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결산의 현장은 치열하고도 즐겁다. 숨 가쁘게 지나온 지난 1년을 복기하며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을 돌려 듣고, 설레는 송년회 선물처럼 리스트를 채워나간다. 특히 긴 호흡으로 아티스트 정체성을 각인하는 앨범은 그 목록이 더욱 풍성하게 느껴진다. 거두절미하고, 올 한 해를 빛낸 10장의 국내 앨범을 선정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방탄소년단 - < Love Yourself 轉 'Tear' >
한국 뮤지션으로서는 두 번째로 세계 진출에 성공했지만 자만하지도, 균형감각을 잃지도 않았다. 해외 음악의 트렌드를 수용하면서 우리 것에 대한 애정도 놓치지 않고 있으며, 글로벌 인기의 진원지인 해외 아미 팬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표하면서 한국 젊은 세대의 고민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라도 빈틈을 남기고 싶지 않은 멤버들의 겸손한 욕심과 겸손하지 않은 자신감이 앨범에 스며있다. 말하고 싶은 것을 11곡으로 축약해 통일성을 구현한 것 역시 이들이 준비된 아티스트라는 점을 웅변한다. 해외 차트를 노리고 급조한 음반이 아니고 준비되어 있었기에 앨범의 빠른 발매와 농밀한 농도를 추출할 수 있었다. 2018년은 방탄소년단에게 돌아간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소승근)
수민 - < Your Home >
수민은 올 한 해 여성 싱어송라이터 중 가장 과감하고 너른 역량을 펼쳐 보였다. 얼터너티브 알앤비의 자유로움에 케이팝의 장르 교배와 구조 변화를 받아들인 < Your Home >은 좋은 일렉트로닉 앨범이기도, 좋은 알앤비 앨범이기도, 좋은 케이팝 앨범이기도 하다. '설탕분수'의 무지갯빛 찬란함과 '너네 집'의 명료한 선율, '통닭'의 통통 튀는 메시지 등 형형색색 음악 팔레트는 조금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방탄소년단, 레드 벨벳, 진보를 거쳐 보아까지 닿은 메이저 시장과의 접점, 술탄 오브 더 디스코 같은 밴드와도 이질 없이 융합되는 범용성 역시 긍정적이다. 레트로부터 혁신까지 어느 틀에 맞춰도 본연의 색을 발하는 재주는 꾸준한 히트를 기대케 한다. 탄탄한 짜릿함으로 가득한 '너네 집'에서 자꾸만 살고 싶다. (김도헌)
뱃사공 - < 탕아 >
탕아에겐 거짓이 없다. 쌓아올린 돈다발이 래퍼의 멋이 되는 시대에 오히려 돈이 없음을 밝히는 그는 힙합 등용문 프로그램에 가짜 표정을 지으며 출연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 보인다. 또한 쉽게 인기를 가져다줄 수 있는 트렌드에 무관심하여 미국산 'aye'와 'skrt'을 연발하거나 실속 없이 'swervin' 또는 'flexin'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이 프로그램 출연을 준비할 때 조용히 출항을 알리며 좋은 작품들을 선보인 뱃사공은 다분히 한국적인 랩과 뽕끼 그윽한 밴드 사운드로 무장한 두 번째 음반으로 근래 느끼지 못했던 색다른 쾌감을 선사한다.
훌륭한 래핑과 캐치한 훅, 빈티지한 멋을 살린 프로듀싱 사이에서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건 낭만에 대한 뱃사공의 진솔한 태도다. '탕아'와 '부재중', '로데오' 등 대다수의 트랙에서 절대 꺾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낭만이 '외롭지만 괜찮아'와 '진심'에선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비추어지는 순간은 음반을 더욱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한다. 이 점이 유독 < 탕아 >에 손이 많이 갔던 이유. 올 한해 번쩍번쩍한 외제차 같은 힙합 음반은 많았지만 '우리집'처럼 기댈 수 있었던 음반은 < 탕아 >가 유일했다. (이택용)
세이수미 - < Where We Were Together >
부산 출신의 밴드가 서프 록과 개러지, 포스트 록 흐름을 마구 뒤섞은 영미 인디 신의 음악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데뷔 앨범 < We've Sobered Up >의 거친 질감은 소포모어에 들어 부드럽게 울리는 리버브 효과에 자취를 감췄지만, 대신 하드코어 언저리에 다가간 'B Lover'로 세이수미만의 펑크를 선보이며 앨범의 전반부에서 형성한 그리움의 감정을 과감히 해체한다.
