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거기, 내가 가면 안 돼요?
생일 선물
생일을 맞은 채령
형만은 곽 씨에게 애정은 인색한 대신 선물은 풍족하게 해 주었다. 화려한 자개장롱 안에는 철철이 새로 지은 고급 옷들이 가득했고 보석함에는 금붙이와 패물이 넘쳐흘렀다. 유성기는 진즉에 사 주었고 얼마 전 경성방송국이 개국하자 쌀 열 가마 값에 달하는 라디오도 들여놔 주었다.
채령은 거울을 보았다. 유모가 머리를 바짝 당겨 땋아 눈꼬리가 더 치켜 올라갔다. 자신의 작품에 흐뭇해하는 유모 술이네의 얼굴이 어깨너머로 보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짜증을 냈을 텐데 지금은 새 옷에 홀려 있었다.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일본인이 운영하는 진고개 양품점에 특별히 주문해서 사 온 것이었다. 자잘한 레이스로 마무리한 흰 옷깃을 덧댄 감색 원피스와 흰색 반 타이츠는 잘 어울렸다. 채령은 빨간색 작은 가방을 가로 멘 자기 모습이 여덟 살짜리 꼬맹이가 아니라 종로 거리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여학생으로 보였다. 이대로 검정 에나멜 구두를 신고 별채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마지막 절차가 남아 있었다.
“어여 어머니한티 가 보셔유.”
술이네가 채령의 어깨를 잡아 문 쪽으로 돌려세웠다.
“안 가면 안 돼?”
“또 불벼락 맞고 싶은개 벼유.”
술이네가 방문을 열자 장송곡처럼 처량한 노랫소리가 커졌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적막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곽 씨가 끼고 사는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였다. 응접실로 꾸민 마루에는 얼마 전 형만이 채령의 보통학교 입학 선물로 들여놓은 피아노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뻐꾸기가 튀어나와 아홉 번을 울었다. 아버지가 출발한다고 한 시각이었다. 마음이 급해진 채령은 통통통 뛰어 안방 미닫이 앞에 섰다. 그러곤 마음을 다잡듯 심호흡 한 뒤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들어가요.”
방문을 연 채령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방 안에 가득 찬 담배 연기 때문이었다. 비대한 몸집의 곽 씨가 비단 보료에 비스듬히 누워 긴 담뱃대를 문 채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산후병을 다스리느라 먹어 댄 온갖 보약이 임신 중의 부종을 살로 만들었고 그 이후에도 곽 씨는 계속 몸의 부피를 늘리고 있었다. 살이 빠지는 특효약이라는 귀띔에 피우기 시작한 담배는 이제 곽 씨에게 없어서는 안 될 벗이 됐다.
채령은 안으로 들어가 어머니 앞에 섰다. 곽 씨는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딸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어때요?”
채령이 숙제 검사 받듯 원피스 자락을 살짝 치켜들고 팽그르르 돌았다. 치마가 나팔꽃처럼 펼쳐졌다. 채령을 훑어보는 곽 씨 얼굴에 순간 질투의 빛이 스쳐 갔다.
‘저 아인 지금 내 남편과 나들이를 하려는 것이다.’
채령이 대여섯 살 되면서부터 형만은 틈날 때마다 딸을 대동하고 연주회다 전람회다 드라이브다 하며 돌아다녔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으면 형만이 홀아비인 줄 알았을 것이다. 형만이 딸만 데리고 다닐수록 가회동 저택의 안방마님에 대한 소문은 점점 더 부풀어 이젠 창경원에 있는 하마나 코끼리에 비견되곤 했다. 좋은 소문은 걸어가고 나쁜 소문은 날아가는 법이어서 곽 씨의 뚱뚱한 몸이 보료 바닥에 눌어붙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곽 씨는 대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사람들이 수군거리며 돌아보는 통에 외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리고 형만뿐 아니라 어린 딸에게도 점점 심사가 꼬여 갔다. 곽 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채령이 안채의 소속임을 부녀에게 주지시키는 것뿐이었다. 딸을 단속하는 곽 씨의 태도에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가혹함이 있었다.
