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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인 몸

나는 내 것이 아닌 마누라의 몸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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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어렵지만, 마누라의 마음도 사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뿐이다.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간혹 또 있다면, 기꺼이 할 뿐이다. (2017.12.06.)

이기적인 몸.jpg

 

동네 마트 갈 때마다 헷갈리는 게 하나 있다. 수십 번도 더 샀는데 살 때마다 헷갈린다. 그럼 나는 마누라한테 전화를 건다.

 

“슈퍼 울트라 슬림 날개형... 중형인가 아니면 대형인가? 오버나이트는 또 뭐지? 날개형 아닌 것도 있나?”

 

생리대 말이다. 마누라한테 이번에는 걱정 말라며 자신만만하게 집을 나서지만, 생리대 코너만 가면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고 만다. 종류도 많고 가짓수도 많고, 그렇다고 지나가는 여자 손님을 붙들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어렵다. 아니, 그보다 왜 하필 내가 담배 사러 갈 때 꼭 생리대가 떨어지는 걸까. 참 불가사의하다.

 

눈치 빠른 계산원은 계산대 위 생리대를 마치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재빨리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준다. 반면 꼭 한 말씀씩 덧붙이는 나이 든 아주머니 계산원도 계시다.

 

“호호호... 우리 남편은 이런 심부름 죽어도 안 하는데, 좋은 남편이시네요 호호호...”

 

담배 사러 나온 김에 마누라 부탁으로 생리대도 같이 샀을 뿐인데, 좋은 남편 되기 너무 쉬운 것 같다. 사실 생리대 사는 일이 부끄럽지도 않고, 굳이 ‘검은’ 비닐봉지에 숨길 일인가 싶다. 말 그대로 생리 현상에 따른 생필품일 뿐인데 말이다. 그런데 여자들은 대체 왜 자신의 생리를 숨기게 됐을까.

 

공교롭게도 그동안 마누라와 나의 부부싸움은 마누라의 생리 기간과 겹칠 때가 많았다. 한 번은 마누라가 말다툼 도중 짜증을 심하게 내길래 혹시 생리 중이냐고 물었다가 더 크게 싸운 적도 있다. 마누라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튿날 내가 담배를 사러 나간다고 하자 생리대도 같이 사 오라고 했다. 슈퍼 울트라 슬림 날개형 대형으로. 덕분에 10년 동안 예고 없는 마누라의 짜증을 대처하는 기술이 부쩍 늘었고, 마누라의 생리 기간에도 이따금 평화로울 수 있었다. 물론 그 평화는 일촉즉발의 휴전 상태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마누라를 탓할 일은 아니다.

 

남자들이여, 이쯤 되면 여자들의 생리통이 궁금하지 않나? 이하는 마누라가 말하는 생리통 증상이다. 생리 2주 전부터 아랫배에 가스가 차기 시작하고, 가슴이 부풀어 오르면서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자극적인 인스턴트 음식이 수시로 먹고 싶고, (말 좀 천천히 해, 못 받아 적겠어. / 알았어.) 속이 더부룩해서 소화가 잘 안 되고, 생리가 시작되기 전에는 이유 없이 짜증이 나면서 만사가 귀찮고, (다 받아 적었어? / 어, 계속해.) 생리가 시작되면 설사 증세가 심해지고, 입맛도 달아난다고 한다. 한마디로 하자면 “기분이 더럽다”고 한다. 통증이 심할 때 진통제는 필수고, 바깥 볼일을 보다 공중화장실에서 생리대를 갈 때는 (특히 겨울철에!) “돌아버릴 것 같다”고 한다. (일단 외투는 두껍고, 변기 뚜껑은 차갑잖아!) 또한 생리혈 냄새를 다른 사람이 맡을까 봐 전전긍긍하게 되고, “자존감은 밑도 끝도 없이 곤두박질친다”고 한다. 마누라는 내게 자신의 생리통 증상을 설명하면서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고, 나더러 온종일 기저귀를 차고 있는 기분이 어떤지 아냐고 되물었다.

 

“글쎄...”

 

마누라는 마침내 분통을 터뜨렸다.

 

“생리 기간만 짜증나는 게 아니야! 내 몸이 내 것처럼 편하다고 느끼는 건, 한 달 중 일주일 정도 될까? 나머지는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다고!”

 

네이버 지식백과에 의하면, 생리 또는 월경은 “임신이 되지 않았을 때, 자궁내막이 호르몬의 분비 주기에 반응하여 저절로 탈락하여 배출되는 현상”이라고 한다. 보통 생리 주기는 28일이고, 만일 임신을 하게 되면 생리는 저절로 멈춘다. 대부분은 이 생리와 임신을 축복이라지만, 마누라는 “저주” 같고 “형벌” 같다고 했다. 어쩌다 피임을 깜빡한 날이면, 마누라는 암울한 미래부터 떠올린다. 애도 제법 컸고 가까스로 자기 일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했는데, 지금 다시 임신을 하면 일도 육아도 잘해낼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럼 나는 마누라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밖에 별도리가 없다. 내가 아무리 대신해 주고 싶어도 임신과 출산은 대신해 줄 수 없으므로.

 

누군가는 이런 마누라를 “이기적이다”라고 할 수 있겠다. 마침 한 개그맨도 몇 주 전 방송에 출연해 같은 맥락의 얘기를 했다. “결혼 후에도 (개인의 성취를 위해) 임신 안 하려는 여성은 이기적”이라나 뭐라나.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도 몇 해 전 한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해 “출산율이 낮은 건 여성들 지위 향상 때문”이라고 했다. 이들의 말은 곧바로 사회적 공분을 샀지만, 마누라와 나는 딱히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그 비슷한 얘기를 지금도 종종 듣는 편이다.

 

단골 편의점 사장님은 애랑 편의점을 갈 때마다 둘째는 언제 갖냐고 묻는다. 명절에 한 번씩 만나는 친척들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마찬가지고, 더 이상 자녀 계획이 없다고 하면 “이기적이다”라는 말이 돌아올 때도 있다. 그럼 마누라와 나는 웃고 만다. 그 정도는 대개 다정한 관심의 표현인 줄 아니까. 마누라가 출산 후 없던 알레르기가 생겨 항히스타민제를 매일 챙겨 먹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 다들 표정이 굳어버리니까. 항히스타민제를 매일 챙겨 먹어야 하는 마누라가 다시 임신을 하면 약을 끊어야 할 텐데, 그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임신을 하지 않더라도 한 달에 한 번씩 반복되는 생리는 죽을 맛인데, 이건 또 누가 알아줄까. “나도 군대 갔다 왔는데” 같은 엉뚱한 소리나 돌아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사실 나도 마누라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마누라의 몸은 내 것이 아니므로. 하지만 나는 내 것이 아닌 마누라의 몸을 사랑한다. 이해하기 어렵지만, 마누라의 마음도 사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그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뿐이다. 그것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간혹 또 있다면, 기꺼이 할 뿐이다. 가령 어느 생리대가 발암물질이 가장 적게 들었는지, 생리대 주요성분 정도는 나름 꼼꼼히 살핀다는 얘기다. 그래 봤자 맨날 헷갈리지만. 만일 생리대가 내 몸에 필요했다면, 헷갈릴 일이 없었겠지. 말하자면 마누라가 이기적인 게 아니라 내가 이기적인 거다.

 

※ 이번 칼럼에 첨부된 그림은 제 배우자 송아람 씨가 직접 그려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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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권용득(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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