1집의 'Long Night & Crying'에서 분노의 질주처럼 들리던 노이즈 사운드는 'I just wanna dance'의 밝은 기조로 탈바꿈했다. 주저앉아 우는 대신 일어나 춤추기를 택하면서 2집은 긍정의 미학을 전한다. < Where We Were Together >의 그리움을 이겨낼 수 있는 성질의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에 향수에 사무치다가도 모종의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음악 내적, 외적으로 모두 성장한 세이수미에게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밴드 스스로 증명했다. (정연경)
나얼 - < Sound Doctrine >
'바람기억'은 나얼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고 그가 가진 재능을 발휘해 더 큰 성과를 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대중을 위한 노래는 '기억의 빈자리' 한 곡에 몰아둔 채 이번에도 만족스러운 소울 앨범을 만드는데 충실했다. 완성도를 자신하며 타이틀도 소리의 교리(Sound Doctrine)라 지었다. 직접 매만진 곡들은 파고들수록 관심을 넘어 탐미와 정석을 추구했음이 느껴진다. 5분간 반주로 밀어붙이는 인트로 'Soul walk'를 비롯해 음반 곳곳에는 1970년대 소울의 질감이 세밀하게 담겨있다.
나얼의 최대 강점인 화려한 가창을 즐길 수 있을뿐더러 선명한 선율 덕에 장르성이 짙은 노래도 어렵지 않게 흡수된다. 그 매력은 'Baby funk'와 'Stand up' 두 곡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이후 부드러운 필라델피아 소울과 가스펠 같은 흑인음악을 이루는 갈래들이 목소리를 타고 재현된다. 나얼하면 여전히 보컬 실력이 먼저 거론되지만 그는 브라운 아이즈 시절부터 오랜 기간 블랙뮤직에 꾸준한 애정을 보여주었다. 차트에서 환영받는 가수가 한편으로 자신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그런 집요한 노력과 책임감이 이 앨범을 있게 했다. (정유나)
저스디스 & 팔로알토 - < 4 The Youth >
상다리가 휘어져라 차렸는데, 다 맛있다. 붐뱁, 트랩, 래칫, 퓨처 베이스 등 힙합의 여러 문법이 트랙 리스트를 풍성하게 꾸며준다. 한 줄로 요약하자면 'My life is so bright'의 올드스쿨 향수와 'Avy'의 트렌디함 사이를 꽉꽉 채웠달까. 두 래퍼의 호흡도 훌륭하다. 패기 넘치는 저스디스와 중후한 팔로알토가 청춘이라는 교집합 위에서 하나가 된다.한 손에 세기도 힘든 쟁쟁한 참여진 또한 이 앨범의 묵직한 무게감을 방증한다. 올해 리스너들의 최대 기대작으로서, 이 정도면 모두의 기대는 넘치도록 충족시켜준 셈이다.
그러나 < 4 The Youth >가 이 리스트에 오른 가장 큰 이유는, 이 앨범이 오늘날의 청춘에게 힙합이 줄 수 있는 가장 가깝고 또 적확한 위안이라는 데 있다. 브루스 웨인을 꿈꿨지만 어느새 예정된 사회생활을 달력에 적게 된 이들. 동메달을 아쉬워하는 나라에서 자란 이들. 그들을 위한 두 래퍼의 해답은, 사회를 향한 비판과 삶에 대한 애정 사이에 절묘하게 걸쳐 있다. 비관과 낙관의 틈을 정확히 파고드는 젊음의 소리! 올해 말도 탈도 많았던 한국 힙합이지만, 이런 앨범이 나오는 한 기대를 접을 수 없다. (조해람)
히피는 집시였다 - < 언어 >
지난 두 편의 비정규, 정규 음반과 거의 동일하다. 듀오 히피는 집시였다는 두 번째 정규 앨범 < 언어 >에서도 서행으로 일관한다. 빠르게 변속하는 구간은 단 한 차례도 나타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습기를 잔뜩 머금은 상태도 똑같다. 이 두 요소의 조합으로 앨범은 음울함과 황량함을 한껏 분출한다.