채령은 채점한 시험지를 돌려받기 위해 선생님 앞에 선 것처럼 긴장한 표정으로 어머니의 한마디를 기다렸다. 곽 씨는 채령이 가회동 저택을 통틀어 무서워하는 오직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앞에 서면 채령은 늘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도 곽 씨는 입을 다문 채 채령을 벌세우고 있었다.
‘너는 아침 이슬을 머금은 청보랏빛 나팔꽃처럼 나날이 싱그러워지는데 널 낳은 나는 속절없이 방에 갇힌 중늙은이가 돼 가고 있구나.’
곽 씨가 감사나운 눈길로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 채령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치맛자락을 비비적거렸다.
“눈꼬리가 쪽 찢어진 게 암괭이 같네.”
곽 씨는 자기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사의 찬미>가 화를 돋운 탓도 있었다. 노래를 부른 가수 윤심덕은 지난해 가정 있는 남자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빠져 동반자살 했다. 그들의 불륜은 낭만적이면서도 애절한 정사(情死)로 미화됐고 윤심덕의 음반은 불티나게 팔렸다. 음반을 사와 안채에 들여보낸 사람은 형만이었다. 유행하는 음반이니 사 보낸 것이겠지만 기분에 따라 노래는 곽 씨의 속을 뒤집었다 젖혔다 했다. 어머니의 심통 사나운 말에 채령은 울상이 됐다.
“술이네한테 다시 땋아 달랄까요?”
“뭘, 니 아버지 기다릴 텐데 나가 봐. 매사에 조신하게 굴고.”
곽 씨는 담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하얀 연기를 토해 냈다.
나부시 인사하고 돌아선 채령은 곽 씨가 다시 부를까 겁난다는 듯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뒷모습을 바라보는 곽 씨의 얼굴에 후회와 서운함, 씁쓸함이 연기처럼 어지러이 섞였다.
형만은 곽 씨에게 애정은 인색한 대신 선물은 풍족하게 해 주었다. 화려한 자개장롱 안에는 철철이 새로 지은 고급 옷들이 가득했고 보석함에는 금붙이와 패물이 넘쳐흘렀다. 유성기는 진즉에 사 주었고 얼마 전 경성방송국이 개국하자 쌀 열 가마 값에 달하는 라디오도 들여놔 주었다. 유리 분합문을 해 단 안채 마루에는 양탄자가 깔리고 응접세트가 놓였다. 새로 들여놓은 피아노가 응접실의 격을 높여 주었다. 그것으로 형만은 아내에게 보상해 주겠다고 한 결심을 지켰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다 두고 갈 저런 물건들이 무슨 소용이야.”
헛헛한 곽 씨의 마음은 조금도 채워지지 않았다. 정성으로 키운 강휘는 사랑채로 옮겨 간 뒤 자신의 치마폭을 벗어났다.
배 아파 낳은 채령도 온전히 자기 것은 아니었다. 늘어나는 몸의 부피만큼 내부의 빈 굴도 넓어져 갔다.
곽 씨는 <사의 찬미>를 들을 때마다 강휘의 생모 최인애가 떠올랐다. 김우진과 윤심덕처럼 두 연놈도 함께 죽기로 약속한 게 아니었을까? 그래 놓고 제 몸은 끔찍하게 위하는 형만이 뒤를 따르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한번 그렇게 생각하니 사실인 것만 같았다. 곽 씨는 상상력을 보태 오래전 상처를 헤집으며 그 고통을 즐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곽 씨가 머리를 쓸 때라곤 그럴 때뿐이었다.
곽 씨의 하루는 그날그날 당기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맛난 것을 해 먹으며 노는 게 다였다. 친정 쪽 일가붙이, 진기한 박래품을 갖고 다니는 방물장수, 장안의 풍문을 모아 들려주는 이야기꾼, 좋은 일보다 나쁜 일을, 앞날보다 지난날을 더 잘 맞히는 점쟁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곽 씨는 곳간 열쇠만 쥐고 있을 뿐 안살림은 유모로서의 역할이 줄어든 술이네가 도맡아 했다. 그 일을 성심으로 하던 박 서방댁은 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방을 나온 채령은 마루 아래 서 있는 유모를 보자 시무룩한 기색을 지웠다. 아랫사람에게 속내를 그대로 보여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서였다.
