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내 인생의 클래식 101
후아킨 로드리고(1901~1999)의 음악을 들을 때는 눈을 감아보기 바랍니다. 음악이 더 깊숙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제 개인의 경험적인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제 경우에는 그렇다는 뜻입니다. 주변의 사물을 시각적으로 인식하면서 음악을 들을 때와, 눈을 감고 음악소리에만 집중했을 때 생겨나는 감각적 경험에는 차이가 나는 경우들이 왕왕 있습니다. ‘소리’라는 객관적 대상에는 변화가 없어도 음악을 듣는 주체의 감각적 필터링에 일정한 변화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적어도 음악의 절반쯤은 경험으로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한 곡의 음악을 들을 당시의 마음 상태, 주변의 상황과 여건 등에 따라서, 심지어는 조명 상태에 따라서도, 또 혼자 듣는가 누군가와 함께 듣는가에 따라서도 음악은 조금씩 달리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음악 청취의 경험과 소감을 서로 나누는 것, 다시 말해 ‘나는 이렇게 들었다’고 피차의 느낌을 피력하는 행위는 음악듣기를 더욱 풍요롭게 만듭니다.
눈을 감고 들었을 때 더욱 가슴으로 다가오는 음악. 특히나 오늘 이 지면에서 거론하려는 로드리고의 음악은 더욱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스페인 태생의 이 작곡가가 어린 시절부터 시각장애를 지녔던 것을 떠올리면서, 그 사실과 음악의 연관성을 일부러 강조하려는 일종의 ‘스토리텔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험 삼아서라도 눈을 감은 채 음악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프랑스 파리 유학 시절에 그의 이름을 알린 초기작 <멀리서 들려오는 사라방드>, 아내였던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캄히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낸 가곡 ‘아내의 노래’, 20세기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기타 협주곡으로 손꼽히는 <아랑훼즈 협주곡>, 또 그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현대음악적 스타일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는 말년의 관현악곡 <저 너머의 존재를 찾아서> 등등, 로드리고의 음악에는 눈을 감아야 더욱 선연하게 다가오는 음악적 패시지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약음부의 선율과 음향이 그렇습니다.
말했다시피 로드리고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스페인 발렌시아 주의 사군토에서 1901년 태어났는데, 네 살 때였던 1905년에 가족이 주도(州都)인 발레시아로 이주합니다. 바로 그해에 디프테리아에 걸려 후유증으로 실명하고 맙니다. 그의 시각적 경험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최소한 그때까지는 볼 수 있었다는 점이지요. 적어도 시각적 상상의 근거를 마련할 수는 있었으니까요. 이후의 그는 평생 동안 장애를 지닌 채 살아야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장애를 마치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 말은 그저 관념적 수사에 불과하지요. 장애는 극복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심각한 불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는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최대한 불편하지 않도록 보살펴야 하는 것이지요.
로드리고는 일곱 살에 시각장애인 학교에 들어가 이때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열여섯 살부터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20대 중반에 이를 때까지 몇 곡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은 그저 무명의 청년 작곡가였지요. 한데 음악을 향한 열정이 점점 고취되면서, 드디어 작곡가의 삶을 꿈꾸기에 이른 그가 마음속으로 동경했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그렇습니다. 바로 프랑스 파리였습니다. 피레네 산맥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뚜렷이 구분지어 놓고 있긴 하지만, 문화적으로 보자면 넘지 못할 벽은 아니었습니다. 스페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파리는 문화적으로으로 한층 세련되고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페인의 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프랑스 파리’를 꿈꿨고, 음악사에서는 알베니스와 그라나도스, 또 지난번에도 언급했던 파야 등이 파리에서 공부하거나 활동했던 대표적인 스페인 음악가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파리행’의 열망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드리고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며 파리로 갔던 것도 그런 맥락이었겠지요. 그는 스물여섯 살이었던 1927년에 음악적으로 훨씬 앞서 있다고 여겼던 그곳, 좋은 학교와 선생들이 있는 파리로 떠났는데, 고향의 부모들이 학비와 생활비 지원을 끊는 바람에 거의 고학을 하다시피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보자면 파리로 갔던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습니다. 로드리고는 에콜 노르말 데 뮈지크에 입학해 폴 뒤카(1865~1935)에게 음악을 공부하게 됩니다. <마법사의 제자>라는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는 뒤카는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과묵하고 고매한 인품의 평론가, 또 많은 제자를 키워낸 음악교육자였습니다. 음악학자 롤랑 마뉘엘은 『음악의 기쁨』(북노마드)이라는 책에서 “그 세대 음악인 중에서 유일하게 온전한 인문주의자, 정신의 모든 영역에서 교양이 남달랐던 사람, 지성의 촉이 놀랍도록 좋았던 사람” 등으로 뒤카를 평하고 있지요. 게다가 그는 열려 있는 사람, 마뉘엘의 표현을 다시 한번 빌리자면 “유연한 사람”이었습니다. 특히 스페인의 문화와 음악에 관심이 많았지요. 스페인 태생의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알베니스와 친분이 두터웠고 파야가 프랑스로 유학을 왔을 때도 열렬히 후원하고 응원했습니다. 로드리고가 그의 제자가 된 것은 행운이었지요. 그는 열린 마인드의 스승을 만난 덕분에 자신에게 내재한 스페인적 음악성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뒤카에게 공부하는 한편, 동향의 선배 음악가들인 파야와 리카르도 비녜스 등을 만나 음악적 영향을 받게 됩니다. 파리에서 공부하는 내내, 이미 그라나다로 돌아가 있던 파야와 서신을 주고 받으면서 음악적 조언을 듣고는 했지요. 파야는 로드리고가 파리에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훗날 스페인으로 돌아왔을 때도 일자리를 알아봐 주는 등의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거의 아버지’ 같은 존재였습니다.