전반을 지배하는 음침한 기운은 사랑을 갈구하거나 화자의 불안정한 심리, 또는 눈에 보이는 주변 풍경을 정적으로 묘사한 가사를 타고 멋스럽게 다가온다. 프로듀서 제이플로우(Jflow)가 제작한 고즈넉한 비트는 안정감을 보조하며, 가성이 특히 매력적인 셉(Sep)의 보컬은 몽환적인 느낌을 배가한다. 듀오는 얼터너티브 R&B와 드림 팝을 줄타기하는 야릇한 작품을 또다시 내왔다. (한동윤)
아시안 체어샷 - < IGNITE >
올 한해를 돌아봤을 때 가장 눈에 띄는 하이브리드 그룹이었다. 한국의 악기, 장단을 비롯하여 굿판, 시위 현장에서 영감받은 것들을 에너지 넘치고 강렬하게, 또 섬세하며 감성적으로 담아냈다. 하지만 이들의 음악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건 이들이 날 것의 감정을 꾸밈없이, 주도적으로 품어냈기 때문이다. 타이틀 '빙글뱅글'의 재고 따짐 없이 달려나가는 박진감, '꿈'의 허무맹랑한 선율과 사이키델릭한 분위기 속에서 타 그룹의 잔향을 느낄 수는 없다. 오직 아시안 체어샷만의 음악이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잠정적 해체는 아쉽지만, 마지막까지 훌륭한 음반을 선사했다. 이 안에 담긴 혁명가 스타일의 '친구여'는 남, 여 성악으로 예상치 못한 변주와 뜨거운 울림을 전했으며, 첫 곡 '뛰놀자'는 기타를 태평소 질감으로 표현하고 '무감각'은 더할 나위 없이 새로운 한국형 멜랑꼴리 이별가이자 사랑가였다. 다양한 장르의 배합과 라디오 친화적인 짧은 러닝타임의 수록곡 하나 없이 자신들의 입맛을 제대로 보여줬던 음반. 앨범 명 그대로 불을 붙일 열기가 숨 쉰다. (박수진)
김심야와 손대현 - < Moonshine >
이것은 패배의 기록이다. 야망으로 가득했던 젊은 래퍼가 (< KYOMI >) 현실의 무관심에 좌절한 후, < Language >로 격렬한 분노를 쏟아내 보았지만 끝내 공허한 황무지에서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작품이다. 저항과 언더그라운드를 외쳤던 한국 힙합은 거대한 연예 기획사가 됐고, 유명하지 않은 래퍼, 제도권에 목매지 않는 래퍼는 '팔리지 않을 앨범'을 만든다.
XXX의 김심야와 TDE 레코즈의 손대현(D.Sanders)는 자본과 미디어에 종속된 한국 힙합 씬에서 철저히 이방인이다. '안 먹히는 음악을 왜 할까나? / 그것밖에 못하니까'라는 자조와 푸념은 '지금 은퇴해도 내 위치는 Locked and good'처럼 굳은 자신감과 실력이 가능하기에 정당성을 확보한다. 고요함 속 이따금의 분노를 내비치는 손대현의 비트와 누구도 말하지 않는 메시지를 거칠고 유려한 플로우로 선보이는 김심야의 랩은 영화 <매트릭스> 속 한 장면처럼 진실의 빨간약과 순응의 파란 약을 교차 제시한다. < Moonshine >은 오래도록 화자 될 패배의 기록이다. (김도헌)
ADOY - < Love >
이스턴 사이드 킥과 스몰오 출신의 로커 오주환이 좇은 새 시대의 밴드 사운드는 신시사이저 맨 지(ZEE)를 만나 형체를 잡았다. 어디서 들어본 듯, 설령 지구상 최초는 아니더라도 매우 독자적으로 구축한 아도이의 '신스팝' 프레임은 꽤 높은 감화력을 자랑한다. 아마도 그 신스팝은 베이스(정다영)과 드럼(박근창) 그리고 오주환의 기타에 의한 '전통의' 록 질감과 융(融)한 덕분에 오히려 더 든든한 '힙' 프로듀스가 가능했을 것이다.
