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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칼럼] 해피엔딩이 좋은데
<월간 채널예스> 2020년 9월호
소설 독자 장강명, 연극 관객 장강명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영화 관객 장강명은 평소 존재감도 미미한 데다(영화를 잘 안 본다), 불편한 이야기라고는 조금도 참아내질 못한다. 사회고발도 싫고 신파도 싫다. 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영화도 코미디와 SF를 제외하고는 거의 안 봤다. (2020.09.04)
일러스트 _ 이내
다른 소설가들은 자기가 쓴 소설을 자주 읽는지 모르겠다. 나는 안 그런다. 내가 쓴 논픽션과 에세이는 가끔 PDF 파일로 보면서 바보처럼 히죽이곤 하는데, 소설은 펼치지 않는다. 읽다 보면 민망한 부분도 많고, 고치고 싶은 마음도 자주 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읽어서 즐거운 소설이 별로 없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소설을 쓰고 싶다, 독자를 고민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종종 얘기하곤 한다. 백 퍼센트 진심이다. 문제는 그렇게 쓴 글을 읽다 보면 나마저도 고민이 되고 불편해진다는 것. 지난해 『산 자들』을 쓰고서는 초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길게 탄식을 했더랬다. 얘기가 하도 컴컴해서.
내 소설을 각색한 연극 《댓글부대》와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보면서도 확실히 느꼈다. ‘와, 정말 좋은 연극이다’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너무 힘들었다. 《댓글부대》 연극은 두 번째 관람할 때에도 그랬고, 연극 《그믐…》은 두 번 볼 엄두를 못 냈다. 극단 ‘동’과 남산예술센터에 이 자리를 빌어 죄송하다고, 사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소설 독자 장강명, 연극 관객 장강명은 그래도 나은 편이다. 영화 관객 장강명은 평소 존재감도 미미한 데다(영화를 잘 안 본다), 불편한 이야기라고는 조금도 참아내질 못한다. 사회고발도 싫고 신파도 싫다. 천만 관객이 들었다는 영화도 코미디와 SF를 제외하고는 거의 안 봤다.
아마 내 안에 인격이 여럿 있고, 책을 읽고 쓰는 일과 관련해서도 자아가 서너 개쯤 있는 모양이다. 진지한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 소설가 장강명은 찜찜하거나 도발적인 주제, 소재에 끌린다. 거기에 정면으로 달려들어 부딪치고 싶어 한다. 그런 작품에 열광하는 심각한 독서가 장강명도 내 안에 분명히 있다. ‘인생의 책’을 꼽아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 늘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었던 소설들을 고르는 걸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 제임스 엘로이의 『블랙 달리아』,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그런데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어쨌든 끝에 가서 주인공과 친구들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해피엔딩 애호가 장강명도 있다. 인생 책을 이야기할 때에도 소설을 쓸 때에도 늘 후순위로 밀려나는 착하고 불쌍한 녀석이다. 철들기 전에는 분명 이 인격이 꽤 컸다. 아주 어릴 때에는 슬픈 동화에 눈물을 펑펑 흘렸고, 청소년기까지도 완벽한 해피엔딩을 선호했다.
여태껏 해피엔딩 애호가 장강명은 소설 집필 작업에서 거의 매번 자기 욕심을 억눌러야 했다. 앞으로도 그럴까? 소설가 장강명의 글에서 해피엔딩은 계속해서 가물에 콩 나듯이, 드물게 있게 될까? 소설가 장강명과 해피엔딩 애호가 장강명 사이에 타협의 여지는 없을까? 바꿔 말해,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자기 작품의 톤과 결말에 대한 재량권이 얼마나 있는가?
김영하 작가는 『살인자의 기억법』 후기에서 이렇게 썼다. ‘소설가라는 존재는 의외로 자율성이 적다. 첫 문장을 쓰면 그 문장에 지배되고, 한 인물이 등장하면 그 인물을 따라야 한다. 소설의 끝에 도달하면 작가의 자율성은 0에 수렴한다.’
나는 이 의견에 때로 ‘맞아, 맞아!’ 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가끔은 ‘아닌 거 같은데’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다른 소설가의 작품에 대해서는 ‘꼭 그렇게 끝나야 할 필요 있나’ 하는 생각을 간혹 한다. 대표적인 사례: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볼드모트를 물리쳤으면 됐지, 그리핀도르가 꼭 우승까지 했어야 했나……? (그래야 했나요, 롤링 여사님?)
그러나 내가 쓴 소설들에 대해 생각할 때는 내가 정한 바로 그 결말 외의 다른 엔딩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필연적인 결말로 느껴진다(아아, 이 내로남불!). 그 작품의 결말부가 뛰어나다, 잘 썼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태껏 소설 원고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을 때 주인공의 운명을 놓고 고민한 적은 없었다. 수동적인 주인공을 싫어하는 데도 그렇다.
일러스트 _ 이내
비유하자면 내게는 소설의 절정부를 만들어내는 일이 바둑에서 승부수를 던지는 일처럼 여겨진다. 그 수를 두고 나면 바둑의 규칙에 따라, 이후로는 외길 수순이 펼쳐진다. 주인공이 결단을 내리면, 세계를 움직이는 힘에 따라 그의 운명도 결정된다. 아마도 이게 나의 세계관이고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인 모양이다.
그 세계는 회색으로, 선과 악이 섞여 혼란스럽다. 한 인간의 내부도 그렇고 그를 둘러싼 외부 환경도 그렇다. 그리고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한 사람의 행복이라든가 정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 고로 ‘이후로는 착한 사람들이 아무 일 없이 행복하게 살다가 늙어서 편안히 죽었답니다’라는 결말도 없다. 그 우주에는 그런 일을 보장해줄 하느님이 없다. 역사의 심판도 없다. 그 세계는 기댈 곳이 없다.
그리고 나는 소설만큼은 진지하게, 내가 믿는 세계관에 입각해서 쓰고 싶다. 쓰다 보면 진지해진다.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는 일보다 훨씬 힘들고, 강연이나 방송 출연보다 투입 시간 대비 이익이 미미하기 때문에, 작업을 하는 내내 ‘이걸 왜 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유가, 의미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소설을 쓰느니 낮잠을 자는 게 낫다.
다만 이렇게 세상을 보는 방식도, 실제 세상과는 꽤 다를 것이다. 동화만큼이나. 내가 우리 우주에 대해 이해하는 한 가지는, 인간이 그곳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매우 오랜 시간 뒤에 우리의 바람에 응답하는 섭리나 초자연적인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존재를 믿는 태도를 유아적이라고 보는 내 태도가 유아적일 수도 있다. 아니면 더욱 비참하게도, 우리에게 자유의지조차 없으며, 운명에 맞선 결단이라는 것 자체가 환상일 수도 있다.
얼마 전에는 인터뷰를 하다가 ‘주인공들이 도망치는 결말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았다. 그들은 소설이 시작할 때 있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가족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는 상업 영화의 캐릭터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나도, 주인공들도,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저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 뿐이다. 그걸 도망이라 부르려니 조금 억울하고 구도(求道)라 표현하려니 너무 쑥스러운데, 하여튼 우리는 길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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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출신 소설가. 『한국이 싫어서』,『산 자들』, 『책 한번 써봅시다』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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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신작 『산 자들』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산 자들』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여러 문예지에서 발표된 10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이다. 2010년대 한국 사회의 노동과 경제 문제를 드러내는 소설들은 각각 ‘자르기’ ‘싸우기’ ‘버티기’ 총 3부로 구분되어 리얼하면서도 재치 있게 한낮의 노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