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복판을 맞아 백화점 세일 매장에는 두툼한 모피코트가 걸려 있다. 지나다가 문득 그 코트에 손을 대어보고서 기분이 섬뜩해져서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너무나 부드러워서 마치 살아있는 아기 밍크를 직접 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요즘 많이 입고 다니는 인조 털옷을 만질 때와는 달랐다. 이렇게도 완전히 다를 수가 있을까. ‘얼마 전까지도 살아있었던 생명’이 주는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여우나 족제비로 만든 목도리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지금 할머니가 되신 분들이 젊은 부인이었던 시절의 이야기일 텐데 어린시절에 이웃집에 놀러갔다가 숨바꼭질을 하던 중에 그 댁 자개장 안에서 족제비 한 마리를 만난 적이 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고스란히 장롱 한 구석에 조심스럽게 웅크리고 있던 그 족제비와 캄캄한 곳에서 처음 손등이 닿았을 때, 생각보다 많이 놀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따뜻한 누군가가 여기 있구나 그런 기분이었다. 술래가 나를 찾아낼 때까지 그 족제비를 안고 장롱 안에서 조용히 함께 있었다. 살포시 잠이 들 정도로 꽤 오래 숨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 환하게 장롱 문이 열렸을 때 품에 안은 족제비를 보았고 정말 놀랐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들은 족제비 목도리가 징그럽고 무서워서 우는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그냥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크게 울기만 했다. 울음에 목이 막혀서, 가슴이 콱 눌리는 것 같아서 그 때는 말로 또박또박 내놓을 수 없었지만 절대 ‘족제비가 무서워서 우는 것’은 아니었다는 걸 지금도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순간 놀랍기는 했지만 그건 어떻든 슬픔의 한 종류였다.
우리는 귀여운 것들과 징그러운 것들, 사나운 것들과 순한 것들을 나누는 데 아주 익숙하다. 특히 동물의 경우 그런 구분은 고집스러울 정도로 분명한데 예를 들면 다람쥐는 귀엽지만 쥐는 징그럽고, 늑대는 사납지만 양은 순하다는 식이다. 하지만 좋은 그림책은 이와 같은 일반적 고집을 단번에 허물어 줄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사랑스러운 늑대와 깨물어주고 싶은 예쁜 쥐를 만날 수 있게 해주는가 하면 교활하고 느물거리는 양을 그려낼 수도 있다.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상상하여 현실 이상의 설득력을 갖게 해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그림책이라는 매체와 동화라는 서사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내가 어릴 때 장롱 안에서 경험했던 일은 생명은 절대 징그럽지 않다는 것이었다. 생명이 징그럽다는 생각은 낯선 것을 향해 처음에 가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두려움일 수 있겠지만 어느 정도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고 나면 생명은 곧 우리와 비슷하고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 겨울 흰 눈 속에서도 태양이 뜨거운 여름 숲속에서도 원래 우리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할머니의 할머니의 할머니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책 『아기여우와 털장갑』 은 어느 사랑스런 여우 엄마와 아기 여우의 이야기다. 이 그림책을 읽고 나면 우리는 여우에 대한 이전과는 좀 다른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어쩜 여우같이 순진하기도 하지!’라는 비관습적 언어 사용을 즐기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마법 같아서 온통 장갑 하나면 긴 겨울을 전혀 춥지 않게 날 수 있게 돕는 힘도 갖고 있다.
추운 겨울 북쪽 나라에 흰 눈이 펑펑 내린다. 아기 여우는 처음으로 본 큰 눈이 신기해서 종일 눈밭을 뛰어다닌다. 그리고 동굴로 돌아와 엄마 여우에게 하소연한다.
“엄마, 손이 꽁꽁 얼어버린 것 같아요. 손이 너무 시려요.”
아기 여우는 젖어서 빨개진 작은 두 손을 엄마에게 내민다. 엄마 여우는 “호-호-”하고 입김을 불어주고, 따뜻한 엄마의 손으로 살포시 감싸서 녹여준다.
“이제 금방 따뜻해 질 거야. 차가운 눈을 만져서 그런 거란다. 조금 있으면 따뜻하게 될 거야.”
엄마 여우는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가서 아기 여우의 손에 꼭 맞는 예쁜 털장갑을 한 켤레 사줘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주의사항 : 여기서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가서 닭을 잡아먹고 피를 뚝뚝 흘리며 오는 여우의 모습은 상상하지 말고 그림 속의 아기 여우가 내미는 작고 순한 두 손에 집중할 것)
마침내 은여우 엄마와 아기는 동굴 밖으로 나와 마을로 간다. 그러나 마을의 불빛을 본 순간 엄마 여우는 멈칫거리게 된다. 언젠가 친구와 함께 사람들의 마을로 놀러갔다가 간신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옛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엄마, 무슨 생각하세요? 빨리 가요.”
