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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설레어 하지 않는 남자라면 그만 끊자

당신을 ‘쓰담쓰담’해 줄 사람은 당신뿐이야 고독한 남자와 외로운 여자의 사랑은… 혼자서 산 속으로 들어가는 그 남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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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것 같다가 죽을 것 같은 연애, 알 만하면 다시 모르게 돼버리는 커리어는 그때 내 청춘의 지시어였다. 그 사이에서 찾아든 ‘우연한 설국’ 혹은 ‘설국의 우연’은 그 겨울 내게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고독한 남자와 외로운 여자의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었다. 『설국』은 여운을 주는 책이 아니다. 오로지 현재만 있다. 책이 적어놓은, 책이 흐르는 시간만이 있다.

평범해 보이던 것이 관능적으로 느껴질 때

수년 전 아키타 현으로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병헌 김태희 주연 드라마 ‘아이리스’ 촬영지로 유명해지기 한참 전의 일이다. 아직 반밖에 안 지났는데 겨울이 지겨워지기 시작하는, 1월의 끝자락이었다. 그해 겨울 서울은 유난히 햇살이 가물었다. 사람들은 어깨를 접은 채 우중충한 하늘을 이고 다녔다.

출장 일정은 4박 5일로 일본치고는 짧은 편이 아니었다. 새벽하늘을 두 시간 날아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버스를 타고 세 시간을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해가 찬연했다. 고개가 상모를 돌리는 줄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다가 겨우 눈을 떠 창밖을 봤을 때 나는 아직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하얗기만 했다. 상상 이상의 폭설 앞에서 나는 기시감을 먼저 느꼈다. 시선이 머무는 족족 눈꽃 천지였다. 순백의 찻길을 버스에 탄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느릿느릿 이동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차 안의 우리 일행은 누구도 말 하지 않았다. 탄성도 아꼈다. 입을 헤 벌린 채 부지런히 동공을 움직여 눈에 눈을 박을 뿐이었다.

말로만 듣던 일본 북단의 설국을 나는 『설국』을 읽으며 버스로 헤집고 다녔다. 좋은 책은 몇 번을 읽어도 늘 새로 읽는 기분을 들게 한다. 인생을 정리하러 심산에 찾아든 남자와 인상적이지 않은 생김새와 움직임인데 100만 볼트의 존재감을 선사하는 평범하되 야릇한 여자, 그리고 눈과 산. 한 남자와 어린 게이샤에 관한 이야기 정도로만 기억하고 오래 덮어두었던 이 책은 그제야 매우 관능적으로 읽혔다.

여자를 묘사한 문장이 에로틱하게 읽힐 때가 있다. 직접적인 성애 묘사보다 더 은근한 성감을 준다. 등허리가 간질간질해질 정도로 집요하고 은근하게 조여드는 대목들을 나는 좋아한다. 스멀스멀 등허리에 개미가 걸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라도 참을성을 갖고 모든 글자를 빠트리지 않고 읽게 되는 글, 이야기, 문장. 그것이 바로 『설국』이다.



날씬하면서도 오똑하게 솟은 코는 좀 쓸쓸한 감이 들었지만 싱싱하게 상기된 뺨이 ‘저 여기 있어요’ 라고 속삭이는 것 같이 보였다. 아름다운 자줏빛 환형동물의 테처럼 매끄러운 입술은 조그맣게 모았을 때도 미세하게 꼬불꼬불 움직이는 것 같았고, 노래를 부르며 크게 벌렸다가도 이내 가련하게 오므라들곤 했다. 촉촉이 젖은 눈빛은 앳된 티가 났다. (중략) 산의 정기를 받아 백합이나 양파의 구근을 벗겨 놓은 듯 싱싱한 살결은 목덜미까지 불그스름하게 홍조를 띠어 더없이 맑고 깨끗했다.
이 대목은 그전까지 아무것도 아니던 한 여자가 비로소 한 남자에게 세상 모든 여자가 되려는 순간이다. 책 귀퉁이에 검은 곰팡이가 피고 있을 것만 같은 퀴퀴한 죽음의 냄새와 백합이 아침 이슬을 길어 올리는 듯한 생명력이 교차하는 기기묘묘한 감상이었다.


