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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척에서 본 세월호 인양작업
‘416 단원고 약전’ 헌정과 동거차도 방문
정부도 믿을 수 없지만 정부의 입맛에 맞는 보도만 하는 언론은 더더욱 믿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유가족들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남쪽 끝에 있는 섬에 올라와 바다를 감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지난 주말, 진도에 다녀왔다. 이렇다 할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단원고 학생 231명의 이야기가 담긴 ‘416 단원고 약전(줄여서 간략하게 쓴 전기)’ 제작에 참여했던 오현주 작가와 올 초부터 ‘416의 목소리’ 팟캐스트를 진행해 온 김탁환 작가가 약전(www.416book.com에서 구입할 수 있다)을 유가족에게 헌정하기 위해 내려간다고 했을 때 문득 ‘따라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뿐이다. 실은 그때까지 나는 약전의 존재도, 내려가서 뭘 하는지도 몰랐다. 뭐가 뭔지 모르는 채로 망망대해의 현장이나마 내 눈으로 직접 봐두고 싶었다.
출발은 금요일 자정. 서울에서 여섯 시간을 달려 팽목항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막 떠오르기 시작한 참이었다. 그곳에 유가족이 상주하는 컨테이너(로 만든) 숙소와 컨테이너 식당과 컨테이너 화장실이 있었다. 우리는 컨테이너 식당에서 컵라면을 먹고 컨테이너 숙소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에 295명의 희생자와 9명의 미수습자를 모신 분향소에서 열두 권의 약전을 헌정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헌정하는 사이에 나는 배편을 알아보느라 선착장에 있었으니 식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오전 9시 50분에 출발하는 배를 타고 향한 곳은 팽목항에서 2시간 30분여가 걸리는 동거차도였다. 대마도와 맹골도 사이에 있는 섬이다. 크기는 여의도의 삼 분의 일가량이 될까. 배에서 내렸을 때는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나칠 정도로 조용해서 며칠간 이곳에 묵으며 책이나 실컷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우리는 서울에서 떠나기 전에 준비한 생수 두 박스와 햇반, 돼지고기, 모기향, 밑반찬을 차에서 내렸다. 이제부터는 이걸 나눠 지고 산으로 올라가야 한다.
코스가 가팔랐던 건 아니다. 나눠 진 짐이 무겁지도 않았다. 그런데 묘하게 힘들었던 건 부담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체력이 달렸던 탓이었을까. 키높이 신발 대신 등산화를 신고 오길 잘했구나 싶었다. 중간에 두 번을 쉬고 헉헉대며 꼭대기에 도착한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돔 형태의 조형물이었다. 임시로 만든 텐트였다. 세 채가 나란히 늘어서 있다. 단원고 학생들의 부모님 두 분이 우리를 반겼다. 아버님과 어머님 들은 반별로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며 이곳 텐트에 묵는다고 한다. 바다를 감시하기 위해서다.
현재 유실방지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의 세월호를 인양하겠다고 정부가 발표했을 때 유가족들이 했던 요구는 단순했다. 인양작업을 보게만 해달라는 것이었다. 인양선에 태워주는 게 어렵다면 작업장 옆 바지선에서나마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볼 수만 있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깨끗이 묵살됐다. 사고 해역 1마일 내로는 접근하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 실제로 위험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뭘 감추려고 그러는 건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으나 지금까지의 수상하기 짝이 없는 흐름으로 볼 때 수수방관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여 2015년 9월 1일 동거차도 뒷산 꼭대기에 텐트가 세워졌다. 처음에는 대충 기둥을 세우고 얼기설기 비닐로 두른 수준이었다. 이후로 동거차도에 들어간 유가족들의 소식이 SNS를 통해 전해졌을 때 마을 공동체 사업을 하는 정진훈 목사와 서울하우징 김영만 대표, 극단 디아코노스 배우들과 성미산 학교 교사 등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면서 지금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은 이곳에서 인양작업 현장을 바라보며 이상한 기미가 있는지 살피는 중이다.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는 필요할 때 녹화를 해두기 위해 설치했다.
