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가을, 초등학교 6학년. 공식적인 취미 생활은 우표 수집. 비공식적으로는 전자오락. 엄마가 일하던 제과점 카운터에서 매일 50원짜리 동전을 슬쩍해서 전자오락실로 달려갔다. 열어둔 문 밖으로 늘 낯선 전자음이 흘러나오는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공으로 부숴야만 하는 총천연색 벽 옆에서 미녀를 납치한 킹콩이 술통을 굴리고 너구리가 벌레를 피해 압정을 뛰어넘는 세계가 나왔다. 오락이라는 게, 그것도 전자오락이라는게 얼마나 좋았던지, 한번 오락실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싫었다.
그런 내 귀에 외갓집에서 컴퓨터를 샀다는 소식이 들렸다. 당시 컴퓨터는, 아니, 당시 용어로 ‘개인용 컴퓨터’의 준말인 ‘퍼스컴’은 안 그래도 비싼데 내가 살던 소도시에서는 아무짝에도 소용없어 더욱 더 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외갓집을 뻔질나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모니터와 키보드, 저장 장치인 카세트테이프 레코더로 구성된 그 컴퓨터의 이름은 탐스럽게도 애플II였다. 컴퓨터 잡지에 예시된 대로 프로그램 어를 입력하면 모니터에 간단한 그래픽이나 요일 계산기 같은 게 나타나는, 말하자면 장난감. 그때 사용한 컴퓨터 언어는 베이직이었다. 이 언어는 ‘PRINT’ 같은 간단한 영어 명령어를 사용했는데, 그중에서도 나를 매혹시킨 건 ‘IF’와 ‘THEN GO TO’로 된 구문이었다. 이 원인과 결과의 세계는 얼마나 논리 정연하던지. 조건에 부합하기만 하면, 애플II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결과를 토해냈다. 컴퓨터 잡지를 보면서 영어로 명령어를 입력하다 보면 에러가 나기 일쑤였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수정을 거듭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된다는 믿음이 그때부터 생겨났다. 살다 보니 이 세상은 베이직보다 엉성한 언어로 이루어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 믿음만은 바뀌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세계에서 보자면, 1시간 가까이 지직거리며 카세트테이프에 저장된 프로그램을 힘겹게 인식하던 1982년의 애플II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지금부터의 세계에서 보자면 내게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지 끊임없이 질문하는 좋은 친구 같은 것이다. 이 친구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할 뿐, 선택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애플II가 등장한 뒤 20여 년 정도이 지나 아이팟이 나왔다. 거기에는 달린 거리와 속도를 측정할 수 있는 달리기 앱이 내장돼 있었다. 그건 말하자면, “달려볼래?”라고 묻는 목소리와 같았다. 그 목소리를 듣고 달리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내가 결정한다. 하지만 아이팟을 만든 이는 아마도 사람들이 달릴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인간의 선의에 대한 이 믿음이란 정말 대단하다.
외국에서 지내다 보면, 일정이나 비행기 탑승 시간 등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나 혼자만 현지에 남는 경우가 생긴다. 이미 오랜 외유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진 터라 귀국한다는 마음으로 들뜬 사람을 혼자 배웅하는 기분은 썩 좋을 리 없다. 혹시 현지인에게 박대라도 받는다면,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다 찢어질 때까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싸울 마음이 가득한, 그런. 그러니까 주인을 잃고 나 혼자 이 세상 어느 구석엔가 처박힌 낡은 곰돌이가 된 듯한 기분이다. 2008년 마드리드 시청의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호스텔의 좁은 방에 누워 있을 때 기분이 딱 그랬다. 스페인에 머문 지는 어느덧 2달이 지났고, 여럿이 여행하다가 어쩌다 보니 나 혼자 남게 됐다. 내가 다시 호스텔로 돌아오자, 직원이 “넌 왜 안 갔니?” 라고 묻는 듯 쳐다봤다. 그때부터 다음 날 다시 공항으로 가기 위해 호스텔을 나서기까지 24시간 남짓은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인터넷을 한 시간이었다. 호스텔의 와이파이에 접속한 나는 내가 아는 모든 사이트에 들어가 닥치는 대로 글을 읽었다. 기사도 읽고 개인 블로거의 글도 읽고 댓글도 읽고 댓글의 댓글도 읽었다. 마드리드에서 못 가본 곳을 구경하면서 마지막 날을 뜻깊게 보낼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더 이상 움직일 에너지가 없었다. 아마도 외롭다는 생각 때문인 듯했다. 인터넷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던 것 역시 컴퓨터를 끄면 찾아올 혼자라는 생각이 싫었던 것이리라.
그러다가 새벽이 되어 마침내 더 이상 컴퓨터 화면을 바라볼 수 없는 상태가 찾아왔다. 그 순간, 목표라는 게 있다면 불을 끈 뒤 뒤돌아보지도 않고 잠드는 일. 나는 불을 끄고 얼른 침대로 들어가 누웠다. 그러나 잠이 라면 이미 낮에 충분히 잤다. 시간이 지나면서 정신은 더욱더 말똥말똥해졌다. 너무나 순수한, 비유하자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외로움이 찾아왔다. 바로 그때였다. 인기척에 눈을 떠보니 방 안 한구석에서 뭔가가 숨을 쉬고 있었다. 일어나 보니 그건 조금 전에 내가 끈 노트북이었다. 충전등이 어둠 속에서 마치 숨을 쉬는 듯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본 불빛이었지만, 새삼스러웠다. 그건 마치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말하는 목소리 같았다. 하지만 “선택은 너의 몫이야” 라고도 한 것 같았다. 여기서 외로울 건지, 끝까지 여행할 건지. 숨 쉬는 듯한 느낌으로 그 불빛을 설계한 사람은 이 세상에는 컴퓨터만이 유일한 위안이 되는 외로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그건 정말 대단한 테크놀로지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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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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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nely planet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 3월 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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