상이 전차의 모양새인 것이다. 따라서 처칠이 landship이라고 붙인 명칭은 상당한 언어적 감각을 갖춘 꽤나 괜찮은 이름이었다. 그런데 왜 난데없이 물탱크를 뜻하는 tank가 landship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일까. 한마디로 이는 보안 때문이었다. Landship을 만드는 임무를 맡은 어니스트 스윈턴은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 제조업자들조차 모르도록 철저하게 비밀을 지켰다. 스윈턴은 러시아로 보낼 물탱크의 제작을 의뢰하는 것처럼 꾸며서 비밀 병기에 대한 정보가 새 나가지 않도록 단단히 단속했다.

 

처음에 스윈턴은 제조업자들에게 앞으로 만들 것이 당시 동맹국이었던 러시아로 보낼 water carrier라고 했다.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이 보고를 받은 처칠은 파안대소하면서 water carrier를 줄이면 수세식 화장실(WC)처럼 들려서 웃기다고 지적했다. 노동자들이 자칫 lavatory를 만드는 줄 알고 소홀하게 작업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농담 섞인 우려도 표시했다. 상관으로부터 뜻하지 않은 지적을 당한 진지한 스윈턴은 처음 반짝했던 자신의 상상력도 살리고 처칠의 의도도 반영해서 water carrier를 water tank로 바꿨다. 이 암호명을 사용하여 스윈턴은 훌륭하게 비밀을 지켰고, 덕분에 우리는 landship을 tank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이것이 처칠이 구상한 landship이 tank가 된 사연이다.

 

이렇듯 훌륭하게 보안을 지켜서 만든 tank였지만, 실전에서 그렇게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성능이 뛰어나게 우수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해군 중심 국가였던 영국이 육상 전투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든 희대의 발명품은 훗날 자신들에게 치명상을 입힐 무기가 되어 돌아왔다. tank를 만든 이들은 영국인이었지만, 정작 그 무기를 제대로 쓸 줄 알았던 이들은 독일인이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은 영국군이 버리고 간 탱크를 수거해서 성능을 향상시켰고, 이로 인해 독일의 대전차 군단은 탄생하게 되었다. 또 다른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하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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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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