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영화로왔던 시간들 - <일대종사(一代宗師)>
데보라의 테마, 그리고 30년
당연한 말이지만, 올해는 2013년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본지 29년이 지났다. 1984년과 2013년 사이에 나는 소년에서 30대로,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용돈을 타는 꼬마에서 용돈을 드려야 할 성년으로 변했다. 그 사이 변하지 않은 단 하나가 있다면, 나는 여전히 관객이라는 사실이다. 내 청춘의 한 관문을 장식했던, 왕가위 감독의 신작 <일대종사>를 볼 때도 나는 여전히 관객이었다.
평소 제 글을 아껴주시는 몇 안 되는 분들께 양해를 구합니다. 이번 글은 제가 평소에 지켜온 원칙, 즉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제 감상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것을 위배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렇게 쓰지 않고선 도저히 배길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습니다. 아무쪼록 깊은 이해를 구합니다.
내가 극장에서 처음 본 영화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였다. 초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생애 처음으로 컴컴한 극장문으로 들어섰다. 아마, 아버지는 그 순간이 내 생을 어떻게 채색할지 예상 못했을 것이다. 한글을 배운지 얼마 안 된 한 소년은 명멸하듯 지나가는 자막을 눈으로 잡느라 정신이 없었다. 얼굴조차 구분하기 힘든 배우들이 총을 쏘고, 육체를 뒤섞고, 순식간에 늙어갔다. 학교에서 배운 단어로는 도저히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고 나는 극장문을 나섰다. 그 뒤에도 오랫동안 나의 감정에서 떠나지 않은 건, 그 영화의 배경음악 ‘데보라의 테마’였다.
중학교에서 입학하고서야 나는 용돈이라는 걸 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불과 버스비와 간식비 정도였지만, 나는 그 돈을 거의 전부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극장에 갖다 바쳤다. 방과 후 자전거 페달에는 사춘기 소년이 신체에서 생성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가 실려 있었다. 극장 앞에는 유리 칸막이 안으로 따닥따닥 붙은 스틸 컷이 있었고, 그 아래에는 둥그런 모니터 안에서 예고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와 친구는 영화를 쉽게 볼 수 없었기에 예고편만 하루에 수십 번씩 보았다. 우리는 성문기초 영어에 있는 예문보다 예고편의 대사를 훨씬 친숙하게 외웠다. ‘커밍쑨’으로 귀결되는 굵직한 성우의 목소리를 따라 하기엔 변성기조차 오지 않은 우리의 풋내기 성대가 원망스러웠다. 그 시절 우리의 장래희망은 모두 ‘극장 주인’이었다.
중학교 이후의 나는 많은 일을 겪으며 변했지만, 변치 않고 유지한 단 하나가 있다. 그것은 아무리 시간이 없고 아무리 돈이 없더라도,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나는 밥 대신 영화를 택할 정도로, 컴컴한 극장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영화를 시작할 때면 빨간 커튼이 펼쳐졌고, 이내 둥그런 글씨체의 자막이 장면이 바뀔 때마다 송골송골 화면을 장식했고, 끝날 때면 다시 빨간 커튼이 닫혔다. 지방 소도시의 억압적인 입시체계와 이루지 못한 짝사랑과 부모조차 응원해주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은 영화관에 있는 순간만큼, 모두 휘발되었다. 말 그대로 영화로운 영화관이었다.
생의 통과의례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인지라 나도 군복을 입어야 했고, 청춘의 한 시절은 바다 건너 생경한 땅에서 외국어만 써야할 때도 있었다. 그때에도 가장 그리웠던 것은 냄새나고 컴컴한 상영관 안에 새어나오는 영사기의 한 줄기 빛이었다. 나는 휴가를 나오면 게걸스럽게 밀린 영화를 보았고, 때론 유학생 선배의 집에 안면몰수하고 찾아가 목말랐던 방화를 해치우고 돌아오곤 했다. 돌이켜보니, 2천여 편의 영화를 본 것 같다.
당연한 말이지만, 올해는 2013년이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를 본지 29년이 지났다. 1984년과 2013년 사이에 나는 소년에서 30대로,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용돈을 타는 꼬마에서 용돈을 드려야 할 성년으로 변했다. 그 사이 변하지 않은 단 하나가 있다면, 나는 여전히 관객이라는 사실이다. 내 청춘의 한 관문을 장식했던, 왕가위 감독의 신작 <일대종사>를 볼 때도 나는 여전히 관객이었다. 시대가 이 관객으로서의 역사를 일단락 지어주려는 것인지, 일대종사의 종반부에선 귀에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비록 연주 방식은 달랐지만, 그것은 분명히 내가 컴컴한 극장문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의 감정 안으로 들어와 나에게서 산화되지 않은 ‘그것’이었다. 생애 첫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삽입곡, ‘데보라의 테마’가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는 스피커 구멍 사이로 새어나왔다. 부끄럽게도 나도 모르게 눈이 뜨거워졌다. 관객으로서 살아왔던 근 30년의 시간이 일단락되는 기분이었다. ‘생의 삼분의 일을 결코 시시하지 않게, 내가 감히 경험해보지 못할 세계와 감정을 이 동굴 안에서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었다.’ 이렇게 느끼는 동안 어느새 스크린은 무심히 깜깜해져 자막만을 올리고 있었다. 직원이 청소를 해야 한다고 내게 말했을 때, 나는 잠시 손으로 얼굴을 닦은 뒤 고개를 들어야 했다. 나는 속으로 ‘고마웠어’를 되뇌고 있었다. 영화로운 시간이 흘러왔고, 영화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영사기는 여전히 내 등에서 돌며 빛을 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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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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