그해 4월, ‘전원 구조’라는 속보가 떴을 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가 끝내 304명이 희생되었다는 뉴스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한두 명의 부상도 아니고 삼백 명이 넘는 이들이 바다에 가라앉는 동안 정부와 해경을 뭘 했나.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내용은 의심스러운 것투성이였다. 정부의 세월호 참사 구조 현장을 두고 ‘지상 최대의 작전’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자식 잃은 부모에게 색깔론을 들이댔고 생존 학생들의 특례 입학과 보상금 처리 문제를 연일 부각시켰으며 청문회에서는 밝혀야 하는 사안들을 보도하는 대신 자극적인 뉴스만 내보냈다. 조윤호 기자는 자신의 저서인 『나쁜 뉴스의 나라-우리는 왜 뉴스를 믿지 못하게 되었나』에 이렇게 적었다.
“흔히 사람들은 언론과 미디어가 어떤 뉴스를 생산했느냐를 두고 왈가왈부하지만, 진짜 미디어의 힘은 보도하지 않는 데 있다. 이는 사회 지배 계층에 불리한 이슈는 아예 의제로 만들지 않는 것으로, 정치학에서는 이를 무의사결정이라 부른다. 언론은 이런 묵시적 권력을 가진 대표적 집단이다. 2015년 12월 14일, 세월호 참사 청문회가 열렸다. 참사 이후 1년 8개월 만이었다. 그러나 주요 언론 중 이를 생중계한 언론사는 없었다. 언론은 청문회 내용에서 새롭게 드러난 의혹, 진상규명을 위해 밝혀내야 할 것들에 대해 침묵했다. 그 긴 청문회에서 수많은 언론이 뽑아낸 핵심이라고는 ‘자해’,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정부도 믿을 수 없지만 정부의 입맛에 맞는 보도만 하는 언론은 더더욱 믿을 수 없겠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으리라. 그리하여 유가족들은 직접 카메라를 들고 남쪽 끝에 있는 섬에 올라와 바다를 감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곳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지는, 깊이 구덩이를 파서 만든 간이 화장실과 텐트 이곳저곳에 쌓여 있는 라면과 “식수도 부족한 판에 세수는 무슨, 아침에 일어나면 겨우 이빨을 닦는 정도지”라며 웃는 그들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긴, 힘들지 않을 리가 있나. 나는 고작 하루 동안 못 씻은 것만으로도 내 잘생김의 십 퍼센트가 사라지는 듯하여 고통스러운데.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정작 힘든 것은 불편한 생활 따위가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행위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왜냐면 동거차도에서 세월호 인양작업을 하는 지점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로 가깝기 때문이다. 대략 1.5km 정도란다. 무슨 얘기냐면 세월호가 가라앉은 곳이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때 배에서 빠져나와 물에 떠 있기만 했어도 동거차도에서 늘상 조업하는 낚싯배들이 충분히 구할 수 있었겠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과장을 하려는 게 아니라 수영을 배운 이라면 헤엄쳐 오는 것도 가능하겠다.
생때같은 자식이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죽었으니 진상을 밝혀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왜 비난받을 일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왜 이렇게 조심스러워야 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다. 경제도 어려운 마당에 그 이유를 들춰내 봤자 다들 불편해지니까 덮고 가자는 암묵적 양해 각서 같은 것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사회 곳곳에서 체결된 게 아닌가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동거차도에서 유가족들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고 있는 주민 한 분이 “당연히 도와줘야 할 일이지만 내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지는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곱씹으며 나는 가만히 섬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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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부터 대안 언론까지 조중동부터 JTBC 손석희 뉴스까지 포털과 SNS 시대에 다시 뉴스의 정의를 묻다 우리는 힘없고 백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삶을 다른 대중에게 비춰 줌으로써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밝히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라 믿어 왔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발생한 사건과 사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