일이건 연애건 끊고 새로 시작할 용기가 없었다

남자의 쓸쓸함에 감정이입하던 나는 그가 그녀를 마음에 품으려는 대목에서 맹렬한 질투가 일었다. 쿨한 척 가식 떠느라 여자 그 자체의 여자로 살아본 적이 나는 없었던 것 같다. 이런 여자가 되고 싶다고 욕망한 것도 같다. 남자에게 이토록 생생한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이렇게 건강한 찬가를 들을 수 있기가 쉬운 일인가. 그것도 생의 마지막에 서서 아침에 일어나면 죽음부터 생각하는, 겨울나무 같은 남자로부터 말이다.

성숙하고 까칠한 남자, 즉 성적 흥분을 깊이 감추고 있는 지성파에게 어필할 땐 얼굴보다 몸매, 몸매보다 말투와 맵시인 걸까. 은근히 시간을 두고 서서히 끓어오른 성감은 아슬아슬한 눈빛과 떨림으로 몸을 휘감다가, 어느 순간 빈틈없이 깊숙하게 스며든다. 섹스라기보다 서로를 향한 짜릿한 복종에 가깝다.

책을 읽다가 눈을 들면 눈 때문에 눈이 시렸다. 눈을 잠깐 감았다가 남자의 탄식과 여자의 젖은 눈을 생각했다. 출장 동안 눈이 더 내렸다. 버스 이동이 잦은 터라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버스에서 보냈다. 빙판이라 속도는 느렸고, 버스는 눈의 둔덕을 따라 천천히 돌았다. 나는 죽을 생각으로 산으로 들어갔다가 한 여자의 목덜미와 무릎, 뒤꿈치에 가련한 성욕을 느끼는 중년 남자가 되었다가, 어린 나이에 겁도 없이 한 남자의 상실과 절망을 작고 옹골진 어깨로 받아내는 뽀얀 피부의 게이샤가 되기도 했다. 예스러운 대화도 좋았다. 특히 게이샤 고마코의 대사들은 도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애교 있고 당차다. 내가 남자라면 자꾸 찾아오고 싶을 것 같다.



“술은 어두운 데서 들이켜면 맛이 없어요.”
시마무라는 고마코가 들이민 술을 어렵잖게 마셨다. 밖에서 걸어다녀선지 취기가 올랐다. 얼굴이 창백해지는 것 같아 눈을 감고 옆으로 눕자, 고마코가 당황하여 시중을 들어주었다.
“자넨 좋은 여자야.”
“왜요? 어디가 좋아요?”
“하여간에 좋은 여자야.”
“짓궂은 양반이야. 이제 괴로우니까 돌아가주세요. 이젠 입을 옷이 없어요. 당신한테 올 때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고 싶었지만 완전히 바닥이 났어요. 이건 빌려 입은 옷이에요.”
(중략)
단풍의 적갈색으로 날마다 어두워지던 먼산은 첫눈으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눈이 살짝 덮인 삼나무 숲은 삼나무 하나하나가 뚜렷하게 눈에 띄면서 날카롭게 하늘을 가리키며 눈 속에 파묻혀 서 있었다.
『설국』을 아껴 읽으며 밤에는 노천욕을 했다. 어디선가 투툭, 소리와 함께 대나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눈 뭉텅이를 털어냈다. 내 정수리와 목 언저리에도 눈이 쌓였다. 나는 대나무가 아니었으니, 눈의 무게는 견딜 만했다. 내가 견디지 못한 건 청춘이 스러지고 있다는 절망감이었다. 일도 있고 연애도 하고 있었지만 두 가지 모두 내 편은 아닌 것 같았다. 아니 거의 확실했다. 내가 일에 싫증 난 만큼 일 역시 내게 어떤 목표의식을 주지 않았다. 만나는 남자는 나보다 더 재미있는 것을 두 개쯤 순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지표가 없다는 것은 당시의 내겐 엄청난 무력감으로 되돌아왔다. 일이건 연애건 끊고 새로 시작할 용기도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겉으로 보기에 누구라도 ‘이보다 더한 안정이 있어?’라고 할 만한 커리어우먼의 전형이었다는 점이다. 회사와의 관계는 좋았고 때마다 승진하거나 포상도 주어졌다. 한 마디로 나름대로 인정을 받는 일꾼이었다. 소리 높여 주변에게 알리지 않았을 뿐 늘 연애를 하고 있는 나로서는 새삼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겉으로는 분명히 안정적이고 부러워할 만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주 허탈했다. 일은 관성대로 ‘처리’해온 지 오래였고 연애는 그 어떤 자극을 주지 못했다. 함께 밥 먹는 사람은 도처에 널렸는데 나는 연인과 고작 밥 한 번 먹으려고 일주일에 한 번 만났다. 먹고 나서 차 한 잔 빠듯하게 마시고 나면 바쁘다며 일어섰다. 사랑하느냐고 물어보면 너야말로 나를 밀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대체 이런 연애를 하느라고 감정을 소진할 이유가 있나 싶을 만큼 나는 외로웠다.


