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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tch pay의 진실
영어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풍부한 어휘
그러나 Dutch pay도 영어에 없는 말이다. Going Dutch라는 말이 와전되어서 Dutch pay가 된 것 같다. Going Dutch라는 말은 Dutch treat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Dutch의 뉘앙스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을 리가 없다.
네덜란드 국기 [출처: 위키피디아]
영어는 외국어이기 때문에 숱한 오해를 살 때도 있다. 공간을 초월해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날 것이다. 백과전서파 작가라고 할 수 있는 빌 브라이슨에 따르면, 심지어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끼리도 의사소통이 마냥 쉽지 않다고 한다. 실제로 같은 잉글랜드라고 해도 남쪽 지방 영국인들은 요오크셔나 컴브리아 지방 사투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영어는 그만큼 쉽지 않은 언어다.
그런데 왜 영어가 세계적인 공통어 노릇을 하게 된 것일까. 브라이슨도 말하듯이 20만 자 이상의 영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독일어나 프랑스어 단어보다도 많은 숫자다. 영어의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풍부한 어휘일 것이다. 영어는 어마어마한 동의어를 자랑하는 언어다. Roset's Thesaurus처럼 하나의 범주에 다양한 동의어를 포괄할 수 있는 사전을 가진 언어가 바로 영어다.
동의어가 많다는 것은 개방적인 언어라는 뜻이기도 하다. 배우는 사람 입장에서야 어휘가 많다는 것이 달갑진 않겠지만, 일단 배우면 미묘한 표현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렇다고 영어가 만능의 언어는 아니다. 다른 언어라면 훨씬 더 멋있게 전달할 수 있는 의미를 영어이기 때문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경험이라는 뜻만 해도 독일어는 Erlebnis와 Erfahrung으로 구분해서 쓰는데, 영어에는 experience라는 단어 하나다. Erlebnis는 어떤 사건의 체험처럼 강렬한 느낌을 받았을 때 쓰는 말이고, Erfahrung은 경험을 통해 뭔가 얻은 것이 있을 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영어에는 이런 구분이 없다. 영어와 다른 언어들의 특징을 따져보는 것은 영어라는 언어에 담겨 있는 역사적 맥락들을 살펴보는 것만큼이나 흥미로운 일이다.
여하튼, 영어가 다른 언어와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압도적인 어휘의 양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어휘의 쓰임새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영어에 담겨 있는 사고방식을 세세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영어라는 언어는 개방적이라고 했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썼던 영국인들이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른바 잉글랜드 중심주의가 있었다. 영어는 상당 부분 타자(other)에 대한 배제를 내포하고 있는 고약한 언어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네덜란드인(Dutch)을 상대로 만들어낸 표현들이다. 네덜란드인은 영국인과 마찬가지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다. 인접해있는 북해는 두 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활동영역이었다. 영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네덜란드인은 경쟁 상대이자 적이었다. 당연히 좋은 말이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영어에서 Dutch가 수식어로 붙는 말은 거의 나쁜 말이라고 생각하면 대체로 맞다.
Dutch courage라는 말이 있다. 네덜란드인의 용기라니 이상하다. 술 마시고 큰소리치는 용기를 Dutch courage라고 한다는 걸 알면 대충 어떤 용기인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영국 술이라고 아는 진(gin)이 네덜란드 술이라는 사실을 알면 왜 이런 말이 생겨났는지 짐작 가능하다. William of Orange로 알려져 있는 윌리엄 왕 3세가 영국에 유행시킨 술이 바로 진이다. 재미있게도 네덜란드를 여행할 때 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네덜란드인들은 다른 나라에 수출하지 않고 자기들끼리만 마신다는 진을 자랑스럽게 맛보여주기도 한다. 그만큼 네덜란드인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술이 진인 셈이다. 그런데 이 진이 영국에 오면 술주정뱅이의 허풍을 의미하는 말로 바뀌어버린다. 네덜란드인이 알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 일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Dutch feast라는 말은 잔치 중에 주인이 손님들보다 먼저 취해서 난장판을 만드는 것을 뜻한다. 역시 이 표현도 술과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본질적으로 주객이 뒤바뀐 상황을 암시한다. 그래서 Dutch comfort라는 말은 전혀 편안하지 않다는 의미로 쓰인다. 그러면 Dutch wife는 무엇일까. 네덜란드 부인이 아니라 홀아비가 품고 자는 긴 베개를 가리킨다. 네덜란드 남자들이 얼마나 무능한지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Dutch widow는 더 모욕적이다. 