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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금서 목록
금서 목록과 길티 플레저에 대한 변명
책상 아래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라면 ‘다락방의 꽃들’이 있다. 스티븐 킹의 작법서에서 절대 읽지 말라고 한 바로 그 책 맞다. (2017.08.08)
읽기는 대체적으로 권장되는 행위이다. 허락된 행동은 공부가 거의 유일했던 학창시절에도 읽는 일은 공부의 방법이거나 공부의 한 종류로 평가되어 큰 제지 없이 즐길 수 있었다. 요즘도 나아진 것은 없어 보이지만, 그때는 기껏 오락실이나 만화방 한 번 간 것으로 싹수가 노란 불량 학생 취급을 받았다. 학교가 허락한 즐거움이 독서에 한정되었던 것이야말로 활자중독자들이 생겨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샤워하는 동안 샴푸의 성분 명이라도 읽어야 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독서도 독서 나름이었다. 들켜서는 안 되는 몇 가지 책들이 책상 아래로 건너 다녔다. 대놓고 읽을 수 있는 책과 숨어서 읽어야 하는 책을 구분하는 것은 본능적이다. 명랑소설과 할리퀸, 파름문고의 소설들은 명백히 후자였다. 우리들은 독후감을 써도 되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용케도 분류해 유통했다.
언니의 분홍색 털 코트를 입으면 어른이 되어버리는 플롯시 이야기는 빨리 자라고 싶었던 시절의 판타지였다. 어른이 되어 밤 외출을 하고 데이트를 하며 위기는 임기응변으로 넘겨가는 이야기들을 콩닥거리며 읽었다. 기숙사 생활을 다룬 이야기는 워낙 많은 소재라 시리즈 명은 헷갈리지만 어딘가 좀 사회주의적인 규율을 가진 기숙학교가 배경이었던 소설도 기억난다. 그 속에 등장하던 진저 에일과 초콜릿케이크는 파자마 파티에 대한 판타지의 상징이었다. 권장도서가 보여주는 세계는 칙칙하고 고통스러웠지만 명랑소설은 우리의 세상에 떨어진 작은 달콤함이고 즐거움이었다. 플롯시 시리즈를 읽으며 자란 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즈음, 갑작스러운 핫핑크 퍼의 유행은 아마도 이때 형성된 집단 무의식이었을 거다.
책상 아래 베스트셀러 중의 베스트셀러라면 ‘다락방의 꽃들’이 있다. 스티븐 킹의 작법서에서 절대 읽지 말라고 한 바로 그 책 맞다. 다락방에 갇힌 남매에 얽힌 비극적인 상황 속에 비쳐나는 그 야릇하고 묘한 공기가 교실을 휩쓸었다. 단순한 로맨스 소설이라기엔 공포스럽고 탐미적이기도 한 분위기가 숨죽여 책장을 넘기게 했다. 책을 읽으면서 숨겨본 것은 처음이었다. 걸리면 압수되는 것은 물론이라 교무실 책상마다 한두 권씩 이 책이 있었다.
분서갱유를 피해 남은 파름문고는 이것뿐이다.
동광출판사의 파름문고를 빼놓을 수가 없다. 일본 문화가 금지되고 저작권 개념도 없던 시절이라, 해적판으로 출간된 만화가 공공연히 유통되던 때였다. 파름문고는 이에 한 술 더 떠, 만화를 소설로 노벨라이즈 하였다. 올훼스의 창, 말괄량이 캔디, 유리 가면도 그 목록 중 하나였다. 일본 인기 만화의 플롯과 대사를 따와 소설로 구성하면서 가상의 작가를 내세웠는데, 이것이 하도 자연스러워 나는 오랫동안 이 쪽이 오히려 원작인 줄 알았다.
아직도 오클라호마에서 살고 계실 거 같은 남녀공학의 저자 ‘윌리엄 스크랜턴’
‘보고 싶은 책이 전자책으로 나와 있지 않아요.’라는 고민을 말하는 사람이 많다. 종이책이 기본이고 전자책은 그 다음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아 출간에 시차가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수험서나 외국어 교재처럼 전자책으로 적합하지 않은 책도 많다. 반대로 전자책이 가장 잘 어울리는 분야라면 역시 소설, 그 중에서도 페이지가 잘 넘어가는 장르소설이다. 전자책 시장에서 로맨스 장르가 강세인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전자책을 만들게 된 후 작은 소망이 있다면 파름문고의 전자책 복간이었다. 그러나 이런 해적 출판의 뒷이야기를 알고 난 이후에는 추억은 뒤로 남겨놓고 오늘을 위한 꿈과 로맨스를 공급하기로 했다. 꼭 모든 책이 양서여야 하는 것일까? 가끔은 그저 재미있기만 해도 충분한 것 아닐까? 아직도 대놓고 읽지 못하는 금서 목록과 길티 플레저에 대한 변명일까, 그냥 뭐 그때는 그랬다고요.
'그래, 난 취했는지도 몰라'라는 변명 아래 책과 전자책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작년부터 알코올 알러지를 앓고 있는데 개가 똥 알러지 같은 소리라는 핀잔만 듣고 있습니다. 고양이 4마리, 개 1마리와 살며 책에 관한 온갖 일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