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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위로하는 밥, 살, 말

한 사람의 속을 어루만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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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라이트>에서 음식은 돌봄과 위로, 사과의 매개다. 케빈은 ‘그 모든 것’을 사과한다. 케빈이 차려준 밥을 먹으며 식탁에 떨어진 콩 하나까지 손으로 주워 먹는 샤이론의 모습에서 케빈의 마음을 알알이 느끼고 싶어하는 심정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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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라이트> 스틸컷

 

가끔은 내가 너무 단순한 인간인가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화가 났다가도 따뜻한 포옹과 맛있는 식사로 기분이 쉽게 풀어져서 세상 만물에 대해 이해심이 높아지고, 부처도 넘볼 정도로 자비로운 인간이 되어 넉넉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포옹, 식사, 대화, 이 모두를 한 사람과 만족스럽게 나눌 수 있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그중 하나라도 즐겁게 나눈다면 고맙게 마련이다.


영화 <문라이트>를 보고 아직도 잔상이 가시지 않아 결국 이렇게 쓴다. 슬픔이 계속 차올라서 조금이라도 터뜨려 흘려보내야 할 것 같다. 샤이론과 케빈이 오랜만에 재회한 그 식당씬 때문이다. 이 장면은 한 요리 잡지에서 ‘최고의 베스트 푸드씬’으로 꼽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평범한 식당에서 요리사인 한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밥을 해주고 한 사람은 먹을 뿐인데.


이 영화는 샤이론이 인간들과 관계 맺으며 ‘나’를 알아가는 과정을 다룬다. 사회적으로는 ‘블랙’이라는 인간, 가정에서는 마약을 하는 엄마의 아들로, 학교에서는 게이라는 놀림을 받는 왕따로 살아가던 소년이 제 안에 이 모든 슬픔을 저장한 채 건강한 몸을 과시하는 어른이 되었다. ‘사고’를 치고 학교를 떠난 이후 만나지 못했던 어릴 적 친구 케빈과의 재회는 그가 잊으려고 했던 그 모든 슬픔을 다시 복기하는 자리다.


샤이론이 사는 애틀랜타에서 케빈이 있는 마이애미까지는 670마일 정도 거리다. (부산에서 평양까지 323마일이다.) 자동차로 쉬지 않고 달린다 해도 꼬박 10시간을 가야 한다. 아침에 출발한 샤이론이 마이애미에 도착했을 때는 검푸른 바다 위로 달이 두둥실 떠 있다. 그 먼 거리를 왔건만 식당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식당으로 들어가기까지의 잠깐은 보는 내가 초 단위로 긴장되었다. 내내 참다가 화장실에 막 도착했을 때 오줌을 거르는 아이처럼.


샤이론이 케빈의 식당에 들어선 순간, 식당은 마치 다른 세계처럼 보인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하고 소리를 내면 극이 시작하고 다시 종소리가 들리면 극이 끝나는 듯하다. 식당에서 서로를 확인한 후, ‘그 손’으로 케빈은 샤이론을 위해 요리를 한다. 샤이론을 처음으로 ‘만져줬던’ 그 손이며, 샤이론에게 주먹을 날렸던 그 손으로, 정성스럽게 ‘셰프 스페셜’을 만들어낸다. 남자가 남자를 위해 요리하는 장면을 그토록 천천히 자세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영화에서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닭고기 위에 라임을 뿌리고, 닭고기가 올려진 접시 위에 하얀 쌀밥을 단정하게 올리고, 검은 콩을 곁들인 뒤 칼로 푸른 고수를 썰어서 밥 위에 흩뿌리는 장면을 천천히 보여준다. 시간이 느리게 간다. 세상에,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울고 있었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하는 그 모습이 일으킨 전율은 한 사람의 속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어서다.


감독이 이 장면을 공들여 찍은 흔적이 역력하다. 이 영화에서 엄마가 밥을 주는 장면은 없다. 엄마는 약을 하고 샤이론에게 오히려 돈을 달라고 한다. 영화에서 음식을 성적 은유로 활용하는 방식은 흔하다. <박하사탕>에서 영호는 차 안에서 (극 중 이름도 없는) ‘미스리’와 정사를 나눈 후 고기를 먹으러 간다. 그때 ‘미스리’는 고기를 집어 주며 “남의 살 좋아하잖아.”라고 말하며 얄궂게 웃는다. <가장 따뜻한 색, 블루>에서도 피크닉 중에 아델은 햄을 뜯어 먹으며 엠마에게 “나는 모든 살을 먹어”라고 한다. 욕정의 대상인 살과 먹는 고기의 동일시다.