“마님이 뭐라셔요? 이쁘다지유?”
술이네가 댓돌 위에 구두를 신기 좋게 놓아 주며 물었다. 잠깐 망설이던 채령이 대답했다.
“응, 고양이처럼 예쁘대.”
채령은 술이네가 더 물어볼까 봐 재빨리 섬돌에서 내려와 별채 쪽으로 달려갔다.
“아이고, 넘어질라. 살살 뛰셔유.”
채령의 뒤에 대고 소리친 술이네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님도 참, 숭허게 괭이라니. 좋은 말도 많이 있구먼.”
채령을 키우며 술이네는 아이를 두고 곽 씨와 벌이는 신경전을 은근히 즐겼다.
술이네는 태어나자마자부터 젖을 물려 키운 채령이 가끔씩 자기 딸인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낳는 일로 어미로서의 기력을 다 써 버렸는지 곽 씨에게선 젖이 나오지 않았고, 채령은 우유병 꼭지를 빨지 않았다. 술이네가 악을 쓰며 울어 대는 채령을 안자 젖 냄새를 맡은 아기는 본능적으로 품을 파고들었다. 졸라맨 치마허리에 갇혀 있던 젖가슴을 꺼내 놓기 무섭게 채령은 맹렬하게 젖꼭지를 빨아 댔다. 귀를 먹먹하게 하던 울음소리 대신 꼴깍꼴깍 젖 넘기는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아비 얼굴엔 드디어 아이가 살게 됐다는 안도의 표정이 번졌지만 어미 얼굴엔 안도감과 더불어 서운한 빛이 드리웠다.
형만과 곽 씨는 술이네의 막내아들이 고향으로 갔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아들에겐 아무 관심도 없었다. 술이네는 돌아앉아 젖을 먹이는 내내 철철 흐르는 눈물을 주인 모르게 닦아 내야 했다. 자작의 딸이 마치 자기 아이의 목숨을 제물로 삼아 태어난 것 같았다. 술이네는 그런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처지에 대한 한탄과 더불어 자기에게 목숨을 의지한 작은 생명에게 지독한 애정을 느꼈다. 그 뒤 채령에게 젖을 먹일 때마다 술이네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맛보아야 했다.
술이네가 채령의 유모가 될 수 있었던 건 자식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마르지 않은 젖 때문이 아니라 곰보인 덕분이었다. 얼굴이 얽지 않았다면 곽 씨는 서른도 안 된 술이네를 유모로 삼자는 형만의 말을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안채와 별채 사이에 난 쪽문을 지나는 순간 딴사람이 된 듯 채령의 얼굴이 환해졌다. 별채의 풍경 역시 딴 세상인 듯 달라졌다. 형만은 딸의 백일이 지나자 서둘러 아버지가 지었던 별채를 허물고 양식, 일식, 조선식이 혼합된 새 건물을 올렸다.
2층으로 올린건물의 전체적인 외관은 양식이었으나 박공지붕에 조선기와를 얹어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꾀했다. 하지만 조선기와집들로 이루어진 동네에서 2층 건물은 키 크고 눈 파란 이양인이 갓 쓴 것처럼 무척 튀었다. 어쨌거나 별채는 북촌의 명물이 됐다. 형만은 우뚝 솟아 경성을 발아래 둔 별채가 마음에 들었다.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십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장미 넝쿨로 감싸인 아치형 포치가 있었다. 포치 기둥에는 ‘무극광업’이라는 세로 현판이 걸려 있었다. 별채는 본사였고 실질적인 사무소는 금을 캐는 현장에 있었다. 채령은 별채 건물 앞까지 드문드문 놓인 넓적한 돌판을 폴짝폴짝 뛰어 건넜다. 연못에서 비단잉어가 물살을 만들었다. 연못 가운데 만들어진 작은 섬에는 운치를 더하는 등 굽은 소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
형만은 집 꾸미는 일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안채와 사랑채도 몇 번이나 수리를 했으며 가구도 유행 따라 바꾸었다. 사람들은 박색인 여자가 화장이나 옷, 패물로 용모를 감추려는 것처럼 형만이 근본 없는 가문을 가리기 위해 대를 이어 애쓴다고 비웃었다.
