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시네마 처방전 <프라미스드 랜드>

쉽사리 끓지도, 식지도 않는 온도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과 과하지 않은 대사와 쉽사리 싫증나는 후크송을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뻔해 보이는 이야기를 골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어떻게 살을 붙여 가는지 발견하는데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는 꽤 괜찮은 영화가 될 것이다.

시골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런 정서를 느낄지 모르겠다. 자라는 동안, 매번 보아온 지겨운 녹색의 연장이 마치 자신이 가진 삶의 모든 색깔인 것처럼 여겨져,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그래서 어서 다양한 색채로 가득한 삶을 만끽하고 싶다고. 그래서 청춘의 열정과 자신의 재능을 맘껏 채색해보고 싶다고. 그것이 욕망의 붉은 색이건, 알 수 없는 회색이건, 밤으로 상징되는 검은색이건, 우선 다른 색을 보고 싶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는 줄곧 녹색을 보여준다. 환경단체를 녹색단체라고 부르듯이, 환경에 대해, 공동체의 유산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화면에 녹색을 가득 채우고 시작한다. 블랙 코메디나, 빨간 책처럼 색깔로 분류되는 예술상품이 있듯이, 이 영화를 굳이 분류하자면 ‘그린 시네마’라 할 수 있다. 말했다시피 스크린에 잔뜩 등장하는 색깔이 녹색이고,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 또한 녹색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사실 이번 주에 <프라미스드 랜드> 외에 <변호인>도 보았지만, 오늘 이 영화를 보고서 쓰겠다고 마음에 담아둔 영화를 바꾸었다. 그렇다고 해서 <변호인>이 별로라는 건 절대 아니다. <변호인>도 훌륭한 영화이지만, <프라미스드 랜드>가 더 가슴 깊이 착륙을 했고, 아마 이 영화는 현재 한국영화시장의 상황을 미루어보건대, <변호인>보다 훨씬 이른 퇴장을 할 것이 뻔해 보인다. 나는 모두가 <변호인>에 조명을 비추어줄 때, 이 ‘영사기’라는 작은 나트륨 등 하나를 <프라미스드 랜드>에 헌정하고픈 마음뿐이다. 혹시 <변호인>을 보고 감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프라미스드 랜드>도 한 번 보시길. <변호인>처럼 피를 끓이는 비등점이 낮진 않지만, 온탕인 상태로 당신의 피를 결코 식히지 않은 채 그 온도를 유지해줄 것이다.

여러 번 말해왔고, 간간이 이 칼럼을 읽어온 독자라면 알겠지만, <영사기>는 ‘본격 삼천포 영화 칼럼’이다. 즉, 영화는 언제나 소재일 뿐, ‘영사기’는 언제나 영화 외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간혹 나는 이 원칙을 어기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이야기를 반죽하고, 빚고, 깎아내는 한 사람이 보기에 멋지게 다듬어진 조각상인데, 세상의 그 어떤 빛도 이 조각상을 비추지 않을 때이다. 나는 올해 농담을 하지 않고 진짜로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두 번 있는데, 한번은 <셰임>을 말할 때였고, 다른 한 번은 <플레이스 비욘즈 더 파인즈>를 말할 때였다. 아마 이번이 올해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과 과하지 않은 대사와 쉽사리 싫증나는 후크송을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뻔해 보이는 이야기를 골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어떻게 살을 붙여 가는지 발견하는데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는 꽤 괜찮은 영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나처럼 시골 생활이 지겨워 고향을 떠났지만, 삶의 허무가 문득 끊임없는 파도처럼 일상을 엄습해올 때 자기도 모르게 그 지겨웠던 고향이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즉, 그토록 지겨워했던 녹색이 그리워지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치료제가 될 지도 모른다. 소설가가 이런 말을 하긴 쑥스럽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충분히 ‘처방’을 받았다. 간만에 뻔한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 번 발견했다. 보편성의 힘도 확인했다. 그러므로, 올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마이크 스위치를 켜고 말한다.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곧 자본논리에 의해 퇴장될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재미없다면, 보는 내내 짜증이 밀려왔다면, 물론 내 험담을 맘껏 해도 좋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하는 험담이라면 얼마든지 여유롭게 받아줄 만큼 나는 충분히 처방 받았다.


[관련 기사]

-‘않더라도’의 자세 - <머니볼>
-나의 첫 차에 대해 - <러시>
-인류의 미래 - <칠드런 오브 맨>
-여권은 어떻게 발급되는가 - <친구 2>
-사라진 택배의 행방 <갬빗>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오늘의 책

트럼프의 귀환, 위기인가? 기회인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을 거머쥔 트럼프. 글로벌 무역 질서를 뒤흔들 트럼프 2기 정부의 명암과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국제 정세에 미칠 영향에 대해 설명하는 박종훈 저자의 신간이다. 강경한 슈퍼 트럼프의 시대에 직면한 대한민국이 어떠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지 그 전략을 제시한다.

이래도 안 읽으실 건가요

텍스트 힙에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독서가 우리 삶에 필요해서다. 일본 뇌과학계 권위자가 뇌과학으로 입증하는 독서 예찬론. 책을 읽으면 뇌가 깨어난다. 집중력이 높아지고 이해력이 상승하며 즐겁기까지 하다. 책의 장르는 상관 없다. 어떤 책이든 일단 읽으면 삶이 윤택해진다.

죽음을 부르는 저주받은 소설

출간 즉시 “새로운 대표작”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며 베스트셀러가 된 작품. 관련 영상을 제작하려 하면 재앙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소설 『밤이 끝나는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이 함께 떠난 크루즈 여행 중 숨겨진 진실과 사라진 작가의 그림자가 서서히 밝혀진다.

우리 아이 영어 공부, 이렇게만 하세요!

영어교육 전문가이자 유튜브 <교집합 스튜디오> 멘토 권태형 소장의 첫 영어 자녀 교육서. 다년간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초등 영어 교육의 현실과 아이들의 다양한 학습 성향에 맞는 영어 학습법을 제시한다. 학부모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침과 실천 방안을 담았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