<문라이트>에서 음식은 돌봄과 위로, 사과의 매개다. 케빈은 ‘그 모든 것’을 사과한다. 케빈이 차려준 밥을 먹으며 식탁에 떨어진 콩 하나까지 손으로 주워 먹는 샤이론의 모습에서 케빈의 마음을 알알이 느끼고 싶어 하는 심정이 보인다. 누군가를 위해 요리를 한다는 것은 뱃속과 마음속을 모두 어루만져 주는 행위다. 그 어루만짐 덕분에 샤이론은 영화 마지막에 진짜 속마음을 터뜨린다.


샤이론을 돌봐준 테레사나 케빈이 샤이론에게 밥을 주는 장면은 있지만 함께 먹지는 않는다. 대신 옆이나 앞에 앉아서 말을 걸고 있다. 밥을 먹이고 말을 거는 사람. 케빈이라는 인물은 어릴 때도 왕따 당하는 샤이론에게 다가와 말을 건 사람이다. 케빈은 “니가 그리 약한(soft) 사람이 아니라는 걸 그들(너를 괴롭히는)에게 보여줘야지?”라고 했다.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이 ‘보여줌’과 사람의 내면 사이, 그사이에 흐르는 공간만큼 각자의 슬픔이 저장된다.


그런데 ‘soft’는 ‘약한’과 ‘부드러운’의 뜻을 모두 가진다. 약함과 부드러움은 통상적으로 비슷한 의미로 통한다. 물이 부드럽지만 때로는 결코 약하지 않듯이 이 둘은 다른 의미다. 물이 사람을 살리지만 그 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안다. (샤이론이 물만 마신다는 설정은 우연이 아니다)


샤이론의 저장된 슬픔은 ‘흑인/남성’에 대한 사회적 관념과의 괴리 속에서 발생한다. 이 영화를 둘러싼 음악이 주로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리라면, 영화 안에는 합합이 흐르듯이. 사람 안에는 보이는 모습과 다른 또 다른 사람이 있다. 그 안을 더듬고 만져준 인물이 테레사와 케빈이다. 이들은 밥을 해주고 자신들의 집으로 기꺼이 ‘웰컴’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밥을 해주면 고맙지만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만져달라고 함부로 요구할 수 없듯이. 사랑과 정성은 요구할 수 없다. 게다가 말도 안 섞이고, 밥도 안 넣어주는 사람이 살만 섞으려고 한다면 이는 무단 침입이다. 강제 퇴거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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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미케일렌코 Nina Mikhailenko, <해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일상에서 역할 수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문을 거듭하는 태도, 인간의 우울한 마음이 불러들이는 질문이다. 타인에 대한 가장 일상적인 무례와 침범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하기 보다 그를 아는 척하는데 더 공을 들인다는 점이다. “너는 누구니”라는 케빈의 마지막 질문이 결정적 한 방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상대에게 애정이 없으면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대신 ‘너’를 정의한다. ‘너’에 대한 아는 척이란 더 이상 너에 대해 알 필요 없다는 뜻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숱하게 등장하는 진부한 대사, 니가 나를 알아? 하지만 이 진부한 대사가 실은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너 자신을 알라’처럼 인생의 화두다. 대부분, 나 자신을 모르고 너를 아는 척하는 소란함 속에 사느라 지쳐가기 때문이다. 공부에 왕도가 없듯이 사람을 아는 길도 왕도가 없다. 나는 누구인가/너는 누구인가, 여기에서 시작한다.


“글쓰기는 포옹이며, 포옹을 받는 것이다. 모든 사유는 손을 뻗어 내미는 사유다.” (수전 손택) 글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나 아닌 다른 이에게 손을 내밀고 포옹하는 태도를 담고 있다. 종종, 타인을 갉아먹는 글이 횡행한다. 격정을 삼킨 은은한 슬픔 속에서 너는 누구냐고 묻고, 나는 누구인지 알아가는 이 ‘포옹의 영화’가 사무치게 반가워 붙들고 있는 이유다.


영화를 보고 처음 떠올린 언어는 신경림의 ‘갈대’였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아마도 날마다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사람들로 세계는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흐르는 강이 있고 엎어져 울고 싶은 벌판이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 홀로 흐느끼는 이들을 품어주는 따뜻한 밥, 살,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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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라영(예술사회학 연구자)

프랑스에서 예술사회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며 예술과 정치에 대한 글쓰기를 이어가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여자 사람, 여자』(전자책), 『환대받을 권리, 환대할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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