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정지혜의 사적인서점
내 삶에서는 나의 선택만이 정답
더 이상의 명분이 필요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책의 재미를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2017.09.29)
‘서점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준 B&B 서점. B&B를 보면서 책방의 새로운 가능 성을 모색할 수 있었다.
서점을 열고 싶다는 마음은 왜 이유가 안 되죠
어렵게 마음을 굳히고 회사를 그만뒀지만 퇴사 후 첫날부터 서점을 열겠다는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퇴사만 하면 그다음 과정은 착착 진행될 줄 알았는데 자꾸 소심해지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웠다. 일단은 삼 년 동안 수고한 나를 위한 안식 여행 겸 서점 운영에 대한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일본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일본 서점 여행을 다니며 알게 된 도쿄 B&B 서점의 점장 테라시마 씨에게 퇴사와 여행 소식을 알리자, 그는 내게 의외의 제안을 했다.북 코디네이터이자 『책의 역습』의 저자 우치누마 신타로 씨와 대담을 나누며 한국과 일본의 서점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B&B는 책(BOOK)과 맥주(BEER)의 첫 글자에서 따온 이름으로, 도쿄 시모키타자와에 위치한 신간 서점이다. 술 먹는 책방의 원조로 잘 알려져 있지만, 오픈 이래 1년 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이벤트를 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다 보니 ‘B&B에 가면 언제든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점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한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해본 경험이라고는 작은 규모의 독서회나 워크숍을 진행해본 게 전부였기에 과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모객이 안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그럼에도 나에게 선배 서점인으로서 많은 영감과 자극을 주었던 우치누마 씨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니 놓치기 아쉬운 기회인 것도 같았다. 호기롭게 해보겠다고 말해버렸다.
‘한국과 일본의 책방 사정 이것저것’이라는 주제로 토크 이벤트가 시작되고 가장 먼저 내가 일했던 땡스북스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홍대 앞이라는 특성을 고려해서 선별한 책을 갖춘 큐레이션 서점이라는 점, B&B와는 서점에서 음료와 가구를 판매한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 이백여 군데의 출판사와 직거래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기획 전시를 연다는 등의 이야기를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긴장되었지만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이므로 실수 없이 이어갈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본격적인 질의 응답 시간이 되자 우치누마 씨는 나에게 준비 중인 서점과 일본 서점 여행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정지혜 씨가 열고 싶은 책방은 어떤 책방인가요?”
“음…. 제가 읽어 보고 좋다고 생각하는 책만 파는 서점을 하고 싶습니다.”
퇴사 당시 생각해두었던 맞춤형 책을 처방하는 서점에 대해 얘기할 수도 있었지만, 책방을 열 것인지 말 것인지 마음의 확신이 완전하게 서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나는 그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일본어를 모르는데 일본 서점에 오면 어떤 방식으로 책을 고르나요? 일본 서점에 오면 어떤 부분을 중요하게 보나요?”
일본 서점 여행을 다니며 일본인 스태프에게 질문을 하기만 했지, 반대로 내가 질문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특별히 어떤 부분을 신경 써서 보거나, 생각을 정리하며 다녔다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직감적으로 찾아다녔던 터라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서점에 방문한다면 어떤 점에 주목하면 좋겠느냐는 질문에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국 사람들의 생기 있고 활력 넘치는 분위기를 즐겨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어영부영 둘러댔다.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분들이 한국의 서점을 궁금해하고 관심을 가져 주셔서 기뻤다.
특별히 이날은 이벤트 주제에 맞게 메뉴에 한국 맥주 하이트를 추가해 판매하기도 했다.
행사를 망친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러웠다. 그동안 여러 서점을 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은 많았지만 그걸 제대로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었나 생각하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동안 서점의 분위기만 소비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서점을 열어야 하는 명분과 서점을 여는 데 필요한 준비가 부족하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마침 같은 시기에 도쿄 여행 중이어서 응원차 토크 이벤트에 참석한 6699press의 재영님에게 내가 느낀 감정을 털어놓았다. 내 얘기를 묵묵히 듣던 재영님은 돌아가서 바로 서점을 열기보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준비하는 게 어떻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려가 깊은 사람의 진심 어린 조언이었기에 웃으며 넘길 수 없었다.
