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를 맞는 쾌감이 있는 작품, 연극 <취미의 방>
연극 <취미의 방>은 얄미울 만큼 능수능란하게 관객을 주무르는 작품이다. 그러나 기꺼이 빨려 들어갈 준비만 되어 있다면 재미는 보장한다.
진실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야기는 짐작도 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간다.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연극 <취미의 방>은 농락당하는 즐거움이 있는 작품이다. 하나의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드디어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군’ 하고 방심하려는 찰나, 돌연 방향을 틀어 새로운 사건을 펼쳐놓는다. ‘어라, 이게 중심사건이 아니었어?’ 싶은 당혹감에 빠지는 것도 잠시일 뿐, 숨 가쁘게 몰아치는 이야기는 어안이 벙벙할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중심사건이 대체되는 동안 관객은 계속해서 새로운 진실 게임과 마주한다. 많은 경우 진실은 가려져 있고, 때로 진실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된다. 그야말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것.
작품은 뻔한 예상 따위는 우습게 뛰어넘는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관객을 몰고 간다. 휩쓸리듯 이야기를 따라갔던 관객은 극장을 나서며 눈과 귀를 의심한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뒤이어 드는 생각은 ‘보기 좋게 속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찝찝함이 아닌 개운함이 남는다. 뒤통수를 제대로 가격 당했을 때의 짜릿함은 미스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니까.
‘취미의 방’에 모인 네 남자의 동기는 더없이 순수하다. 어디에도 방해 받지 않고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을 공유하는 것. 내과의사인 ‘아마노’는 악어, 캥거루, 에뮤의 알 같은 독특한 재료를 가지고 요리하는 것이 취미다. 의학교수인 ‘가네다’는 건담 마니아로 피규어를 수집하고, 자동차 세일즈맨인 ‘미즈사와’는 고서 초판 수집가다. 화장품 회사원인 ‘도이’만이 자신을 매료시킬 취미를 찾지 못한 상태다. 그는 컵라면 뚜껑을 모으거나 귤 껍질을 가지고 예술작품을 만드는 등 취미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그들은 공간뿐 아니라 서로의 취미를 공유한다. 오늘 ‘아마노’가 요리하는 음식의 재료는 무엇인지, ‘가네다’는 어떤 색으로 피규어를 채색할 것인지, ‘미즈사와’가 손에 넣은 고서는 무엇인지, 1000 피스 퍼즐 맞추기에 한창인 ‘도이’는 새로운 취미를 찾게 될지, 서로를 살피며 ‘따로 또 같이’ 취미를 즐긴다. 네 사람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다른 이의 취미를 평가하지 않는다. ‘취미의 방’에서는 재능이나 생산성이라는 말로 결과를 측정하지 않는다. 악어 고기로 수프를 만들고, 건담의 스토리를 줄줄 외우고, 오래된 책의 냄새를 맡는 일이 무슨 쓸모가 있겠냐만은, 그 쓸모 없음이 주는 ‘순수한 몰입의 즐거움’이 숨통을 트여줄 때가 있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어떤 시선에도 간섭 받지 않고 오직 나만을 위한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는 곳, 네 남자에게 ‘취미의 방’은 진정한 의미의 안식처다. 이곳을 지켜내기 위해 그들은 세 가지의 규칙을 세워 지켜나간다. ‘취미의 방’의 존재를 발설하지 말 것, 서로의 사생활을 궁금해 하지 말 것, 여자를 데리고 오지 말 것. 견고하던 이 규칙들은 ‘미카’라는 인물의 등장으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취미의 방’의 멤버였던 기노시타가 실종되었다며 수사를 빌미로 찾아온 여경 ‘미카’는 주인공들을 상대로 심문을 시작하고, ‘취미의 방’을 수상한 공간으로 여겨 실체를 밝혀내려 한다.
‘기노시타 실종 사건’의 진실 찾기로 방향을 튼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는 폭로로 이어진다. 네 명의 주인공은 용의선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로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되고, 각자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취미의 방’에 모이게 된 진짜 이유가 차츰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다. 진실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야기는 짐작도 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간다. ‘미카’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전혀 다른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테니,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미스터리 코미디 드라마, 모두 담았다
이미 2014년 초연을 통해 관객들로부터 그 재미를 검증 받은 연극 <취미의 방>은 오는 2월 21일까지 대학로 쁘띠첼씨어터에서 앵콜 공연을 이어간다. 연극 <키사라기 미키짱>의 작가이자 영화 <기생수>의 각본가인 ‘코사와 료타’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일본에서 첫 선을 보일 당시에 도쿄, 후쿠오카, 나고야, 삿포로까지 전 공연 매진사례를 기록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김재한 연출의 감각이 더해져 ‘명품 미스터리 추리 코미디’로 탄생했다. 김재한 연출가는 故김광석의 노래로 구성한 음악극 <바람이 불어오는 곳>의 초연과 창작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작ㆍ연출을 맡은 바 있다.
‘아마노’ 역의 김진수와 서범석, ‘미즈사와’ 역의 김늘메, ‘가네다’ 역의 최진석은 초연에 이어 다시 한 번 무대에 오르고, TV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친숙한 배우들도 새롭게 합류했다. 배우 유태웅은 또 한 명의 ‘아마노’로 트리플 캐스팅되었으며, 정희태와 지일주는 각각 ‘미즈사와’와 ‘도이’로 연기 변신을 꾀한다. 이밖에도 배우 맹상열은 최진석과 함께 ‘가네다’를, 배우 주민진과 안재영은 지일주와 함께 ‘도이’를 연기한다. 유일한 홍일점 ‘미카’ 역에는 배우 송유현과 백은혜가 더블 캐스팅됐다.
연극 <취미의 방>에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들과 핑퐁처럼 쉴 틈 없이 오가는 대사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빠른 호흡을 자랑하는 작품인 만큼 잠시도 한 눈 팔 새가 없다. 몰아치는 이야기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독특한 매력으로 무장한 인물들과 재기 발랄한 대사가 쉼표 같은 웃음을 선사한다. 분명 <취미의 방>은 얄미울 만큼 능수능란하게 관객을 주무르는 작품이지만, 그 속으로 기꺼이 따라 들어갈 준비만 되어 있다면 재미는 보장한다. 미스터리 추리극만이 줄 수 있는 쾌감, 코미디가 안겨주는 개운한 웃음, 드라마 특유의 진한 여운까지 모두 담았다.
[추천 기사]
- 특별한 능력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 당신 역시 이럴 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 뮤지컬 <머더 발라드>
- 마당놀이의 맛을 담았다, 마당놀이 <춘향이 온다>
- 리어왕이 되려는 남자, 공개적 살인을 꿈꾸다 - 연극 〈수상한 수업>
- 그림 밖에 몰랐던 비운의 천재 -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