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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은 언제 어른이 되는가

『눈만 봐도 다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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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귤처럼 향긋한 하루를!’이라는 글귀가 적힌 쪽지와 함께 작은 귤 하나를 손에 쥐어준다. (2019. 01. 03)

출처 언스플래시.JPG

           언스플래쉬

 

 

사무실 책상 위에 귤을 하나 놓아두고 있다. 열흘째다. 이제 음식물이라기보다는 장식품에 가까워진 귤을 업무와 업무 사이에 가만히 본다. 그때 귤은 귤이 아니라 딴생각의 꼬투리나 상상의 완구 같은 것이 된다. 거기 있는 것이 없는 편보다 낯선 것에서 우리는 색다른 의미를 찾아내곤 한다. 시내 한복판에 설치된 망치질하는 거인이나 색색의 소라 모형은 어떤가. 시멘트 담을 넘어 자란 어느 집 감나무 한 그루가 도심 골목에 만들어내는 고즈넉함은 ‘어울림’에 관하여 고심하게 한다. 행인의 머리 위로 무심히 툭 떨어지는 ‘감 폭탄’은 하루의 재수를 점치는 가운데 인간이 자연을 이루는 족속에 불과함을 알려준다.

 

오늘은 수분이 날아가면서 한층 더 쪼글쪼글해진 귤피를 보면서 나의 사사로운 생활을 돌아보았다. 시간을 쓸모 있게 쓰고 있는가. 일하는 도중에 일을 떠맡고, 마감하는 와중에 마감이 돌아오다 보니 몸도 마음도 지쳐가고 있다. 몹쓸 노릇은 그런 이유로 해야 할 일을 자꾸만 미루고 있다는 사실. 심신이 미약하여 마감 기한이 지나도 훨씬 지난 원고를 계속해서 붙들고 끙끙거리고 있으니… ‘원고 마감 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복약 지도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어른은 어떻게 되는가.

 

써야 할 원고의 주제다. 학창 시절 교실에서 품었던 남다른 감정이 어떻게 ‘어른의 자양분’이 되었는지, ‘시’는 어쩌다 탄생했는지를 간략히 적어 보내면 되는 원고를 수개월째 털지 못하는 일은 과연 어른스러운 걸까, 어른스럽지 못한 걸까. 귤 하나에 어른이 되는 삶을 고민해보았다. (‘고민할 시간에 썼더라면’ 하고 편집자 선생님은 혀를 차겠지만…)

 

진정한 어른은 누군가에게 딴생각의 꼬투리가 되어주거나, 부스러지기 쉬운 소라 껍데기로도 단단한 불의의 못을 박을 줄 아는 사람이며, 주렁주렁 매단 지혜의 여물을 어린 까치들에게도 나누어줄 줄 알고, 고민이 많아 우왕좌왕인 짐승을 앞에 두고 툭, 한 마디 말로 생각의 물꼬를 터주는 사람은 아닐는지. 그런 사람이라면 하기로 한 일은 차근차근 처리하고, 하지 못할 일은 정중히 사양하는 얄팍한 덕을 갖추고 있으리.

 

그러나 이맘때의 누군들 달력을 자주 쳐다보지 않을까. 어른은 그토록 더 멀리 있는 것. 한때 생각이 행동을 따라가지 못하고, 행동이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날들이 반복되어 마음과 몸 동시에 병이 생긴 엄마는 ‘움직임’을 잠시 잃고 한자리에 꼼짝없이 누워 있는 일을 ‘괴로운 기쁨’으로 여겼다. 속 시끄러운 자식에게 툭, “세상, 바쁘게 살지 마”라고 일갈했다. 이제는 빠른 행보가 아니라 몸이 느려서 바쁜 행보를 보이는 엄마는 언제부터 어른이었을까. 엄마의 무릎 관절은 대관절 다 망가질 때까지 왜 어른스러운 척을 하는 도구여야 했을까. 가사 노동을 일삼으면서도 가정집을 개조해 오랫동안 식당을 일구어온 사람은 가끔 어딘가를, 무엇을 바라보며 딴생각을 하였을까.

 

엄마는 바쁘다
보일러를 켜고 찌개를 끓이다
내가 보일러를 켰던가
보일러를 켜러 간다
이가 시려서 귤을 못 먹겠어
난로 위에 귤 하나를 올려놓고
밥상을 차리다 묻는다
내가 보일러 켰니?
난로 위에서 귤이 타고 있다
나는 따듯한 귤을 먹는다
엄마는 바쁘다
설거지를 끝내고 보일러를 끈다
식탁을 닦다가
내가 보일러를 껐던가
보일러를 끄러 간다
옷을 갈아입고 운동을 나가다 묻는다
내가 보일러 껐니?
엄마 간다
엄마 잘 가 인사를 한다
2분 뒤에 엄마는 다시 들어올 거다
오늘은 냉장고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엄마 진짜 간다
엄마 진짜 잘 가 인사를 한다
엄마는 깔깔깔 웃으면서 나간다
엄마는 자꾸 바빠지고
나는 따듯한 귤을 먹는다

 

-박찬세 지음,  『눈만 봐도 다 알아』 의 「따듯한 귤」 전문

 

동료가 ‘오늘은 귤처럼 향긋한 하루를!’이라는 글귀가 적힌 쪽지와 함께 작은 귤 하나를 손에 쥐어준다. 열흘이 된 귤과 막 책상에서의 하루를 시작한 귤을 두고 보다가 시간에 힘입어 따듯해진 귤을 까먹는다. 먹으면서, 책상 위에 작은 귤 하나, 본다. 요즘 노지 귤 한 상자는 1만 원이 채 되지 않는다는데… 귤 한 상자가 1만 원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은 괜찮은 걸까. 어른이란 자본이 매겨놓은 값어치에 관하여 종종 궁금해하는 사람, 귤 하나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손길에 다른 값어치를 매길 순 없을지, 어울림에 관하여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나저나, 귤은 차가운 과일일까, 따뜻한 과일일까.


 

 

눈만 봐도 다 알아박찬세 글 | 창비교육
어른들이 미운 이 시집의 화자는 매일매일 어떻게 하면 삐뚤어질까 고민한다. 그래 봐야 잠을 자거나 수업을 빼먹는 게 고작이지만 그것은 엄연한 저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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