별채 건물은 형만의 미적 감각, 허영심, 과시욕이 표출된 곳이자 동시에 불안감이 응집된 공간이었다. 형만은 애초, 전통 주택보다 낯설고 복잡하며 비밀 공간을 많이 둔 별채를 살림집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별채는 흙과 나무가 기본 골조인 안채나 사랑채보다 튼튼하고, 내부 구조가 복잡해 한밤중 도적이나 독립군이 들이닥쳤을 때 숨기 쉬웠다. 하지만 곽 씨는 화려하지만 위압감을 주는 내부 장식이나, 침실과 식당을 오가려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변소가 집 안에 있어 께름칙했고 구조가 복잡해 제 집에서 길을 잃게 생겨 먹었다. 무엇보다 곽 씨는 자기가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는 안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형만은 강휘에게 사랑채를 물려주고 자신은 별채 2층으로 옮겼다. 별채에선 한 달이 멀다 하고 여러 명목으로 연회가 벌어졌다. 때로는 정원에서 가든파티를 열기도 했다. 화려한 연회에 한 번이라도 참석한 사람들은 윤형만 자작의 건재를 인정했고 다음 파티에도 초청자 명단에 낄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게 형만이 연회를 여는 가장 큰 목적이었다.
별채 앞에는 이미 형만이 나와 있었다. 차도 대기 중이었다.
채령은 오랜만에 만나는 양 한달음에 달려가 아버지 품에 안겼다. 조끼 주머니에 드리워진 회중시계 줄이 뺨에 닿았다. 그 감촉마저 좋았다.
“이리 이쁜 공주님은 누구 딸인가?”
형만이 채령을 번쩍 안아 올리며 물었다. 진심으로 눈부셔하는 표정이었다.
“글쎄, 누군가? 저어기 왕 서방 딸인가?”
채령의 능청스러운 말에 운전기사와 박 서방, 배웅 나온 술이네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뭐라고? 에잇.”
형만이 채령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채령이 캑캑거리다 항복했다.
“숨 막혀요. 윤형만 자작님 복덩이 채령이에요.”
딸이 바동거리는 게 재미있다는 듯 형만은 좀 더 장난을 치다가 내려놓았다. 채령이 안방에서 한 것처럼 다시 팽그르르 돌았다.
“아버지, 나 어때요?”
형만이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그러곤 양팔을 벌리며 자신의 매무새를 내보였다.
“아버지도.”
채령도 엄지손가락을 척 내밀었다.
아버지는 언제 봐도 멋쟁이였다. 오늘도 회색 양복과 중절모가 잘 어울렸다. 채령은 친구들의 젊은 아버지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자기 아버지가 훨씬 더 근사해 보였다. 아버지 곁에 있으면 겁나는 것도 무서운 것도 없었다.
“자, 타자.”
형만이 채령을 뒷좌석에 앉히곤 자신도 탔다. 운전기사 옆에 박 서방이 앉았다. 아내가 부인병으로 저세상 사람이 된 뒤 급작스레 늙은 박 서방은 두 살 어린 형만보다 20년은 더 나이 들어 보였다.
“아버지랑 둘만 가는 게 아니었어요?”
채령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얼마 전 형만은 새 자동차를 구입했다. 그만한 차를 타는 사람들은 손수 운전하는 법이 없었지만 형만은 일찍이 강습소까지 다니며 면허를 땄다. 일각에서는 근본 없는 피가 흘러 그렇다고들 수군거렸다. 남들이 뭐라건 형만은 운전을 즐겨, 종종 혼자 또는 채령을 태우고 청량리나 노량진까지 드라이브를 가곤 했다.