아기 여우가 재촉했지만 엄마 여우는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아기 여우 혼자만 마을로 내려 보내기로 결심한다. 엄마 여우는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 여우에게 한 손을 내밀어 보라고 하고 그 손을 꼭 쥔다. 잠시 후 그 손은 귀엽고 어린 사람의 손으로 변한다. 아기 여우는 달라진 한 쪽 손을 이상해 하며 엄마에게 어쩐 일이냐고 묻는다.
“그건 사람의 손이란다. 잘 듣거라, 얘야. 이제부터 마을로 내려갈 텐데. 먼저 커다랗고 둥근 모자의 간판이 걸려있는 집을 찾아가거라. 그 집에 가거든, ‘똑똑’하고 문을 두드리고는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거라. 그 때 문틈 사이로 이 쪽 손, 알겠니? 사람의 손을 내밀고 ‘제 손에 꼭 맞는 장갑을 주세요’라고 말하거라. 절대로 여우의 손을 내밀어서는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왜요?”
“사람들은 네가 여우라는 것을 알면 장갑을 팔려고 하지 않을 거란다. 오히려 너를 잡아서 우리에 가두어 버릴 거야. 사람이란 정말로 무섭거든.”
엄마 여우는 가지고 있던 은전 두 닢을 아기 여우의 한 손에 건네주고 아기 여우는 겁없이 마을로 내려간다. 마을에 처음 와 본 아기 여우는 ‘둥근 모자 간판’만을 찾아 거리를 두리번거린다. 엄마여우가 일러 준대로 “똑똑-”하고 가게 문을 두드리지만 새어 나온 불빛이 너무 눈부셔서 당황한 아기 여우는 엄마가 내밀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도 당부한 ‘여우의 손’을 그만 문틈 사이로 내밀고 만다.
모자 가게 할아버지는 이 사태에 대해서 상당히 당황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기 여우가 은전 두 닢을 내밀자 안심하고 장갑을 건네준다. 돈을 떼이지 않았고 물건을 팔았으니 됐다 싶은 이 사람이야말로 돈 앞에 얼마나 교활한지.
아기 여우는 무사히 장갑을 받아 물고 ‘사람들이란 하나도 무섭지 않아.’라고 생각하면서 되돌아 달려간다. 엄마에게 돌아온 아기 여우는 장갑을 낀 두 손으로 펑펑 소리나게 손뼉을 치며 쇼핑 후기를 얘기한다.
“엄마, 사람들은 조금도 무섭지 않아요.”
이 그림책은 일본 작가 ‘니이미 난키치’의 작품이다. 그는 네 살 때 엄마를 잃었고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고 한다. 언제나 엄마를 그리워했던 니이미 난키치는 노을이 물드는 저녁이면 곧잘 나무에 기대어 볏짚을 씹으며 엄마의 모습을 상상했다. 만일 니이미 난키치가 엄마와 함께 오래 살았다면 이런 엄마 여우의 모습을 만들 수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엄마 여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꿈속의 엄마를 보여준다. “이 놈의 자식아. 돈도 없는데 장갑은 무슨 장갑 타령이냐! 그만 좀 뛰어다녀라.”라고 목젖을 보이며 소리치는 엄마는 이 책 속에 한 오라기도 없다.
뭐니 뭐니해도 이 작품의 일등 공신은 그런 난키치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서 그림으로 나타내 준 구로이켄이다. 니이미 난키치의 원작을 그림책으로 그린 화가는 여러 명이었지만 구로이켄의 원화가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는 데는 다들 이견이 없다.
무엇보다
『아기여우와 털장갑』 은 스키장은커녕 눈밭 근처에도 못 가고 회색 빌딩 속 사무실에 붙잡혀 있는 피곤한 직장인이 겨울날에 읽기 좋은 책이다. 책 전체에 아름다운 함박눈이 가득하며 이 책의 눈 그림 역시 아직까지 최고이기 때문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을 책 ※
눈 오는 날: 장서리 내린 날
엠마누엘레 베르토시 글그림/김은정,이순원 공역 | 북극곰 | 원제 : Neveade (2008)
이탈리아의 눈 내리는 산골마을 프리울리가 배경인 아름다운 눈 그림책. 이 책을 번역 출간하기로 결정한 편집팀은 이 마을과 어울리는 우리나라가 강원도 산골마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원도가 고향인 소설가 이순원 선생에게 번역을 부탁한다. 선생은 이 그림책의 원본을 보고 작품을 직접 옮기겠다고 선뜻 수락했을 뿐 아니라 모든 문장을 강원도 사투리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직접 눈 오는 날의 이야기를 강원도 사투리로 읽어 오디오 북을 녹음한다. 무뚝뚝하면서도 정감 가득한 강원도 사투리의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이탈리아의 흰 눈 그림책을 읽는 일. 고향 산골의 눈을 그리워하는 사람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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