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런 정서를 느낄지 모르겠다. 자라는 동안, 매번 보아온 지겨운 녹색의 연장이 마치 자신이 가진 삶의 모든 색깔인 것처럼 여겨져,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그래서 어서 다양한 색채로 가득한 삶을 만끽하고 싶다고. 그래서 청춘의 열정과 자신의 재능을 맘껏 채색해보고 싶다고. 그것이 욕망의 붉은 색이건, 알 수 없는 회색이건, 밤으로 상징되는 검은색이건, 우선 다른 색을 보고 싶다고. 이런 말을 하는 건, 나 역시 그랬기 때문이다.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는 줄곧 녹색을 보여준다. 환경단체를 녹색단체라고 부르듯이, 환경에 대해, 공동체의 유산에 대해 말하고 있는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화면에 녹색을 가득 채우고 시작한다. 블랙 코메디나, 빨간 책처럼 색깔로 분류되는 예술상품이 있듯이, 이 영화를 굳이 분류하자면 ‘그린 시네마’라 할 수 있다. 말했다시피 스크린에 잔뜩 등장하는 색깔이 녹색이고,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 또한 녹색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사실 이번 주에
<프라미스드 랜드> 외에
<변호인>도 보았지만, 오늘 이 영화를 보고서 쓰겠다고 마음에 담아둔 영화를 바꾸었다. 그렇다고 해서
<변호인>이 별로라는 건 절대 아니다.
<변호인>도 훌륭한 영화이지만,
<프라미스드 랜드>가 더 가슴 깊이 착륙을 했고, 아마 이 영화는 현재 한국영화시장의 상황을 미루어보건대,
<변호인>보다 훨씬 이른 퇴장을 할 것이 뻔해 보인다. 나는 모두가
<변호인>에 조명을 비추어줄 때, 이 ‘영사기’라는 작은 나트륨 등 하나를
<프라미스드 랜드>에 헌정하고픈 마음뿐이다. 혹시
<변호인>을 보고 감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프라미스드 랜드>도 한 번 보시길.
<변호인>처럼 피를 끓이는 비등점이 낮진 않지만, 온탕인 상태로 당신의 피를 결코 식히지 않은 채 그 온도를 유지해줄 것이다.
여러 번 말해왔고, 간간이 이 칼럼을 읽어온 독자라면 알겠지만, <영사기>는 ‘본격 삼천포 영화 칼럼’이다. 즉, 영화는 언제나 소재일 뿐, ‘영사기’는 언제나 영화 외의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간혹 나는 이 원칙을 어기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건 이야기를 반죽하고, 빚고, 깎아내는 한 사람이 보기에 멋지게 다듬어진 조각상인데, 세상의 그 어떤 빛도 이 조각상을 비추지 않을 때이다. 나는 올해 농담을 하지 않고 진짜로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두 번 있는데, 한번은
<셰임>을 말할 때였고, 다른 한 번은
<플레이스 비욘즈 더 파인즈>를 말할 때였다. 아마 이번이 올해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과 과하지 않은 대사와 쉽사리 싫증나는 후크송을 꺼려하는 사람이라면, 뻔해 보이는 이야기를 골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 어떻게 살을 붙여 가는지 발견하는데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
<프라미스드 랜드>는 꽤 괜찮은 영화가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나처럼 시골 생활이 지겨워 고향을 떠났지만, 삶의 허무가 문득 끊임없는 파도처럼 일상을 엄습해올 때 자기도 모르게 그 지겨웠던 고향이 생각나는 사람이라면, 즉, 그토록 지겨워했던 녹색이 그리워지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는 치료제가 될 지도 모른다. 소설가가 이런 말을 하긴 쑥스럽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충분히 ‘처방’을 받았다. 간만에 뻔한 이야기의 힘을 다시 한 번 발견했다. 보편성의 힘도 확인했다. 그러므로, 올해 내게 주어진 마지막 마이크 스위치를 켜고 말한다.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곧 자본논리에 의해 퇴장될 이 영화를 한 번 보시길. 재미없다면, 보는 내내 짜증이 밀려왔다면, 물론 내 험담을 맘껏 해도 좋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화를 보고 하는 험담이라면 얼마든지 여유롭게 받아줄 만큼 나는 충분히 처방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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