다음날, B&B 토크 이벤트에서 통역을 맡아주셨던 쿠온 출판사의 김승복 대표님을 진보초에 있는 한국 서적 전문 북카페 책거리에서 만났다. 김승복 대표님은1인 출판사 대표, 한국 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에이전트, 한일 문학 교류의 장을 만드는 북카페 운영자로, 일본에서 한국 문학을 알리기 위해 일인다역을 자처하는 에너지가 넘치는 분이셨다.
“지혜 씨는 언제 책방을 오픈할 예정이에요?”
마치 ‘볼드모트’라는 이름이라도 들은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나는 주눅이 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행사를 통해서 느낀 건데, 저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요. 서점을 열고 싶다는 마음만 앞섰지, 정작 서점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발신하고 싶은지 생각해보지 않았더라고요. 깊이가 생길 때까지 좀 더 시간을 두고 준비하려고 해요.”
그러자 김승복 대표님은 정색을 하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셨다.
“서점을 열고 싶다는 마음은 왜 이유가 안 되죠? 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의미? 깊이? 그런 건 다 말만 잘하는 사람들이 변명처럼 하는 얘기예요. 생각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아요. 저만해도 책거리를 열고 나서 배운 게 얼마나 많았다고요. 나는 지혜 씨가 하루라도 빨리 서점을 열었으면 좋겠어요.”
너무 다른 두 사람의 반응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 지인들에게 B&B 토크 이벤트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들의 조언도 정확히 반으로 나뉘었다. 부족하다고 느낀 점을 보완하며 천천히 준비해 보는 게 어떻겠냐는 쪽과 서점을 하고 싶은 마음이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하냐고 움직여보자는 쪽. 곰곰 따져보니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관에 따른 조언이었다. 모든 일을 깊이 있게 생각하고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생각파와 일단 행동으로 옮기고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가는 행동파. 그때 깨달았다. 둘 중에 정답은 없다는 것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내가 땡스북스에서 일하며 얻었던 가장 큰 깨달음은 책을 대하는 자세였다. 지금까지 만난 책의 세계는 하나같이 책은 가치 있고, 고귀한 것이라며 고답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하지만 땡스북스는 달랐다. 책과 가까워지면 이런 행복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하지 않고 경험하게 해주었다. 따뜻한 노란 불빛의 조명과 잔잔한 음악, 커피향이 나는 편안한 공간에서 책을 고르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퇴근길에 가볍게 서점에 들러 문화적인 자극을 받는 것이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지를. 책의 가치만을 강조할 게 아니라 책 읽는 환경을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만들면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관심이 생겨난다는 것을 나는 땡스북스에서 배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느낀 책의 재미를 내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주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더 이상의 명분이 필요할까? 어쩌면 내게 부족했던 점은 명분이 아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아니었을까. 스스로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 얘기 저 얘기를 듣다 보니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내 서점을 하고 싶다’고 대답하더라도 확신 없이 의기소침하게 얘기하는 것과 내 마음속에서 정리된 생각을 자신 있게 내뱉는 것은 달랐다. 먼저 ‘나’라는 존재가 단단하게 서 있어야 한다는 걸, 너무 따끔했지만 그래서 더욱 확실하게 깨달았다. 내 삶에서는 나의 선택만이 정답이라는 걸.
책의 역습우치누마 신타로 저/문희언 역 | 하루
맥주와 가구를 파는 도쿄 'B&B'서점 주인이자 북코디네이터로 활약하고 있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책의 미래
한 사람을 위한 큐레이션 책방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책과 사람의 만남을 만드는 일을 합니다
<우치누마 신타로> 저/<문희언> 역10,800원(10% + 5%)
맥주와 가구를 파는 도쿄 'B&B'서점 주인이자 북코디네이터로 활약하고 있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책의 미래 저자 우치누마 신타로는 10년 동안 책을 팔면서 현장을 경험한 결과 결코 출판의 미래는 밝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출판업계의 미래는 어둡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으며, 책의 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