“오늘은 좀 멀리 간단다. 여주 소작지에 갈 거야.”
“정말요? 오빠 대신 제가 가는 거예요?”
채령의 눈이 기대로 반짝거렸다.
강휘가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아들을 대하는 형만의 태도는 표 나게 달라졌다. 윤병준 자작은 모든 것을 틀어쥔 채 아들에게는 기생을 끼고 놀 만큼의 권한만 허락했다. 그런 아버지와 달리 형만은 강휘에게 일찍부터 후계자 훈련을 시킬 계획이었다. 형만은 때가 되면 아들이 밟고 지나갈 수 있도록 디딤돌이 돼 주어야 하는 존재가 아비라고 생각했고,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후원할 준비가 돼 있었다.
첫 번째로 강휘의 고등보통학교 합격 파티를 열어 주었다. 형만이 유난 떤다는 뒷소리를 들으면서도 파티를 연 데는 의도가 있었다. 미리 선배나 동기들과의 자리를 마련해 숫기도 사교성도 없는 아들의 학교생활을 도우려는 뜻도 있었지만, 강휘가 가회동 저택의 유일무이한 후계자임을 세간에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더 컸다.
두 번째는 무극광업 현장 사무소로의 동행이었다. 형만의 유일한 아들이었으므로 곽 씨조차 당연하게 여겼다. 하지만 채령은 서운함을 느꼈다. 어려서 명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진짜 중요하고 좋은 건 오빠하고만 나눈다는 느낌이 강했다. 인절미로 치면 떡은 오빠에게 주고 자신에겐 남은 고물을 주는 것 같다고 할까. 고물이 떡보다 더 맛있어서 큰 불만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소작지에 데려간다고 하자 그냥 나들이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오빠 대신이 아니라 거기에 네 생일 선물이 있으니 네가 가야지.”
“생일 선물요? 이 옷 사 주셨잖아요.”
뿐만 아니라 형만은 채령의 반 아이들 모두에게 입에서 사르르 녹는 카스텔라와 달콤하면서도 입에 짝짝 붙는 칼피스를 돌렸다.
“고작 그걸로 끝낼 수는 없지. 진짜 생일 선물은 따로 있으니 기대하려무나.”
채령을 흡족하게 할 자신이 있다는 듯 형만이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아버지!”
채령은 형만의 목을 끌어안고 뺨을 비볐다. 채령은 아버지의 까칠까칠한 턱의 감촉과 산뜻한 로션 향기를 좋아했다. 이렇게 멋진 아버지가 어째서 남산만 한 몸집을 한 채 방에서만 뒹구는 어머니 같은 여자와 결혼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오빠와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차별은 아무래도 어머니 탓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안채에 옷과 패물과 신식 물건들을 철철이 들여보내는데 어머니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아버지를 미워하고 욕했다. 아버지도 그런 어머니가 고울 리 없을 테고, 그런 사람 자식에게 모든 걸 주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채령도 강휘의 어머니가 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채령은 첩을 젊고 예쁜 여자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니 아버지가 더 좋아한 사람은 분명 자기 어머니가 아닌 오빠의 어머니였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자식에게 더 잘해 주고 싶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곽 씨조차 친딸인 자기보다 강휘를 더 좋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친구를 집에 데려오지 않을 정도로 곽 씨가 창피한 채령은 자기 생모도 아리따운 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다면 곽 씨가 자신을 미워하는 것도, 자신이 곽 씨를 창피해하는 것도 조금은 덜 슬프고 덜 미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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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최고의 아동청소년문학 작가’로 꼽히는 이금이는 1984년 ‘새벗문학상’에 동화가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이후, 30여 년 동안 진한 휴머니티가 담긴 감동적인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소천아동문학상과 윤석중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초등학교와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여러 편의 작품이 실리기도 한 그는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나이를 초월하여 폭넓은 독자층을 가지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이다. 대표작으로 『너도 하늘말나리야』, 『밤티 마을 큰돌이네 집』, 『유진과 유진』, 『사료를 드립니다』, 『청춘기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