성매매 여성을 의미하니 모르고 썼다간 곤란한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 Dutch uncle이라는 말도 있다. Dutch라는 말이 붙으면 영어의 뉘앙스에서 반대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미국의 스토우 부인이 쓴 『톰 아저씨의 오두막』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의 원제가 Uncle Tom's Cabin이다. 당시 나이를 막론하고 백인에게 ‘녀석(boy)’이라고 불렸던 흑인에게 uncle이라는 호칭을 붙였다는 사실만으로 이 소설은 도발적이었고 노예 해방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Dutch uncle은 이렇게 영어 uncle이라는 말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인자한 풍모를 한순간에 지워버리고 오직 ‘꼰대’의 면모만을 가진 중늙은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지금까지 열거한 Dutch라는 말의 쓰임새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영어를 일상에서 쓰지 않는 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그런데 평소에 우리도 모르게 쓰는 Dutch와 관련된 표현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자주 쓰는 말이 영어의 Dutch 의미와 정반대로 쓰이고 있어서 재미있다. 그 중 하나가 Dutch coffee다.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하루에도 몇 번씩 Dutch coffee라는 말을 여기저기서 말하거나 들을 수 있을 텐데, 영어에는 이런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Dutch coffee라고 알고 있는 찬물로 커피를 내리는 제조법은 cold brew라고 불린다.
Dutch coffee라는 말은 아마 최근에 만들어진 것 같은데, 일본의 커피회사가 지어낸 신조어라는 설이 있다. Dutch라는 말이 영어로 좋은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작명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Dutch coffee만이 아니다. 요즘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Dutch pay다. 한때 남녀가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는 문제로 인터넷이 뜨겁게 달아오른 적이 있다. ‘선진국 여성’은 데이트 비용을 공평하게 나누어서 Dutch pay한다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러나 Dutch pay도 영어에 없는 말이다. Going Dutch라는 말이 와전되어서 Dutch pay가 된 것 같다. Going Dutch라는 말은 Dutch treat이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Dutch의 뉘앙스를 생각하면 결코 좋은 의미를 담고 있을 리가 없다. 특정인을 지칭해서 이 말을 쓰면 한 마디로 그 사람이 인색하다는 뜻이다. 이른바 ‘선진국’에서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나도 학생일 때 영국 친구들한테 많이 얻어먹었다. 물론 맨날 얻어먹기만 해도 문제는 문제다. 하지만 개인주의가 발달했다는 ‘선진국’에서도 두 말 없이 남을 대접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좋은 일이다. 그만큼 인간관계도 깊어진다. 그런데 한국에서 Dutch pay라는 영어도 아닌 국적 불명의 말이 무슨 ‘선진국 에티켓’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처럼 Dutch라는 말을 아무 데나 함부로 붙여 쓰면 곤란하다. 영어 잘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네덜란드인들이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공식 국가명을 The Netherlands로 불러줄 것을 요청했다. 네덜란드는 ‘낮은 땅’이라는 의미다. 국토가 해수면보다 낮아서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지질학적 개념으로 국가 이름을 지었다는 사실에서 네덜란드인들이 Dutch라는 말로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을지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런 네덜란드인들의 심사에 아랑곳없이 꿋꿋하게 Dutch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나마 좀 나은 영국인들은 네덜란드를 Holland라고 부르기도 한다. Holland는 숲이 우거진 땅(wood land)이라는 뜻이다.
Holland는 네덜란드에 있는 여러 지방 중 하나인데, 적절한 명칭이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을 한국이라고 부르지 않고 경기도라고 부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보면 Flying Dutchman이 나온다. 19세기 전설 속에 아프리카 희망봉 주변에서 출몰한다는 유령선을 일컬어 Flying Dutchman이라고 불렀다. Dutchman은 할리우드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데, 대체로 피도 눈물도 없이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인물로 그려지지만 원래 의미만큼 모욕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Dutch라는 말에 담겨 있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문화를 통해 서로 다른 가치와 뒤섞이는 과정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어의 개방성은 가치의 혼종성을 용인하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과거에 형성된 의미 영역은 새로운 가치와 조우하면서 확장되거나 축소될 것이다. 언어는 생각을 지배하지만 또한 그 생각의 변화 때문에 바뀌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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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