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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포즈를 앞둔 커플에게 - 『토끼의 결혼식』

“너랑 영원히 함께 있는 것, 그게 내 소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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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 윌리엄스는 펜과 잉크를 사용한 크로쉐칭 기법을 사용해 고전적이고 정밀한 선의 세계를 보여준다. 색의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검정과 흰색의 극단적 대조를 부각시켰다. 흑백으로 상징되는 결혼식 풍경 속에서 그의 펜 선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올 한 올 토끼털처럼 가늘어서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보다 내 여자 친구의 결혼이 더 싫죠. 같이 영화 보러 갈 사람이 또 하나 없어지는 건데.”

한 결혼식장에서 우연히 합석한 무혼(無婚)의 여성이 이런 말을 했다. 회사와 집을 쳇바퀴처럼 오가다보니 고교시절 단짝 친구 넷 가운데 자신만 싱글로 남았다면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결혼을 하고 싶은 건 또 아니고’라고 말꼬리를 단다. 신입 시절에는 결혼 관련 질문이 들어오면 ‘나를 여기서 몰아내려는 건가’ 싶어서 무조건 패기 있어 보이는 다른 말로 되받아쳤다고 했다. 이제는 위협과 진심을 구별할 정도로 노련한 직장인이 되었지만 결혼에 관한 대화는 여전히 불편하다는 것이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남자를 수백 번은 만나요. 속아서 결혼한 것 같다는 여자 동료는 더 많죠. 그런 말을 하다가 저보고는 또 언제 결혼할 거냐고 물어요. 누구라고 그 거대한 장막 안으로 자청해서 걸어 들어가겠어요.”

미지근하게 사귄 애인이 몇 있었지만 결혼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면 없는 두통도 생기기에 진지한 말이 나오기 전에 헤어졌다고 했다. 지금도 충분히 하루하루가 복잡하다면서.

그러나 세상 모든 청첩장은 기분 좋게 화사하고 ‘하루 공주’를 맡은 신부들은 더없이 아름답다. 신부 들러리가 되어 대기실에서 웨딩드레스를 입은 친구의 손을 잡아주다 보면 걱정이 담긴 미세한 떨림을 느끼게 된다. 사랑 없는 결혼이 불행하다면 사랑 있는 결혼은 행복할까.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한다면 결혼하지 않고 계속 사랑할 수는 없는 걸까. 까다로운 불신과 회의의 시간을 극복하고 누군가와 결혼을 결심하게 만든다면 그 필요충분조건은 무엇일까.

얼마 전에도 비슷한 고민을 하는 후배를 만난 적이 있다. 후배는 나도 잘 알고 있는 오랜 연인으로부터 심각한 결혼 제의 비슷한 걸 받았는데 확신이 서지 않아서 약속을 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교적 선명하고 상대의 진심도 알지만, 그의 입에서 ‘우리의 결혼식’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예상보다 훨씬 격렬한 울렁증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결혼, 결혼이라니.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데 어떻게 그런 약속을 해요.”

나는 좀처럼 두려움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그 후배에게 한 권의 그림책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간된 지 꽤 오래 된 그림책의 고전, 가스 윌리엄스의 『토끼의 결혼식』 이었다.


“나는 불안한 약속이 더 좋던데. 불안하지 않은 약속은 어쩐지 진실하지가 않아.”

그날 밤 후배에게 콩나물국밥에 따뜻한 모주를 한 잔 사주면서 그 그림책을 건네주며 말했다.

『토끼의 결혼식』 은 사랑을 다루는 그 어떤 책보다 끈적임이 적은 보송보송한 책이다. 안개가 드리운 숲 속에 살고 있는 첫눈처럼 부드러운 하얀 아기 토끼와 검은 아기 토끼가 주인공이다. 둘은 날마다 ‘폴짝 휙 깡총 뛰어넘기’와 숨바꼭질과 도토리 찾기를 하며 즐겁게 논다. 그러던 어느 날 까만 아기 토끼가 주저앉아 몹시 슬픈 표정을 짓는다. 하얀 아기 토끼는 까닭을 묻는다.

“왜 그래?”
“응, 생각할 게 좀 있어서”
그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까만 아기 토끼는 즐겁게 놀다가 갑자기 슬픈 표정을 짓고 똑같이 대답한다. 하얀 아기 토끼가 묻는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데?”

