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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우습게 봐서요

MBC 수목 드라마 <봄밤> 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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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대하는 선배의 생각과 태도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무시할 의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사람을 죽여놓고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는 거랑은 다를 게 없어요. (2019. 0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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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봄밤>의 한 장면

 

 

드라마를 보다가 뼈 때리는 대사를 만나면, 황급히 휴대폰을 찾곤 한다. ‘이 대사는 옮겨 적어야 해, 아니 녹음이 더 빠르겠군’ 생각하면서. 2019년 6월 19일 MBC 수목 드라마 <봄밤> 17회를 MBC드라마넷 재방송으로 보던 그날도 나는 서둘러 휴대폰을 찾았다.

 

MBC 드라마 <봄밤>은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호흡을 맞췄던 안판석 감독, 김은 작가가 다시 한 번 뭉친 작품이다. <봄밤> 첫 방송을 우연히 본 날, 나는 몹시 깜짝 놀랐다. 아무리 전작이 성공했지만 이렇게 같은 배우들을 총출동 시킬 수가 있나? MBC 드라마국은 자존심도 없나? 어떻게 JTBC 드라마의 연작 개념인 작품을 방영할 수 있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끝난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봄밤> 관련 기사를 챙겨 읽지 않은 터라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재방송을 챙겨 보기 시작했는데 3,4회를 연이어 시청하다 의문이 풀렸다. 이 시나리오를 포기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봄밤>을 보지 않는 독자들을 위해 짧게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극중 이정인(한지민)은 지역 도서관의 사서, 유지호(정해인)는 유치원생 아들이 있는 약사다. 이정인은 오래된 연인인 은행원 권기석(김준한)이 있는 상황에서 유지호에게 반하고, 유지호 역시 이정인에게 호감을 갖는다. 두 주인공은 매우 신중한 성격이라 섣불리 연애를 시작하지 않는다. 유지호는 대학 시절 만났던 여자친구가 아이를 낳고 집을 나가, 부모님이 아들을 키워주는 싱글 대디다.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들의 공통점을 보면, 모두 조연들의 열연이 빛나는 작품이다. 등장인물 모두에게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주는 드라마를 볼 때, 상투적이지 않은 대사가 나올 때 나는 드라마작가의 이름을 확인한다. <봄밤> 17회를 본 날, 나는 드라마작가 김은이 무척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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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봄밤>의 한 장면


권기석(김준한): 내가 눈치를 못 까고 있었던 게 아니야.
유지호(정해인): 전혀 모르게 할 수도 있었어요.

 

권기석(김준한): 근데, 왜 흘렸냐?
유지호(정해인): 날 우습게 봐서요. 날 대하는 선배의 생각과 태도가 잘못 됐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무시할 의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사람을 죽여놓고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는 거랑은 다를 게 없어요.

 

권기석(김준한): 야… 허…… 그거 아니지.
유지호(정해인): 그런 사람을 더 이상 이정인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고, 그래서 일부러 티 냈어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권기석은 유지호의 대학 선배. 권기석은 자신의 연인이 좋아하는 사람이 ‘싱글 대디’, 그것도 자신의 후배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 이정인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유지호 같은 사람에게 애인을 뺏겼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권기석은 현재 ‘찌질한 전 남친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탁월한 연기력으로 해내고 있다.

 

17회의 한 대사. “날 우습게 봐서요.” 나는 이 한 마디에 꽂혀 드라마 <봄밤>을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 “왜 이 명작을 안 보냐?”고 매일 귀찮게 굴고 있다. <봄밤>의 OST ‘레이첼 야마가타’의 노래들도 압권, 주민경, 길해연, 이무생, 서정연, 오만석, 김정영, 이창훈, 김창완 등의 연기도 무척 좋지만 이 드라마의 백미는 유지호(정해인)라는 인물의 서사다. 예기치 않게 어린 아빠가 된 남자, 아이에게 상처를 줄까 봐 쉽게 연애하지 못하는 남자, 자신을 대신해 아이를 키워주는 부모에 대한 미안함, 하지만 너무나 사랑하는 ‘이정인’이라는 사람을 만나고 욕심을 갖게 된 남자 ‘유지호’. 그는 착해서, 책임감이 강해서 모든 걸 견뎌왔던 게 아니었다.

 

“날 대하는 선배의 생각과 태도가 잘못됐다는 걸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무시할 의도는 아니라고 했지만, 그건 사람을 죽여놓고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는 거랑은 다를 게 없어요.”

 

세상에 수많은 일을 겪고 사람을 만나며, 가장 울컥할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보면 무시당할 때다. “넌 내가 이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이라는 속내를 넌지시 비추는 사람을 만날 때, 나는 그동안 어떻게 했나? 유지호처럼 말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 대사를 듣고 쾌감을 느낀 게 아닐까. 참으로 뻔뻔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이 영상의 클립을 만들어 전체 메일로 전송하고 싶다. “그건 사람을 죽여놓고 죽일 의도는 없었다고 말하는 거랑은 다를 게 없다”는 메시지와 함께.

 

드라마 <봄밤>의 대본집이 곧 아르테 출판사에서 나온다. 아르테 출판사에 <봄밤> 팬이 계신지 궁금하다. 드라마작가 김은의 인터뷰를 열심히 찾았는데 공개 석상에 얼굴을 비추지 않는 분인 것 같다. 작가님을 만나 묻고 싶다. “이 대사, 어떤 마음으로 쓰셨나요?”

 

<봄밤>은 인물의 대사를 들어야 하는 작품이다.

 

 

 


 

봄밤김 은 저 | artePOP(아르테팝)
사랑에 빠지기 어려운 현실의 두 사람의 가슴 시리고도 설렘 가득한 연애 이야기를 담고 있는 로맨스로, 평범한 듯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멜로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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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엄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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