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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

글쓰기가 운전도 아니고 뭐 어때. 가을야구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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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서재를 구경할 기회가 될 때마다 어떤 방법으로 책을 꽂아두었는지 살핀다. 멜빌 듀이의 환생인 듯 완벽한 분류를 해둔 이들을 존경해 마지않으면서도 계통 없이 책을 꽂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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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스플래쉬

 

 

Q. 다음 중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무엇일까?
1. 독서
2.
3. 야구
4. 전어

 

계절이 바뀔 때면 달라진 공기에 맞는 작은 계획을 하나씩 세우게 된다. 올 여름에는 검은색 모노키니를 사자고 생각했고 지난겨울은 방어를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을에는 무엇을 계획에 넣어볼까, 짧은 계절이 지나기 전에 곰곰이 생각한다.

 

책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가을이라고 독서를 계획에 넣는 일은 겸연쩍다. 그러나 독서보다 적독만 하고 있는 형편이니 날씨에 맞게 책이나 좀 읽어볼까 결심해도 좋겠다. 저승에 가면 남긴 밥을 다 먹어야 하고,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은 다 들고 서 있어야 한다니 말이다. 

 

다른 이의 서재를 구경할 기회가 될 때마다 어떤 방법으로 책을 꽂아두었는지 살핀다. 멜빌 듀이의 환생인 듯 완벽한 분류를 해둔 이들을 존경해 마지않으면서도 계통 없이 책을 꽂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불연속적인 칸과 칸 사이의 공간이 맥락을 만들어 낸다는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 속 설명을 인용하며, 제멋대로 꽂힌 책과 책 사이에서 낯선 이미지가 발생한다고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대충 아무데나 꽂아둔다. 덕분에 책 한 권 찾으려다가는 온 집을 돌아다녀야 한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제자리에 잘 꽂는 것이 실로 중요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만약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대충 잘못 꽂아둔 경우, 청구기호를 들고서도 책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분명 도서관 안에 있지만 분실도서와 같다. 목적 없이 서성이던 어떤 사람이 무심코 그 책을 꺼내 읽고, 반납 서가에 두어 다시 배가되는 행운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나 애초에 잘못된 자리를 지정 받는 책도 드물게 있다.

 

윤대녕의 『은어낚시통신』과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가 취미, 낚시 코너에 꽂혀 있었던 이야기는 고전이다. 로버트 퍼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나 제임스 설터의 『스포츠와 여가』도 잘못된 서가를 배정받을 만하지만, 뒷표지 ISBN 옆 다섯 자리의 부가기호는 책의 분류를 정확히 지정하고 있기 때문에 잘못 꽂히는 일은 거의 없다. 괜히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가 실용-요리 코너에 있거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대중문화 코너에 있는 소소한 재미를 상상하며 킬킬대 보는 것이다.

 

물론 두세 가지의 분류가 모두 어울리는 책도 있다. 만약 고교야구 여자 매니저가 피터 드러커를 읽는다면』의 경우 부가기호 03830, 일본소설이지만 피터 드러커의 ‘매니지먼트’와 나란히 두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마트 수산코너 광어회 근처에 둔 초고추장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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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산코너 초고추장


다카하시 겐이치로는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의 한국어판 서문에 이런 작가의 말을 달아놓았다. “많은 책방에서 이 작품이 스포츠 코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불평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한 번 쓰인 작품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까.”

 

등장하는 제목이 뭔가 자꾸 야구 쪽으로 흘러간다고 느낀다면, 맞다.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하면서 온갖 책 제목을 주워섬겼지만 사실 가을에 가장 어울리는 단어는 야구라고 생각하고, 가을의 계획은 언제나 가을야구다. 그러나 방어와 비키니를 실패한 것처럼 가을야구도 봄날 아지랑이를 보고 가진 헛된 꿈이기 십상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속에 이런 대목이 있다. “삼십 년에 한 번밖에 우승을 하지 않는 팀을 응원하고 있노라면, 딱 한 번의 우승으로라도 오징어를 질겅거리듯 십 년 정도는 즐길 수 있다.”

 

같은 마음으로 지금 간절히 오징어 한 마리 생기길 바라며 손톱을 쥐어뜯고 있다. 그리고 여기까지 쓰고 야구 좀 보고 오겠습니다. 지금 준플레이오프 1차전을 하거든요.

 

보태기_ 칼럼의 제목을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라고 지었지만 정말로 술을 마시고 글을 쓴 적은 없었는데 지금 나는 술에 취해 있다. 그래서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글쓰기가 운전도 아니고 뭐 어때. 가을야구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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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고여주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라는 변명 아래 책과 전자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작년부터 알코올 알러지를 앓고 있는데 개가 똥 알러지 같은 소리라는 핀잔만 듣고 있습니다. 고양이 4마리, 개 1마리와 살며 책에 관한 온갖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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