수록 곡 여섯의 EP지만 'Wonder' 'Blanc' 'Bike' 'It doesn't even matter' 등 제각각 다른 것은 록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라고 풀 수밖에 없지만 모두 흡입력을 발하는 것은 '흘려듣든 집중해서 듣든 음악은 들려야 한다!'는 팀 비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고막OST'가 먹히는 시절을 응시한 멤버들의 '시대와 떨어지지 않으려는' 대중적 시선은 부진한 가운데서도 주목할 인디의 출현을 만들어냈다. 때를 알아야 때가 되는 결과물을 얻는다. (임진모)
우리는 어떤 곡으로 2018년을 기억하게 될까. 올해도 셀 수 없이 많은 싱글이 발표됐고 그 중 히트한 곡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곳곳에서 누군가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울고 웃고, 분노하면서도 공감하며 즐거움을 선사한 2018년의 싱글 10장을 선정한다. 글의 순서는 순위와 무관하다.
마미손 '소년점프'
누군가 케이팝의 미래를 묻거든 고개를 들어 마미손을 보라!
'소년 점프'가 힙합이라고? 무슨 소리. 팝도 힙합으로 대체된 마당에 케이팝의 종합 컨텐츠 적 성격까지 고려하면 '소년 점프'는 단연코 올해의 '가요'다. 공원 운동기구 위에서 좀비처럼 흔들리는 마미손, VHS 방식의 비디오 프레임, 1980년대 청춘 드라마와 스포츠 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각종 효과, 노래방 배경화면, 한국 특유의 광적인 기독교 문화 등 뮤직비디오는 대한민국 그 자체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장을 하면서 "돌 맞은 개구리처럼" 울부짖고,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며 김성모 만화의 유명한 대사를 외치는 마미손의 가사는 한국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밈(meme)으로 가득 차 있다. 쇼맨십, 엔터테인먼트, 여기에 < 쇼미더머니 > 탈락 서사까지, 마미손이 준 아이돌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배기성의 유쾌한 마초이즘과 강렬한 록 사운드가 만난 '소년 점프'는 한국의 런 디엠씨 타이틀을 노리는 마미손의 큰 그림일지도 모른다! (정연경)
문정후 '이방인'
인생이 힘들고 슬프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 삶의 진리다. '이방인'은 이 사실을 진실로 일깨워주는 빛나는 싱글이다. 절망을 희망으로, 좌절을 용기로, 어둠을 광명으로 인도하는 '이방인'은 오늘도 힘든 우리를 다시 분기탱천하게 만든다. 슬프고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발현되는 긍정과 용기는 록 밴드 뷰렛과 다른 음악을 하고자 했던 문정후의 결단과 맞닿아 있다. 힘들고 슬플 때 들어야 하는 '이방인'은 씻김굿 같은 노래다.(소승근)
박지민 'April Fools(0401)'
'히트하는 음악보다 나만의 음악으로 감정을 공유하고 싶다'는 박지민의 다짐이 담겼다. 긴 공백기에 조급하지도, 새로운 시도에 대한 강박으로 과하지도 않았다. 차분한 감정선으로 출발해 특유의 탄력적인 보컬 역량을 선보인 'April fools(0401)'는 '좋은 음악'을 고민하는 젊은 아티스트의 절제가 인상적이다. 폭발적 고음과 가창력을 쏟아내던 어린 소녀가 '참아내는' 매력을 깨친 것이다.