혼자서 산 속으로 들어가는 그 남자처럼

출국 전날 짐을 꾸리며 나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안달하지 말고 마음의 거리를 두자.’ 관성대로 일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건 일 욕심이 여전하다는 것이고, 연애를 하면서도 외로운 건 나 역시 상대를 외롭게 한다는 것이니까 거리를 두고 스스로 원기를 충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살 것 같다가 죽을 것 같은 연애, 알 만하면 다시 모르게 돼버리는 커리어는 그때 내 청춘의 지시어였다. 그 사이에서 찾아든 ‘우연한 설국’ 혹은 ‘설국의 우연’은 그 겨울 내게 중요한 모티브가 됐다. 고독한 남자와 외로운 여자의 사랑은 시작도 끝도 없었다. 『설국』은 여운을 주는 책이 아니다. 오로지 현재만 있다. 책이 적어놓은, 책이 흐르는 시간만이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떻게 될까’ 같은 여운이나 상상 자체가 불가능하다. 죽을까 살까 같은 고민, 이 남자 따라 도쿄에 갈까 말까 같은 망설임 따위 없이 눈 맞추고 있는 지금에만 서로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

엄살은 위로받을 수 없다. 나 아니면 보듬어줄 누구도 없다. 그러니 춥고 움츠러드는 길이지만 내 마음을 지표 삼아 걸어가자. 일은 돌파구를 찾아보고, 나를 설레어 하지 않는 남자라면 그만 끊어내자.

겨울이 깊을수록 봄은 찬란하렷다. 시간은 순환하고, 단단하게 얼어붙은 눈은 시나브로 녹아 사슴의 목을 축여줄 것이다. 움직이지 않을 때 사실은 가장 큰 움직임이 태동한다. 그해 나는 설국에서 봄의 향기를 얻었다.

내 안의 깊은 고독을 이해해줄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그러니 욕구불만과 불협화음으로 가슴이 터져나갈 듯 아플 때는 혼자서 깊은 산 속으로 떠나는 주인공 남자처럼 철저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내 속의 아우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여기서 목적은 휴식이 아니다. 도약이다. 나를 이해하고 내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한 도약. 계절은 반드시 순환하고 나를 둘러싼 불투명하고 불안한 막은 곧 걷힐 것이다. 내가 나를 믿어야 일이건 사랑이건 내 편이 돼준다.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은 몇 가지 tip_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호수’에는 이런 구절이 나와. “그 추운 니카타 출신이라고? 설국에서 태어나서 몸이 예쁘군.” 추운 지방에서 태어난 여자의 몸은 찰기가 있다지. 이것도 볼륨이 받쳐줘야 가능하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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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인생 충전기 안은영 저 | 해냄
베스트셀러 『여자생활백서』를 통해 40만 독자들에게 일과 사랑에 관한 멘토로 활동해온 안은영 작가가 신작 『여자 인생 충전기』를 내놓는다. 18년이라는 오랜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작가 스스로도 충전의 시간을 보내며 써내려간 이 책 속에는 "뭘 하기보다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독자들로 하여금 성장과 치유의 시간을 통해 '나 자신 찾기'를 해볼 것을 제안한다.

 





안은영 작가의 여자 이야기

[ 여자 생활 백서 ]
[ 사랑하기 전에 알아야 할… ]
[ 여자공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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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안은영

여성들의 사랑과 연애, 직장생활과 인간관계에 대한 상큼발랄한 조언서 『여자생활백서』로 40만 독자를 사로잡으며 2030 여성들의 멘토로 자리잡았다. 남자와 연애에 관한 지침서 『여자생활백서2』, 연애와 결혼의 갈림길에서 좌충우돌하는 이 시대 여성들에게 보내는 진심어린 충고와 따듯한 위로를 담은『여자공감』이 있으며, 소설로는 『이지연과 이지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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