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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정확한 슬픔의 발라더
<월간 채널예스> 2019년 1월호
벤의 목소리 그 안에서 펑펑 울어도 좋다. 결코 당신이 약해서 통곡하는 게 아니다. 벤의 목소리가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것뿐이다. (2019. 01. 03)
사진 제공_ MAJOR9
벤은 노래를 잘 부른다. 정말 잘 부른다. 거의 모든 가사가 귀에 들어온다. 친숙한 목소리로 노래를 시작하지만 고음까지 쉽게 올라간다. 호흡이 가쁘다는 인상 한 번 없이 한 곡을 완창하며, 라이브와 녹음의 차이가 거의 없다. 목소리는 애절하지만 깨끗하다. 감정에 호소하지만 흐느끼지 않는다. 뭘 더 어떻게 표현해야 하나? 그의 가창력을 표현할 정확한 말들을 찾기 위해 잠시 그의 활동 이력을 거슬러 올라가도 좋을 것이다.
벤의 시작은 요새 가수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역시나 걸그룹이었는데, ‘베베미뇽’이라는 기이한 이름만 남기고 2011년 해체되며 사라졌다. 벤은 거기서 당연히 메인 보컬이었지만, 누가 신경이나 썼겠는가. 걸그룹의 메인 보컬은 걸그룹의 숫자만큼 많은데. 그 후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벤은, 드라마 <또 오해영>의 OST, <꿈처럼>을 불렀다. 그전까지 ‘퍼펙트 싱어’ 같은 다소 화려하고 복잡한 방식의 노래 자랑 예능의 출연자로 가끔 얼굴을 비추던 가수 벤은 이 OST로 비로소 사람들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된다. 앞서 벤의 장점의 첫머리에 둔 가사 전달력이 히트 드라마의 주제곡과 만나 빛을 발했다. 예컨대 “눈을 뜨면 희미해져 버릴 꿈처럼 놔 줘/ 그게 아니면 곁에 있어 줘 지금.” 같은 가사가 정확히 들리면 오해영을 연기한 서현진의 얼굴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드라마까지 인기를 끌었으니, 벤의 목소리로 드라마를 떠올리는 사람이 매우 많았음은 물론이다.
2018년 여름 이후 음원 시장에 소리 없는 강자는 벤이었다. 그녀의 첫 번째 정규 앨범 ‘RECIPE’의 타이틀곡 <열애 중>으로 자신이 OST 전용 발라드 가수가 아님을, 그 이상의 크나큰 그릇임을 확실히 증명한다. 이은미의 스테디 히트곡 <애인 있어요>를 떠올리게 만드는 반어적 제목은, 슬픔에 가득한 첫 소절에 이르러 이 열애가 그 열애가 아님을 직감하게 한다. 애인이 없는데 있다고 구슬피 우기는 이은미처럼, 벤도 연애가 끝났는데 연애도 아닌 심지어 ‘열애’ 중이라고 처연히 말한다. 훌륭한 멜로디를 갖추었다는 전제 하에, 발라드에 슬픔을 부여하는 것은 노랫말일 것이다. 가사에 담긴 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단단한 동시에 담담히 전달하는 것이 가창력의 척도임은 물론이다. 벤은 여기에 굉장한 장점을 보인다. 여기에 벤의 목소리는 한국의 발라드의 전형성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데, 어디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전형성이라서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자체가 개성이 되어버린다.
<열애 중>이 차트에서 사라지기도 전, 벤은 신곡 <180도>를 녹음해 돌아왔다. 이제는 역주행이라 할 것 없이 발표하자마자 순위권에 진입했다. 비로소 대중은 벤이 발라드를 즐길 준비가 된 듯하다. 인상적인 것은 역시 결점을 찾을 수 없는 가사 전달력. “넌 뭐가 미안해 왜 맨날 미안해/ 헤어지는 날조차 너는 이유를 몰라.”라는 가사로부터 리스너의 귀는 헤어지는 이유를 마저 듣기 위해 쫑긋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헤어짐의 이유는 별것이 없다. 제목처럼 180도 변해버린 애인의 태도 때문이다. “이젠 180도 달라진 너의 표정 그 말투”에서 이별은 시작됐다. 보통 이런 성격의 가사는 이른바 ‘걸 크러시’한 댄스곡으로 만들어져 당당히 남자를 차버리는 노래가 되기 쉬운데, 벤은 이마저도 슬프다. 한국식 R&B라 지칭되는 많은 발라드에서 가수는 흐느끼는 창법으로 슬픔을 유도하지만, 가사가 들리지 않으면 많은 경우 실패다. 벤은 가사는 정확하고 음성은 슬프다. 음역은 넓고 표현은 풍부하다. 그저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당분간 이별할 일 없는 솔로든, 이별해서는 큰일 날 기혼자든, 그 누구든 벤이 전달하는 정확한 슬픔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런 가수를 참으로 오래 기다렸다. 벤으로 인해서 더 이상의 기다림은 필요 없어졌다.
가요는 슬픈 노래를 계속해서 대중에게 공급할 의무가 있다. 오늘밤도 누군가는 실연의 아픔을 겪었을 것이고, 그들에게는 함께 울어줄 음악이 필요할 테니까. 이 중요한 역할을 이제 벤이 할 것이다. 벤이 있어 다행이다. 벤이 있어 우리는 마음껏 정확하게 슬퍼할 수 있다. 지금 사랑하는 이와 헤어진 사람이라면, 혹은 헤어짐을 미리 대비하는 사람이라면 위에 언급한 곡 외에도 벤이 부른 다음과 같은 노래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지금은 가지 마>, <소개받기로 했어>, <안 괜찮아> 등등. 이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벤의 목소리 그 안에서 펑펑 울어도 좋다. 결코 당신이 약해서 통곡하는 게 아니다. 벤의 목소리가 당신을 그렇게 만든 것뿐이다. 벤은 슬픔을 정확하게 노래하는 가수니까.
민음사에서 문학편집자로 일하며 동시에 시와 산문을 쓰는 사람. 1981년 목포에서 태어났다. 2006년 『시인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했다.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산문집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 『잘 왔어 우리 딸』 등을 펴냈다. 김수영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매일같이 여러 책을 만나고 붙들고 꿰어서 내보내는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