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강병철의 육아의 정석
의사들은 왜 그 모양일까
국민-정부-의사가 했으면 하는 일
‘의사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끌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사회에서 의료의 건강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뜻입니다. 면역이 심각하게 저하되면 별 것 아닌 병원체도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같습니다. (2017. 12. 26.)
언스플래쉬
연말입니다. 올해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기 키우는 입장에서 <안아키> 사태를 잊을 수 없습니다.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고 있습니다. <환자 혁명>이란 책입니다. 두 가지 사건을 면밀히 추적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띕니다. 의사와 현대의학을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끌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겁니다. 두 권의 책 모두 황당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펼치지만 맹신하는 분들은 ‘정의의 사도’로 생각합니다. 그만큼 의료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저는 10년 전에 한국을 떠났습니다.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잘 되는 소아과를 접는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정신 나갔다고들 했습니다. 그런 결정을 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더 이상 환자들과 신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진료를 할 수 없다는 판단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간 한국을 자주 드나들며 병원에도 갔습니다. 그때마다 의료 현장이 갈수록 황폐화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의사들은 무기력하고 불행했으며, 정부는 무책임하고 무관심했고, 환자들은 불안하고 화가 나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들면 이내 기가 질려버립니다. 문제가 너무나 복잡하고 다층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책으로 몇 권쯤은 쓸 수 있을 겁니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라고요? 그럴 지도 모르지만 의료만큼 피부에 와 닿는 분야는 별로 없습니다. 게다가 누구나 자기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마다 견해와 해석이 다양합니다. 사람들은 복잡한 설명을 싫어하죠. 그래서 고르디오스의 매듭을 자르듯 단칼에 정의해버립니다. “의사들이 나쁜 놈들이야!” 우리 눈앞에 펼쳐진 모습은 그렇게 수십 년을 끌어온 결과입니다. 그럼 어쩌란 거야? 짧은 글은 많은 오해를 부를 수 있지만, 문제가 시급하기에 몇 가지만이라도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의료의 주체는 국민-정부-의사입니다. 각 주체들이 당장 했으면 하는 일을 두 가지씩 정리해보았습니다.
1. 의사 - 일단 “나쁜 의사”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나쁜 의사란 돈에 양심을 파는 의사와 공부를 게을리하여 환자에게 해를 끼치는 의사입니다. 그간 의사들은 모든 의사가 양심적이며, 자격에 걸맞은 실력을 갖고 있다고 전제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나쁜 의사는 실재합니다. 진실을 외면한 대가는 혹독하여 이제 썩은 사과를 추려내지 않으면 궤짝 속의 사과가 몽땅 썩어버릴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의료는 매우 전문적인 분야라 나쁜 의사를 제대로 감별할 수 있는 것은 의사들뿐입니다. 전문가 집단이 ‘자정’하지 않으면 ‘타정’당한다는 건 역사의 교훈입니다. 보통 ‘타정’이 ‘자정’보다 훨씬 고통스럽습니다.
소통에 힘써야 합니다. 의료의 문제를 비의료인에게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의사들은 놀랄 만큼 소통 전략이 없어 보입니다. SNS를 활용할지, 언론 매체나 책을 활용할지, 어떤 식으로 설명할지, 누가 설명할지, 설득 대상은 누구인지 고민이 부족합니다. 읽기 어려울 정도로 어려운 글을 써놓고 자기들끼리 환호하며 박수를 보냅니다. 눈을 조금만 돌리면 소통과 설득 전문가는 넘쳐납니다. 설득과 소통도 의료만큼이나 전문 분야입니다. 의료계 내부에도 국민의 존경을 받고 글도 잘 쓰는 분들이 많죠. 사령탑을 세우고 필요한 분들을 모셔와 정부 및 국민과 소통해야 합니다. 그걸 왜 꼭 우리가 해야 하느냐고요? 아무도 의료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죠. 소통은 스스로를 살리는 길이자 지식인의 책무입니다.
2. 정부 - 통계와 숫자에 매몰되지 말고 현장과 인간을 바로 보세요. 저수가를 얘기하면 원가보전율을 놓고 입씨름이 벌어집니다. 외상센터와 신생아중환자실에서 사고가 나면 지원 예산을 줄였느니 아니라느니 티격태격합니다. 물론 정부는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근거가 필요하죠.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문제가 되는 건 아무리 노력해도 인정받지 못하고, 자칫 실수를 하는 날에는 ‘한 방에 가는’ 의사들의 위치입니다. 양심에 따라 처방한 약이 엉성하게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삭감 당하고, 부당청구로 몰려 순식간에 비양심적인 사람이 돼 버리는 기막힌 꼴을 겪어보지 않은 의사가 거의 없습니다. 현장에서 어떤 부조리한 일이 벌어지는지, 왜 의사들이 하나같이 절망하는지를 숫자가 아닌 스토리로 파악하라는 겁니다.
