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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집으로, 먼 기차여행을 다녀온 아이와 함께

닫힌 공간에서 부화하는 무한한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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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마노 쥘로와 알베르틴이 함께 지은 『토요일의 기차』 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도시에 사는 어린이인 나는 엄마의 배웅을 받으면서 할머니집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다. 높고 웅장한 역사를 출발한 기차는 서서히 빌딩 숲을 빠져나간다.

“우리 아이는 기차를 유난히 좋아해요. 장난감도 기차만 사달라고 하고, 차를 타고 가다가도 기차가 가는 걸 보게 되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해요.”

분홍색, 자동차, 공룡. 어린이를 매료시키는 3대 아이템이라고들 한다. 분홍색을 입고 쓰고 분홍색을 든 아이, ‘트리케라톱스’ 같은 어려운 공룡 이름을 수십 가지씩 줄줄 외우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소리 없이 많기 때문이다. 놀이방 구석에 웅크려 앉아서 말없이 기찻길을 조립하는 아이, 다른 일을 하다가도 기차가 지나가는 시간만 되면 철길이 보이는 창문 앞으로 달려가는 아이, 지하철 노선도로 어느새 색깔과 숫자를 다 배워버린 아이,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대부분 조용하다.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의 특징 중 하나는 어른이 될 때까지 그 마음을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독일의 뉘른베르크에 있는 장난감박물관에는 꽤 큰 규모의 모형 기차 전시관이 있다. 모형 기차가 실제로 운행하는 시각이 되면 관객들이 이 방을 꾸역꾸역 모여든다. 어린이를 위한 박물관이지만 어른들이 꽤 많다. 일부러 이 모형기차를 보러 먼 도시에서 찾아왔다는 어른들도 있다. 그 방의 운영자인 할아버지 기사님은 정각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산도 있고 다리도 있고 강도 흐르는 초등학교 교실만한 공간 안에서 수십 대의 기차를 움직인다. 나이와 성별을 뛰어넘어 낮은 감탄의 목소리가 흐른다. ‘아!’. 그리고 다시 모두 침묵한다. 기차의 동선과 경적 소리에 집중하는 것이다.

“왜 기차가 좋아요?”라고 물어보면 사람마다 다른 대답을 한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같은 시간에 가고 같은 시간에 오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강도 터널도 지나 멀리 멀리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이 좋아서, 그 무거운 물건을 실어 나르면서도 조금도 힘들어하지 않는 가늘고 날렵한 몸통이 좋아서, 내가 보고 싶은 누군가가 늘 기차에서 내렸기 때문에, 객차를 매달면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는 무한한 연장성이 매력적이어서...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 중에는 기차를 좋아하는 아이가 끈이라거나 뱀이라거나 다른 긴 것을 함께 좋아하는 경우도 있다. 기차를 좋아하는 아들을 둔 한 아버지는 마루에 하얀 켄트지 전지를 붙여 놓고 퇴근하면 함께 엎드려 우리나라 철도 노선도를 전부 옮겨 그린 적이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 집에 놀러 가보니 어디에든 색색의 끈이 걸려 있었다는 것. 아이는 두루마리처럼 긴 끈을 들고 다니면서 무언가를 서로 연결하는 놀이를 좋아했다. ‘연결하면 다 갈 수 있으니까’. 그 아이가 끈과 기차를 좋아한 이유였다. 미야자와 겐지는 『은하철도의 밤』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머나먼 별과 별을 연결하는 상상의 철로를 놓았다.

긴 명절이 끝났다. 명절이 될 때마다 북새통을 이루는 곳은 기차역이다. 비좁고 북적이는 도시에서 자라던 아이들은 거대한 기차역을 통해서 활짝 열린 들판, 드넓은 하늘로 출발한다. 어른들에게 기차역이 언제나 ‘고향 역’의 이미지라면 아이들에게 기차역은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우주정거장 같은 곳이다. 그들에게 철길은 되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아득한 출발선이라는 점에서 좀 다른 마음이 작용하는 공간이다.


제르마노 쥘로와 알베르틴이 함께 지은 『토요일의 기차』는 그런 아이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도시에 사는 어린이인 나는 엄마의 배웅을 받으면서 할머니집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탄다. 높고 웅장한 역사를 출발한 기차는 서서히 빌딩 숲을 빠져나간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멀리 살아요. 그곳은 세계의 반대쪽 끝이나 다름없어요.’

아이가 올라탄 기차는 그림책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단 한 번도 방향이나 각도를 바꾸지 않고 달린다. 낯익은 초등학교를 지나고 우당탕탕 험악한 공사장을 지나고 어지러운 곡선이 엇갈리는 자동차 순환도로를 지나는 동안 기차는 절대 흔들리지도 다른 곳을 보지도 않는다. 기차에 앉은 아이는 그 모든 것을 아주 안전하게 지켜본다. 성장을 돕는다는 것은 어쩌면 이런 것이다. 새로운 모든 것 앞에 스스럼없이 아이를 놓아주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곁에서 그를 지켜주는 것. 책 속에서 기차는 그의 유일하고 멋진 보호자다.