까만 아기 토끼는 “그냥, 소원을 빌고 있는 거야.”하고 대답했습니다.
하얀 아기 토끼가 “네 소원이 뭔데?”하고 물었습니다.
까만 아기 토끼는 “너랑 영원히 함께 있는 것, 그게 내 소원이야.”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잠시 책장 넘기기를 멈추고 까만 아기 토끼의 소망이 가득한 눈망울을 보아야 한다. 고개를 약간 움츠린 그의 목덜미도 놓치지 않은 다음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면 정말 가슴이 환해지는 명장면이 잇따라 나온다.

하얀 아기 토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하얀 아기 토끼는 “왜 좀 더 어려운 걸 바라지 않니?”하고 물었습니다.
까만 아기 토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까만 아기 토끼는 “네가 나의 모든 것이 되어 주면 좋겠어!”하고 말했습니다.
하얀 아기 토끼가 “너,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니?”하고 물었습니다.
까만 아기 토끼는 “정말로 그래.”하고 대답했습니다.
하얀 아기 토끼가 “그럼 내가 너의 모든 것이 되어줄게.”하고 말했습니다.
하얀 아기 토끼는 까만 아기 토끼에게 보드랍고 하얀 앞발을 내밀었습니다.
이 사랑스러운 토끼 커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늘 아래 둘도 없는 아름다운 결혼식을 올리고 잘 살았다고 한다. 그림책을 덮는 독자는 결혼식의 하객으로서 가슴 한부분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낀다. 세상의 모든 결혼이 이처럼 순조롭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스 윌리엄스는 펜과 잉크를 사용한 크로쉐칭 기법을 사용해 고전적이고 정밀한 선의 세계를 보여준다. 색의 사용을 최대한 절제하면서 검정과 흰색의 극단적 대조를 부각시켰다. 흑백으로 상징되는 결혼식 풍경 속에서 그의 펜 선은 얼마나 가벼운지. 한 올 한 올 토끼털처럼 가늘어서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마냥 이 책을 칭찬할 수가 없다. 작가에게 사기 혐의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 밖 현실의 결혼은 이처럼 홀가분하지 않으며 둘만의 일도 아니다. 무엇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모든 것이 되어준다’는 일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 가스 윌리엄스의 담담한 필치는 절묘한 몰입을 유도하여 마치 내가 지금 제대로 된 사랑에 빠져있는 것 같은 최면을 걸어온다. 작가도 결혼의 무게를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짐짓 아닌 척 사랑의 약을 팔고 있는 것이거나 깃털처럼 가벼운 이 그림책을 통해 결혼 관계의 무거움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토끼의 결혼식』 은 무엇이 사랑에 빠진 이들 사이의 감정인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이란 역시 ‘생각할 게 좀 있는’ 문제이고 후배가 이 그림책을 읽고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는 다음에 만나보아야 알 것이다. 만일 깊이 생각한 후에 약속의 결심이 서면 그녀가 남자에게 먼저 정식으로 결혼을 청하면서 『토끼의 결혼식』 을 선물하는 것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결혼을 결심했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프로포즈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결혼을 고민하는 사람을 위한 또 다른 그림책

『두 사람』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 (사계절)
연애와 결혼은 상대방의 존재를 독립적으로 존중하는 가운데 이룰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랑을 고민하는 사람뿐 아니라 사랑의 위기를 맞이한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책.

『토끼의 친구는 어디 있지?』 샬롯 졸로토 (문학과지성사)
『토끼의 결혼식』 전편에 해당하는, 단짝을 찾아가는 과정에 대한 그림책. 『토끼의 결혼식』 보다 덜 간지럽고 그 못지않게 사랑스럽다. 프로포즈보다는 연애의 초입에 더 어울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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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김지은 (동화작가)

김지은. 동화작가, 아동문학 평론가. 어린이 철학 교육을 공부했다. 『달려라, 그림책 버스』, 『그림책, 한국의 작가들』을 함께 썼고 EBS '라디오멘토 부모'에서 '꿈꾸는 도서관'을 진행했으며, 서울시립대, 한신대, 서울예대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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