본인의 경험을 소재로 삼아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한 이 곡은 제목의 '만우절 농담'과 배치 되는 깊은 잔향으로 빛난다. 퓨처 알앤비의 유행을 수용하면서도 마니아적 감성에 치우치지 않고, 대중성을 확보하면서도 오디션 프로그램의 고정 관념을 자연스럽게 허문다. 무엇보다 '박지민의 음악'이란 점이 고무적이다. 성장과 가능성을 본다. (김도헌)
선미 '사이렌'
'사이렌'으로 자신의 역량을 발산한 선미는 올해 가장 인상적인 여성 솔로 가수로 남았다. '가시나'로 경고 3부작의 시작을 화려하게 열었던 그는 '주인공'에서 표절 논란을 겪자 작곡가가 만든 곡을 받는 대신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한 곡으로 대중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한다. 선미 특유의 무심하면서도 파워풀한 색깔이 묻어난 이 곡으로 퍼포머로서, 가수로서, 하나의 아이콘으로서 독보적인 위치에 오르게 됐다.
복고 콘셉트가 중심이던 원더걸스 활동 당시 써둔 이 곡은 1980년대 유행 장르였던 디스코, 신스팝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유혹의 요정과 경고를 알리는 '사이렌'을 뜻하는 제목답게 경고음의 배치, 극적 전개가 돋보이는 비트, 레트로 스타일의 신시사이저와 같은 세밀한 사운드 설계가 뮤직비디오 속 퍼포먼스와 만나자 더욱 빛을 발했다. 거부할 수 없는 매혹으로 많은 이가 '사이렌'에 빠져든 2018년이었다. (정효범)
사이먼 도미닉 '데몰리션 맨 (Feat. 김종서)'
7년 만의 정규앨범 < Darkroom >이 음악 커뮤니티의 댓글 창을 수놓았던 '일해라 정기석'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을지라도, 수록곡 '데몰리션 맨'은 기대감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긴 트랙이다. 긴장감이 흐르는 비트에 올라선 그는 신랄한 테크닉을 갖춘 래퍼 혹은 유쾌한 연예인이 아닌 인간 정기석의 내면을 가감 없이 꺼내 보인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처절한 서사를 토하듯 쏟아내는 곡은 한 아티스트에 감정에 대해 몰입하게 되는 진귀한 경험을 선사한다. 그가 겪었던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충격적인 묘사와 연기에 가까운 래핑이 훌륭한데, 그중에서도 시퍼런 목소리로 노래하는 김종서의 피처링은 2018년의 신의 한수라 할 정도로 압권이다. (이택용)
박원 '나'
발라드는 두 가지가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 하나는 다수의 공감을 창출하는 가사 그리고 그것을 듣는 이에게 전달하는 앰프의 성능, 스피커의 질이다. 먼저 스피커로서 박원은 이력을 축적해 획득한 표현력, 이를테면 음색과 음량의 조절 그리고 그 선택이라는 앰프의 충실한 기능에 기저한 발현이라는 점에서 여느 R&B 발라드부류보다는 진실하고 우월하다.
그래서 두 번째인 여전한 불평등과 소외라는 고단한 현실 속에서 '몇 번을 깨져도 같은' 젊은 세대의 자기불신과 회한을 담은 서러운 노랫말이 즉각적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하루를 정리하며 '내가 왜 이렇지?' 해본 사람이라면 가사가 마치 아교처럼 가슴에 달라붙는다. 넋두리와 고백이 수놓은 절실 언어의 개가, 실감나는 가창력의 승리라할 2018 발라드의 정점. (임진모)
잔나비 'Good boy twist'
오늘날 청춘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옛 거장들의 음악을 사랑하는 이 독특한 밴드는 'Good boy twist'로 시대적 고민을 그려낸다. 1992년생 원숭이(잔나비)띠 멤버들로 구성된 이들은 비틀스와 브릿팝, 트위스트 열풍을 간직한 1960년대 당시 경쾌함을 밴드 고유의 작법으로 여기에 풀어냈다. 부담 없이 다가오는 서정적인 선율, 유행과 거리가 있을지라도 좋아하는 장르를 밀고 나가는 끈기도 갖췄다.
