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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없는 것이 담아낸 관계들
영화 <더 테이블>
<더 테이블>을 보면서 언젠가 사무실 창밖 주차한 자동차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던 기억이 났다. (2017.09.07)
네 명의 여성이 하루 동안 순차적으로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상대는 꽤 오래전 헤어진 남자친구(와 정유미 배우), 이제 막 연애를 시작했으나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연하남(과 정은채 배우), 사기 결혼극에서 엄마 역할을 해줄 중년 여성(과 한예리 배우), 결혼 앞두고 막 헤어진 애인(과 임수정 배우). 이 영화 이야기는 실제 여배우의 이미지를 떠올리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정유미의 오똑한 콧날과 앙다문 입매, 정은채의 짙은 눈썹과 날렵한 턱선, 한예리의 부드럽고 두툼한 편인 눈매와 동그란 콧망울, 임수정의 큰 눈동자와 활짝 올라가는 입꼬리를 그대로 살아 있게 만들었다. 연기한다는 느낌이 지워졌다고나 할까. 촬영 카메라는 그럴 리가 없는데도 붙박여 있는 느낌, 그 정적인 느낌이 꽤나 근사한 작은 영화다. 소품의 장점이 극대화된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을 긴장시키지 않아 편안하다. 이런 영화도 좀 있었으면 싶었던 바로 그것.
입이 없는 테이블이 전면적으로 제목이 된 이유를 잘 알 것 같다. 예를 들어 이 영화 제목이 ‘달콤쌉사름한 인생의 맛’이라든가 ‘남자들은 모른다’라든가 ‘그 여자의 목소리’라든가, 뭔가 삶의 상징적인 은유를 담아낸 것이었다면 이 담백하고 소박한 영화가 이렇게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을 듯하다. 책 만들면서 제목 짓기에 온갖 스펙타클한 경우를 체험한 나로서는 ‘더 테이블’ 사례가 참 좋다는 생각.
하나의 이야기는 20분을 넘지 않는다. 네 편의 이야기가 70분의 영화에 담겼으니,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모든 것을 기승전결 설명할 수 없다. 상대와 주고받는 말도 밀도 높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 묘한 힘이 있다. 배우의 표정과 몸짓, 비언어적인 것이 더 많은 말을 하는 영화라서 테이블에 앉기 전과 후의 이야기를 내 멋대로 재구성할 수 있다. ‘입이 없는’ 테이블 위 잠시 ‘말이 없는’ 여백에 스미는 사랑이랄지 한숨이랄지---.
<더 테이블>을 보면서 언젠가 사무실 창 밖 주차한 자동차를 무심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던 기억이 났다. 내가 어디에 갔었는지, 그 순간들이 즐거웠는지 슬펐는지 가장 완벽하게 아는 사물. 기쁠 때나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했던 자동차. 입이 없어 망정이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차 안에서 종종 울 때도 있었는데, 그 경험을 시로 쓴 적도 있다.
영화 <더 테이블>의 한 장면
“지하 주차장, 신음소리가 들린다./ 방음장치가 완벽한 차창을 뚫고/ 누군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울 수 있는 공간을 갖지 못한 사람,/ 그가 이 깊은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자신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그가 낮게 낮게 시간의 파도 속을 떠다닌다.” 이 시는 “이 차는 이제 옛날의 그 차가 아니라네”란 시행으로 이어진다. 하아, 자동차를 가장 울기 좋은 공간이라고 여겼었다.
사물을 통해 인생을 이야기하는 방식. 가령 테이블에 놓인 음료에서도 이야기 실마리가 풀릴 수 있겠다. 네 편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음료는 에스프레소와 맥주, 커피와 커피, 라떼와 라떼, 커피와 홍차. 두 여성은 헤어진 남자친구, 헤어진 애인과 다른 음료를 마시고 두 여성, 막 시작한 연애남과 뭔가 도모하면서 함께하는 비즈니스 파트너와는 같은 음료를 마신다. 이 사소한 차이가 흥미로운 단서가 되어주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서 어색하고, 마음을 알 수 없어 섭섭하고, 의외의 모습을 발견해서 몰입하고,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없어서 애석한 마음을 <더 테이블>은 담아냈다. 공중으로 흩어질 듯한 말들이 테이블에 사뿐히 내려앉은, 그 마음의 흔적들.
한적한 주택가 한 장소에서 7일간 찍었다는 제작담을 듣고서, 김종관 감독의 문학적인 영화 찍기의 살뜰함에 반했다. 단면을 보여주었지만 한 사람의 삶을 제법 깊이 엿본 느낌이다. 단편소설이 그렇듯이 <더 테이블>도 말하지 않으며 많은 말을 하고 있다. 평범한 말로 인생의 뜨거운 풍경을 보여주는 건 문학이든 영화든 진경이다. 경지에 이른 작품은 우리 모두에게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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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