‘엄마랑 할머니는 말해요. 모든 곳을 여행할 수는 없대요. 온 세상을 담기에는 내가 너무 작대요.’

대개의 어른들은 기차처럼 침착하지도 너그럽지도 않다. 그들도 자신만의 철길을 달린 적이 있지만 뜻밖의 차단기를 만나거나 정든 간이역을 폐쇄당한 경험도 있기 때문에 아이의 여행을 마냥 격려하지 못하는 속내를 갖고 있다. 아이는 그런 어른의 마음을 알 듯 모를 듯하다. 아슬아슬한 것은 모든 여행이 마찬가지다. 외로운 들판을 지나야 하는 것도.

‘내 안을 들여다보고 살피는 일만 해도 아주 어렵대요.’

어느새 기차는 강둑과 풀숲을 지난다. 신기하게도 나무와 꽃과 들풀이 모두 기차 속에 앉은 아이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아이는 혼자 철길 위에 있지만 세상은 이렇게 그를 사랑한다. 들판의 커다란 소는 아주 작은 눈을 떠서 아이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기차가 빠져나가는 아름드리 전나무 숲은 아마도 그를 지켜주는 수천 년의 역사다. 아이는 이 기차 여행을 하면서 조금 자란다.

‘나는 크는 게 좋아요. 하지만 나는 삶이 빠르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결심한다. 모든 곳에 가보겠다고. 그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곳에 기차가 함께 가주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은 아니고, 내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언젠가는 기차가 꼭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기차는 늘 그랬기 때문이다.

이 그림책의 절정은 조그만 들풀들이 가득한 벌판을 지날 때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다, 이렇게 대단한 작은 사람들이다’라고 외치는 것 같은 수많은 꽃과 잔풀들, 그 사이를 달리는 기차. 아이는 말한다. 엄마랑 할머니는 이미 잊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이쯤 되면 이 기차를 탄 것은 아이가 아니라 그 책을 곁에서 읽는 우리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향 역에서 기다리는 할머니는 바로 우리 엄마다.

기차 여행은 어린 시절에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수평적 경험이다. 우리는 얼마나 길게 이어져 있는지 기차만큼 잘 가르쳐주는 것은 없다. 기차가 알려주는 것은 그밖에도 많다. 가끔은 멈춰야 한다는 것, 객차 안의 사람은 모두 같은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 돌아보지 않고 한 길로 가면 반드시 목적지에 닿게 된다는 것. 설날, 기차를 타고 할머니 집에 다녀온 아이의 머릿속에는 이 모든 것이 알 수 없는 이미지로 남아있을 것이다. 『토요일의 기차』를 타고 할머니집에 다녀온 주인공처럼.


함께 선물하면 좋은 것

『우리땅 기차여행』
조지욱 글/한태희 그림 | 책읽는곰

우리땅 기찻길 여행을 입체 그림지도로 구성한 커다란 그림책. 기차를 타고 보는 세계가 수평적 경험에 제한된다면 이 그림책은 수직적 경험을 덧붙여준다. 하늘을 날며 내려다보는 것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 도시, 산맥, 강의 구석구석을 보여준다. 서울-광주-부산-정동진을 잇는 기차 여행의 경로 어디쯤에는 가족이 함께 다니는 철길이 있을 것이다. 나란히 앉아 짚어보면서 다음 여행을 계획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칙칙폭폭 기다란 기차들』
로버트 크라우서 저/맹주열 역 | 비룡소

기차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꿈꾸었을 기차 팝업북이다. 책장을 펼칠 때마다 튀어나오는 기차역, 기차, 플랫폼,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장이라도 그 기차에 올라탈 수 있을 것 같은 가벼운 흥분을 일으킨다. 손을 타면 쉽게 부서지는 것이 팝업북의 약점이지만 이 책은 비교적 튼튼하게 되어 있어 잘 망가지지 않는다. 기차 매니아인 어린이라면 손길도 조심스럽겠지만.





『세계기차여행』
윤창호,이형준,정태원,최항영 공저 | 터치아트

세계의 철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 스무 군데를 골라 안내하는 책이다. 증기기관차부터 초호화특급열차까지 기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꿈꿀만한 여행 경로와 안내를 담아놓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세계 지도를 펼치고 해당 노선이 지나는 길을 찾아보거나 백지도에 크레파스로 노선을 그려보는 것도 겨울 주말에 재미난 놀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관련 기사]

-프로포즈를 앞둔 커플에게 - 『토끼의 결혼식』
-엄마, 언제 와?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이에게 - 『루와 린덴 언제나 함께』
-이 눈이 그치면 나는 어떤 삶과 결별을 결심할 것인가
-하얀 눈밭을 그리워하는, 비좁은 사무실 안 직장인에게
-오랫동안 함께 한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이들을 위하여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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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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