2018년에는 '대충 살자',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외침이 유독 많았다. 굶주림, 치열함, 노력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속에서 자신만의 춤을 추는 자를 따라갈 것인가,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이전 삶의 양식을 유지할 것인가. 옳다고 여긴 가치관이 과거의 유산임을 깨달았을 때 그 허무함. 밴드는 그들의 정체성과 현세대가 마주한 번민을 이 곡으로 응축해낸다.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것만으로도 올해의 싱글이 되기에 충분하다. (정효범)
김사월 '로맨스'
선율에 굶주리고 언어에 굶주린 사람들에게 김사월은 오아시스다. 그래서였을까. 2018년은 그야말로 '사월의 해'였다. 그 중심에 '로맨스'가 있었다. 시간을 한참 뛰어넘은 고전적인 블루스 사운드 위로 나른하게 읊조리는 보컬은 우리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간다. 달콤한 몽롱함 속에서 한층 따뜻해진 언어가 반짝인다. '너무 많은 연애' 너머의 로맨스는,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우리를 돕자는 따뜻한 연대의 손길로 나아간다. 여기에 탁월한 선율과 고혹적인 음색을 더하니 공명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옷을 걸쳐도 자신만의 향기를 잃지 않는 감각에 놀라고, 그 독창성이 굉장히 편안하게 다가온다는 데서 또 놀란다. 뚜렷한 개성과 넓은 확장성이 만나는 그 지점에 김사월 음악의 힘이 있다. 음악에서도 언어에서도, 치열할 정도로 김사월은 아무도 내쫓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모두를 품기 위해 자신을 속이지도 않는다. 진솔함에서 우러나온 가장 안온한 위로. 그렇게 그는 올해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고요히 열었다. (조해람)
엄정화 'Ending credit'
제2의 누군가가 아닌 제1의 엄정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다. 건강상의 이유로 장기간 활동을 접고 목소리 사용을 일절 금하던 그가 들고나온 노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하고 솔직했으며 그래서 더 멋있었다. 레트로 신스팝 장르에 '너와 나의 영화는 끝났고', '관객은 하나둘 퇴장하고', 엔딩 크레딧만이 영화관을 가득 채우는 이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사랑으로, 이별로, 그리고 인생으로 자리한다.
정규 10집 기준,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타이틀 'She' 대신 이 곡을 올해의 싱글로 선택한 것은 'Ending credit'이 퍼트리는 반짝임 덕택이다. 소소한 반응을 일으킨 뮤직비디오 속 여전히 화려한 춤사위와 당당한 스탠스는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여성 뮤지션의 주체성을 드러낸다. 언제나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엄정화의 이 곡은 복고 성향이지만 절대 퇴행이 아니다. 잘 짜인 구성과 완벽히 맞아 들어가는 무대 매너가 빛을 발한 올해의 대표 싱글. (박수진)
김하온(HAON) '붕붕' (Feat. Sik-K)
꿀벌 옷을 입고 무대 위로 등장한 그는 멋쩍은 웃음을 짓다 이내 입을 열었다. '안녕, 나를 소개하지. 이름 김하온, 직업은 traveler' < 고등래퍼 2 >를 통틀어 가장 큰 인상을 남긴 장면이다. 가사에서 증오를 뺀다는 독특한 캐릭터의 등장, 타이트한 랩과 뛰어난 전달력까지 겸비한 18살 소년 김하온은 '매운 맛'으로 점철되던 힙합 씬에서 보기 드문 '순한 맛'으로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래퍼 빈첸과 함께한 '바코드'도 큰 주목을 받았지만, 김하온의 지향점을 잘 표현한 곡은 '붕붕'이다. 작년에 이어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는 프로듀싱팀 그루비룸의 트렌디한 비트와 긍정적인 바이브를 내뿜는 김하온의 래핑, 식케이의 훅 등 '붕붕'의 매력은 다채롭다. 신예의 탄생을 강력하게 어필한 2018년의 히트 넘버! (이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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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www.izm.co.kr)은 음악 평론가 임진모를 주축으로 운영되는 대중음악 웹진이다. 2001년 8월에 오픈한 이래로 매주 가요, 팝, 영화음악에 대한 리뷰를 게재해 오고 있다. 초기에는 한국의 ‘올뮤직가이드’를 목표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힘썼으나 지금은 인터뷰와 리뷰 중심의 웹진에 비중을 두고 있다. 풍부한 자료가 구비된 음악 라이브러리와 필자 개개인의 관점이 살아 있는 비평 사이트를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