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언어
내가 기억하는 건 할아버지와 나눴던 마지막 악수, 그리고 그안에 꼬깃꼬깃 접혀져 있던 만원짜리의 온기.
"할아버지의 포옹은 힘차고 친근했다. 나는 알았다. 이것이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할아버지의 언어라는 걸." - 게일 포먼의 『네가 있어준다면』(59쪽)
2008년 6월 19일 새벽,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내 나이 스물둘. 가족의 장례식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장례식 장에 무엇을 입고 가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검은색 옷이면 된다는 엄마의 말에 철없이 후줄근한 티셔츠에 어두운 청바지를 선택했다. 지금 생각하면 할아버지를 찾아 뵙는 마지막 자리에 티셔츠는 너무했지 생각한다.
장례식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모두가 호상이라고 했다. 염을 하는 의식에서 마주한 할아버지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입가에 조용한 미소를 짓고 계셨던 것도 같고. 철부지 손녀는 그 평온한 얼굴을 보며, 할아버지가 편안히 주무시다 하늘나라로 가셨을거라고 감히 추측해 본다.
그 해 장례식으로부터 불과 두 달 전. 주말을 짬내 할아버지 댁에 방문한 손녀는 오랜만에 온 손녀를 반갑게 맞아주기는 커녕 기력이 없으신지 대부분의 시간을 이부자리 위에 누워만 있는, 그런 할아버지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채 한 시간여가 흘렀을까. 할아버지는 빨리 집에 가자며,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끄는 손녀의 발길을 잡아 세운다. 왜 벌써 가냐는 서운함과 함께, 조심히 가라는 또 언제 오냐는 물음과 함께, 허리춤에 차고 있던 쌈지주머니 속 꼬깃꼬깃한 만원짜리를 건넨다. 손녀는 할아버지 용돈을 챙겨드려야 할 나이에 되레 용돈을 받는걸 머쩍어 한다.
할아버지 영정사진 앞에선 스물 둘 손녀는 두 달 전 할아버지가 자기 손에 쥐어 주었던 만원짜리의 행방에 대해 한참을 고민한다. 그 돈이 친구들과 회포를 풀러간 맥주집에서 술값으로 지불되었을지, 집에 가는 길에 들른 편의점에서 요깃거리를 사는데 써 버렸을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스치듯 "그때 주신 용돈 감사히 잘 썼습니다. 할아버지"라는 흐릿한 인사라도 남기기 위해. 만약 그 돈이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준 용돈이란 걸 알았다면 손녀는 조금 더 소중한 쓰임을 찾았을텐데 말이다.
생각해 보면 먼저 할아버지에게 안부전화를 건넨적도 없을 만큼 나는 무뚝뚝한 손녀었고, 마지막 만남에서까지도 할아버지에게 다정한 말 한 마디 붙이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이대로 이별하기에는 많이 아쉬웠던 그 순간, 난 그렇게 한참을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죄송함과 불편한 마음을 꾹꾹 눌러 삼켰다.
세상에 호상(好喪)은 없다던 한 시인의 말은 맞다. 큰 어른이 떠난 자리의 공허함은 크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벌써 7-8년이 흘렀다. 변한 건 증조 할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증손자와 증손녀가 늘어 집안이 시끌벅적 해졌다는 것. 여전한 건 할아버지가 즐겨 드셨던 국물이 자박한 불고기 전골은 언제나 명절상 한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
이번 설 명절에도 할머니는 홀로 외롭게 큰 방을 지키고 계셨고, 술 한 잔 거하게 걸치신 큰 아버지와 아버지는 5~6년째 똑같은 레퍼토리를 반복하셨다. "어머니~ 저 아부지가 꿈에 나왔다니까요. 로또 번호 알려달라고 하니까. 한 마디 하셨어요. 국영수나 열심히 해 이놈아라고."
내가 <솔직히 말해서> 코너에 할아버지 이야기를 쓰게 된 건. 최근 문중(門中)에서 할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들의 묘를 파고, 그 자리에 넓고 깨끗한 문중 납골당을 짓는 일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2주전 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뵈러 가자는 아버지의 요청을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한 작은 죄책감 때문일지도.
혹은 다음주 토요일에 팔순을 맞이한 외할머니에게 용돈을 얼마 드리는게 적당할지 생각하다가 불현듯 할아버지에 받았던 만원짜리의 온기가 그리워져서 일수도 있다.
서른살이라는 이젠 다 컸다는 어쭙잖은 핑계로 또 다시 밥만 먹고, 나름의 성의를 보인 용돈 봉투를 던지듯 건네고 사라지는 무뚝뚝한 손녀가 되지는 않겠다고 다짐한다. 이번에도 외할머니는 가족들과 떨어져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에서 혼자 사는 손녀딸에게 본인이 손수 만든 정성스런 반찬을 싸 주시겠지. 이번에는 "냄새 난다"는 "너무 많다"는 거절 대신 바리바리 싸들고 와 맛있게 싹싹 비우리라. 할아버지에게 눈깔사탕이며, 쌈짓돈이며, 무언가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소소한 행운이었는지를 생각하면서.
게일포먼의 『네가 있어준다면』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퍼블리셔스 위클리〉 ‘2009 올해의 책’, 아마존 ‘2009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린다. 죽음을 다루지만, 그 속의 인물과 삶 들은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그 힘이 눈물 속에서도 웃을 수 있게 한다.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에 있다 해도, 소소하지만 가슴 뭉클했던 일상이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은 얼마나 경이로운지 보여준다.
추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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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있어준다면
게일 포먼 저/권상미 역 | 문학동네 | 원제 : If I Stay
소설 『네가 있어준다면』은 죽음을 다루지만, 그 속의 인물과 삶 들은 건강하고 생명력이 넘친다. 그 힘이 눈물 속에서도 웃을 수 있게 한다. 아무리 고통스런 상황에 있다 해도, 소소하지만 가슴 뭉클했던 일상이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힘은 얼마나 경이로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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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의 폭에 따라 삶의 질이 좌우된다고 믿는다.
감동한다는 건 곧, 내가 잘 살고 있다는 증거다.
아이스타일24 웹진 <스냅> 기자.
<게일 포먼> 저/<권상미> 역11,7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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