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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날 수 없는 힘 - <인사이드 르윈>

어쩐지 결핍의 순간에 필요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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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내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장 건강의 회복’도, ‘따뜻한 보일러의 귀환’도, ‘TV가 기세 좋게 뿜어내는 선명한 화면’도 아니었다. 내가 바란 것은 바로 ‘소리’였다.

어제는 ‘이번 주 영사기는 무얼 쓸까?’하며 온종일 고민하다 별의 별 생각 끝에, 아무것도 쓰지 못하며 하루를 보냈다. 당신이 글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십분 이해하겠지만, 글쟁이가 아무런 글을 쓰지 못할 때의 고통이란 글을 많이 써서 겪는 고통의 수천만 배에 해당한다. 게다가 마감까지 다가오는데, 쓰지 못할 때의 자괴감은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로 여기게 만든다. 이제 와서 말하자면, 나는 이 칼럼을 쓰기 위해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수상한 그녀>,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와 <어바웃 타임>, <인사이드 르윈>과 <아웃 오브 아프리카>, 그리고 <석양의 무법자>와 <황야의 무법자>를 봤다. 매번 대충 써내는 듯한 이 칼럼도 실은 단 한 번의 헛소리를 하기 위해 나름의 헛발질을 해대는 셈이다.

 

가장 강력한 후보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였다. 나는 아버지란 존재가 되어 느끼는 감정, 그 미지의 세계에 대한 탐구 보고서를 써볼까 싶었다. 즉, 가상의 자식 - 딸이 됐건 아들이 됐건 - 그 미래의 존재에게 편지를 써볼까 했다. 약 3주 전에 떠올리어 나름의 초안을 잡고 두 문단 정도의 문장도 메모해뒀지만, 아무래도 <변호인>때부터 너무 진지하게 써온 것 같아 접었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를 보고 난 후 나의 주식 투자사에 관해 써볼까 싶었지만,  <퍼시픽 림>을 쓸 때 잠깐 밝히기도 했고, 소설가가 자본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써대는 것도 어색해 그마저도 접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영사기의 소재로 채택된 영화는 나름의 엄선을 거쳐서 결정되는데, 절박한 수준에 이르면 보지 않은 영화에 까지 눈길이 간다. 그 일례로 <겨울 왕국>을 보진 못했지만, 주인공의 손이 닿자마자 모든 사물이 얼어붙는다는 시놉시스를 듣고선 문득 하나가 떠올랐다.

 

 ‘어. 나도 손만 대면 다 고장 나는데’

 

 물론 내가 얼음공주가 될 리는 없으므로, 굳이 써보자면 ‘고장 작가’ 혹은 ‘고장 노인’ 정도로 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보지도 않은 영화를 가지고 쓰는 건 아무래도 찜찜해서 나는 어제 그야말로 처참한 심정이 되어 단골 카페 주인에게 DVD 7편을 빌려 집으로 왔다. 칼럼 담당자에겐 사정을 설명하고 마감을 하루 늦춘 후 DVD를 플레이어에 넣었는데, 그만 TV가 고장 나 버렸다. ‘아니, 이 무슨 <겨울왕국>같은 상황인가!’하며 탄식한 후, 컴퓨터로라도 영화를 보려고 켜보니, 이번엔 사운드 카드가 날아가 버렸다. ‘아아, 이 무슨 난관인가’ 하며 당혹감에 젖어 따뜻한 샤워라도 해 정신을 차리려 하니, 이번엔 보일러가 고장 나 있었다. 사실 어제 지나친 마감 스트레스와 추위로 인해 장염 기운까지 있었으니, (내 손으로 배를 문지른 탓인지는 몰라도) 몸까지 고장 난 셈이었다. 물론 정신은 일찌감치 고장 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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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내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장 건강의 회복’도, ‘따뜻한 보일러의 귀환’도, ‘TV가 기세 좋게 뿜어내는 선명한 화면’도 아니었다. 내가 바란 것은 바로 ‘소리’였다. 추운 집에 TV도 컴퓨터도 고장 나버리니, 적막하게 싸늘한 공기만이 나를 감쌌다. 따뜻한 물이 나왔더라면 생각이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왠지 그 순간에 가장 그리웠던 것은 사람이 들려주는 음악이었다. 나는 결국 휴대전화기로 음악을 틀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재생된 음악은 왬의 ‘Freedom’이었다. 어쩐지 사운드가 따뜻한 샤워기에서 흘러나오는  물처럼 내 영혼을 덥혀주었다. 여러모로 불편했지만, 신기하게도 곡 제목처럼 소리가 자유가 되어 나를 적셔주는 듯 했다. 그것은 어쩌면 불편 속에 느끼는 상대적인 자유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오히려 음악에 더욱 집중 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음악의 가치는 더욱 빛나고 있었다. 그 다음에 흘러나온 음악은 <서칭 포 슈가맨>의 O.S.T인 'Can't Get Away'였다. 나의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로드리게스는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는 듯이, 자신도 그렇게 추운 겨울 같은 삶을 살아왔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이, 그렇기에 음악의 그리움에서 더욱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넌 벗어날 수 없을 거야’라고 노래 불러주었다. 

 

그제야 나는 이번 주 영사기의 영화를 정했다. 단연코 <인사이드 르윈>이었다. 1961년의 뉴욕에서 보일러나 TV나 컴퓨터가 고장 난 게 아니라, 아예 집이 없어 이 집 저 집 하루씩 신세지며 떠돌아다니는 르윈이 진정 사랑했던 것은, 아니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음악’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내가 모든 것이 고장 난 방에서 하룻밤을 버틸 수 있었던 게  바로 음악이 있었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이 원고를 보내자마자 나는 지난주에 갔던 극장에 다시 한 번 갈 것이다. 코트 깃을 여미며 생의 추운 시기를 걸어 나갔던 르윈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어졌다. ‘르윈의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모든 음악가에게 경배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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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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