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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라도 좀 줄이지 그래요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그리 길지 않은 70분 러닝타임에 나는 많이 웃었고 놀랐다. 쫀쫀한 생활 대사, 외면할 수 없는 한국 남성의 술자리 에피소드, 영화와 예술가론 그리고 따뜻하고 큰 마음을 지닌 주인공 여배우의 삶에 대한 태도에 감명받았다. (2017.09.21)
미칠 듯 미쳐지지 않는 현실, 그래서 소리치며 냅다 달려보지만 다시 고단한 삶의 그 자리. 마치 환청처럼 들리던 다정한 남편의 걱정 섞인 목소리, “술이라도 좀 줄이지 그래요”는 내가 꼽을 올해 최고의 영화 대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 뭔가 엉뚱하고 애틋하고 철없는 그 목소리. 힘든가요, 묻더니 하나라도 일을 줄이라던 남편은 “시어머니도 하나 아이도 하나 작품도 하나, 뭘 줄여요”라는 여배우의 말에 그럼 술이라도 줄이라고, 대사 참 애달프다.
문소리의 3부작이라고 할 <여배우는 오늘도>는 ‘여배우’가 아니라 ‘여성’의 이야기다.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의 목소리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여성의 공감이 이루어지는 영화다. <여배우는 오늘도> GV에 초대된 배우 전도연의 발언에 여성 관객들이 환호를 보낸 데는 다 이유가 다 있다. “이 영화는 여자 배우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워킹맘들, 일하는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배우님. 그러합니다, 여성 여러분.
1부의 나이 든 여배우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2부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영화감독의 쓸쓸한 상가에서 벌어지는 예술가 논쟁에서 촉발되어, 3부의 여배우 삶에 스미고 얽혀서 흘러가는데 그 흐름과 문제의식이 매우 소중하고 단단하다. 편집의 묘미도 살아 있어서 플래시백처럼 앞 장면의 다른 버전을 보여주는 신에서는 쾌감이 두 배였다. 디테일한 편집력이 영화를 제대로 살린다. 숏 감각과 장면 전환의 절묘함, 12번 고쳐 썼다는 각본의 치열함도 느껴졌다.
배우 문소리의 연출작이라, 처음엔 영화계에 관한 여성적 시각이 담겨 있겠지 정도의 호기심이었다. 그리 길지 않은 70분 러닝타임에 나는 많이 웃었고 놀랐다. 쫀쫀한 생활 대사, 외면할 수 없는 한국 남성의 술자리 에피소드, 영화와 예술가론 그리고 따뜻하고 큰 마음을 지닌 주인공 여배우의 삶에 대한 태도에 감명받았다. 문소리 배우, 대단하구나. 문소리 감독, 멋지다는 감탄사가 탄식처럼 나왔다.
주인공 여배우는 매니저에게 자꾸 묻는다. “나 이뻐 안 이뻐”를. 응석이 아니라 초조함의 발현이다. “예쁘다”는 말. 여배우가 된 순간부터 그저 좋은 인사말로 수시로 듣던 그 말이 뜸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여배우가 안 예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마는 외모 칭찬의 말이 꺾이는 건 나이 때문이다. 나이 든 여배우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영화적 재능과 지적인 면모, 삶의 경험이 가져다 준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발휘해야 하는데, 도대체 그 나이 든 외모 때문에 실력을 보여줄 작품 제안이 안 들어오는 현실이니, 무슨 수로 여배우로 연기자로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여배우는 한시적 비정규직이었을까, 아니면 천부적 미모가 잠깐 반짝였던 취미 생활의 최고봉이었는가.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현실 인식을 정확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여성의 삶에 대한 풍자와 해학이 뛰어나다는 점에서 높이 기려야 한다. 적어도 여성 담론의 장에서는 공유해야 할 문제적 영화라고 믿는다.
영화 속에서 여배우가 목청 높여 이야기하는 것, “예술을 만들어야 예술가지, 예술 얘기한다고 예술가냐”라는 말을 빗대어 말하자면, <여배우는 오늘도>는 여성 이야기를 해서 여성 영화가 아니라 각본과 연출이 뛰어난 여성 주제의 영화라 박수치는 것. 화려해 보였던, 뭔가 현실의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 않는 듯 보이는 여배우의 민낯이 드러난 삶의 이야기는 ‘여성적 삶’의 보편을 이야기하기엔 매력적인 소재다.
여배우 남편(주인공 문소리의 실제 남편인 장준환 감독이 연기하지만)의 대사는 착한 말처럼 들리지만 얼마나 여배우의 삶에서 먼 이야기란 말인가. 삶의 요소 중 여성이 스스로 ‘줄일’ 수 있는 요소가 없단 말이다.
2막에서 여배우가 ‘얼치기 신인 여배우’와 ‘현실 무감각 남배우’와 논쟁을 벌이다가 그들을 모두 껴안듯 2차 가자며 함께 무덤가를 지나는 장면은 아름다워서 보는 가슴이 서늘했다. 이 여배우는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끌어안고 지향하는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그 세계에 빛이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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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