싸움을 붙이지 말고 오해를 해소하는 편에 서주세요. 우리는 어느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의료수요를 놀랍도록 싼 값에 해결하는 나라입니다. 이런 시스템 속에서 의사도 불행하고, 국민도 불행합니다. 그간 정부는 의사가 불의한 집단이란 생각을 부채질하거나, 최소한 방조해왔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큰 자산이 무얼까요? 서로 신뢰하는 겁니다. 모든 걸 시스템이나 법조문으로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지요. 신뢰하는 사회는 갈등이 적고, 더 행복하며, 더 적은 비용으로 훨씬 많은 것들이 제대로 돌아갑니다. 사실 의사들이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 건 이전 정부에서 오래도록 약속을 어겨온 탓도 큽니다.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으니 그런 부분을 솔직히 밝히고 사과한 후 밀린 책무를 이행한다면 서로 신뢰를 회복하고, 국민들의 오해를 일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겁니다.
3. 국민 - 무엇보다 의료는 내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의료는 의사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군대가 장군들의 것이 아니듯, 생로병사라는 삶의 가차없는 수레바퀴 밑에서 가장 힘들 때 자신을 지키기 위해 우리 스스로 의료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겁니다. 내 것이기 때문에 이상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데, 그 기준은 과학에 있습니다. ‘과학이 무조건 옳은 것이냐?’고 따지는 분도 있는데, 늘 말하지만 과학이란 ‘그 말이 옳다는 증거가 있느냐’를 묻는 것입니다. 옳은지 그른지 증거도 없는 곳에 피땀 흘려 번 돈을 쓸 수는 없잖아요? 의사들이 미우니 현대의료를 거부하고 비과학적인 것을 좇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과학적인 쪽에 힘을 실을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의사가 되는 젊은이들도 모두 우리 자식입니다. 이제 막 의사가 되어 죄를 지을 시간조차 없었던 사람을 “돈 밖에 모르는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는 게 옳은 걸까요? 모든 의사가 결국 그렇게 된다면 그건 사람 탓이라기보다 제도가 잘못된 것 아닐까요? 의료/의료인에 대한 감정적/이분법적 비난은 양심적인 의료인들을 더욱 무기력하게 만들 뿐 아니라 국민보건에도 아주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패키지(package)화된 사고를 경계하세요.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외세에 의해 강제된 역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국에서 유래한 것에 대한 반감이 유난히 심합니다. 그간 권위적이고 부패한 정권에 의해 저해되어 온 건전한 시민사회에 대한 열망도 강하죠. 자본의 폐해를 혐오하며 자연적인 것, 환경친화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다 좋아요. 문제는 이것들이 각기 따로 엄밀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 패키지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자면 정치적 진보-기본소득-탈원전-페미니즘 지지자들이 해열제를 먹이면 면역이 약화된다고 40도가 넘어가는 아이를 방치하고, 거대제약자본의 음모라고 혈압약을 거부하다 치매에 걸리고, 초기에 손 쓰면 완치할 수 있는 암을 자연적으로 치유한다고 버티다 아까운 목숨을 잃습니다. 현대의학은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고, 거대자본의 노예니까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학은 옳고 그름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건강을 지키고 생명을 살릴 수 있느냐’는 방법의 문제입니다. 과학과 의학에는 내 편, 네 편이 없습니다. 굳이 편을 갈라야 한다면 충분한 근거가 있으면 우리 편이고, 근거가 없이 신념이나 희망에 의존한다면 적입니다. 자신의 다른 신념과 일치한다고 해서 비과학적인 말을 믿고 따르지 마세요.
‘의사를 비난하는 것만으로도 주목을 끌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는 것은 사회에서 의료의 건강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다는 뜻입니다. 면역이 심각하게 저하되면 별 것 아닌 병원체도 생명을 위협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이 너무 깊어지는 것 같아 급한 마음에 몇 자 적었습니다. 물론 주제넘은 소립니다. 하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을 때는 어릿광대라도 나서야 하는 법입니다. 더 훌륭하신 분들이 더 좋은 생각과 해결책을 제시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느덧 한 해가 다 지났습니다. 일년 간 보잘것없는 글을 읽고 격려해주신 많은 분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새해에도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가정에 행복과 평화가 깃들기를 바랍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