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
언스플래쉬
소설 거절술이라는 책이 있다. 출판사 편집자가 투고 들어온 소설을 거절하는 편지를 모아놓은 형식인데 전보나 단막극, 우화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방식의 거절 편지로 그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다. 원고를 투고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읽어보면 정신 건강상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세상에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미리 거절 당해 버렸기 때문에 어떤 거절에도 크게 상처받지 않는 맷집이 길러진다.
그러나 현업에서 투고작에 대한 거절 편지보다 더 심금을 울리는 글은 원고 독촉문일 거다. 편집자의 중요한 기술에는 기획이나 교정교열만큼이나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작가에게서 원고를 어떻게 받아내느냐가 있다. 글이라는 게 쓰려고 마음 먹는다고 술술 쓰이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안쓰러운 마음은 가득하나 출간 일정을 맞추기 위해 원고를 어떻게든 독촉해야 하는 편집자의 고충이 여기에 있다.
학교에서 과제에 한 달의 여유를 주든 일주일의 기한을 주든 과제하는 시간은 결국 전날인 것처럼 원고도 마감이 코앞에 닥치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비로소 써진다. 원고는 한 자도 쓰지 못했는데, 미루고 또 미루며 빈둥거리고 있는 작가라 해서 딱히 마음 편하게 노는 것도 아니다. 끝내고 쉬면 된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도무지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님의 방랑을 끝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편집자의 독촉인 셈이다.
그렇게 쉽게 원고가 들어오면 모르겠는데, 한번 꼬여버린 원고는 풀리지 않고 한번 악성으로 밀리기 시작한 원고는 더욱 더 밀린다. 헬스장을 가지 않은 기간이 늘어날 수록 점점 더 가기 힘들어지는 것과 유사하다. 이때부터는 인간 관계에서 가능한 모든 회유와 설득, 괴벨스적 선동, 협박, 애교, 집착 등의 기술이 동원된다. 밀고 당기기는 기본이다. 며칠을 열심히 연락하여 격려와 독촉을 아끼지 않다가 갑자기 뚝 연락을 하지 않는다. 애원과 절규, 통사정도 추가된다.
혹자는 이러한 과정을 채권 추심에 비유하기도 하며, 도망친 노비를 잡아들이는 추노에 비하기도 하는데, 여하간 편집자마다 오지 않는 원고와 사라진 작가를 찾아나선 대모험의 서사를 한두 가지씩 갖고 있다. ‘작가야 작가야 원고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먹으리’ 라던가 ‘동창이 밝았느냐 편집자가 우지진다 글 쓰는 작가는 원고 아직 멀었느냐 원고지 오백 매를 언제 쓰려 하나니’ 같은 구전 가요도 한을 담아 유구히 전해진다. 시일이 정말 중요한 잡지 마감의 경우에는 작가를 일시적인 감금 상태에 두고, 사천왕처럼 삼지창을 들고 서서 완성까지 지키고 있기도 하다니 마감을 지키는 일은 이토록 어려운 것이다.
마감이 늦어지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운동량이 부족한 작가들 특성상 유행성 질환이나 근육 관련 질병이 대부분이다. 하드디스크가 날아가거나 컴퓨터가 고장 나는 등의 물리적 문제도 흔하다. 가장 인상적인 마감 연장의 이유는, 어제 입양한 한 달 된 아기고양이가 지금 팔에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슬처럼 짧은 아기고양이 시절을 충분히 함께 하시고 원고는 천천히 달라고 진심으로 말하였다.
출판계란 쓰는 사람이 읽고 읽는 사람이 팔고 파는 사람이 만들고 만드는 사람이 쓰는 돌고 도는 닫힌 계 같아서, 이곳에서 편집자는 다른 곳에서 저자인 경우도 태반이다. 서로의 곤욕을 지나치게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 더 관대하거나 더 가혹해지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는 지금 이 글을 제 담당 편집자가 보시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라는 변명 아래 책과 전자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작년부터 알코올 알러지를 앓고 있는데 개가 똥 알러지 같은 소리라는 핀잔만 듣고 있습니다. 고양이 4마리, 개 1마리와 살며 책에 관한 온갖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