로드리고가 훗날 아내가 되는 피아니스트 빅토리아 캄히를 만난 것도 파리에서였습니다. 외로웠던 로드리고는 캄히에게 완전히 빠져듭니다. 하지만 어땠을까요? 부유한 터키 이민자 집안의 딸이었던 캄히는 로드리고만큼 뜨겁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캄히의 집안에서 두 사람의 만남을 완강히 반대했지요. 앞을 못 보는 데다 음악가로서의 명성도 확고하지 않은 상황이었으니, 그런 남자에게 딸과의 교제를 선뜻 허락할 부모는 많지 않았을 겁니다. 캄히도 그런 부모의 눈치를 보며 우왕좌왕했고, 그래서 두 사람은 5년간의 연애 동안 만남과 이별을 여러 차례 반복합니다. 이 과정에서 로드리고의 마음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곤 했지요.
하지만 숱한 우여곡절 끝에 두 사람은 1933년 1월 결혼했습니다. 아마도 로드리고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을 겁니다. 스페인에 작은 신혼집을 마련하고 꿈같은 신혼 생활을 만끽하지요. 이때 두 사람은 기차여행을 종종 하곤 했는데, 그렇게 함께 다녔던 여행지 중에서도 아랑훼즈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마드리드 남쪽으로 50km쯤 떨어진 이 유서 깊은 왕궁을 산책하면서, 로드리고는 아내의 설명으로 풍경을 받아들이고 상상했겠지요. 그것이 바로 1939년 작곡했던 기타 협주곡 <아랑훼즈 협주곡>으로 이어졌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곡에는 로드리고 본인도 밝혔듯이, 1938년에 아내가 첫아이를 유산하면서 맛봐야 했던 상실감도 배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부는 결혼 이후에도 몇 차례 떨어져 있기를 반복했는데, 그것은 성격 차이라거나 이혼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만, 결혼 이후 두 사람에게 찾아온 몇 차례의 헤어짐은 생활고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드리고는 훗날, 그러니까 프랑코 독재 치하의 스페인에서 상당한 지위의 음악적 신분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종종 그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적어도 20대~30대 중반의 로드리고는 아내와 함께 하는 생활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아랑훼즈 협주곡>은 그런 상황을 단숨에 씻어낸 히트곡이었습니다. 작곡의 계기는 1938년에 찾아왔지요. 스페인에서 당대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손꼽혔던 레히노 사인스 델라 마사(1896~1981)가 로드리고 부부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기타 협주곡 작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작곡 스케치는 그로부터 두 달쯤 뒤 파리에서 이뤄졌습니다. 로드리고는 이에 대해 ‘그야말로 번개 같은 영감’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습니다. 국내에도 번역ㆍ출간된 『로드리고, 그 삶과 음악』(포노)이라는 책에 그 술회가 인용되고 있는데, “갑자기 아다지오 악장 전체의 주제가 머릿속에 선명히 그려졌다. 그 어떤 머뭇거림도 없이 단번에 착상된 이 주제는 사람들이 듣게 될 완성품과도 거의 차이가 없었다”라는 문장이 등장하고 있지요. 전체 3악장 중에서도 2악장 아다지오와 3악장 알레그로가 그렇게 순식간에 찾아온 영감으로 작곡됐노라고 로드리고는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랑훼즈 협주곡>은 20세기에 작곡된 기타 협주곡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곡이라고 할 수 있지요. 특히 2악장 아다지오는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클래식 연주자들뿐 아니라 재즈 연주자들도 이 두번째 악장을 연주하기를 즐겼는데, 그중에는 유명한 음반들이 적지 않습니다.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 데이비스가 1960년 발표했던 <Sketches Of Spain>이 특히 알려져 있지요. 또 브라질 출신의 기타리스트 라우린도 알메이다, 미국의 기타리스트 짐 홀 같은 연주자들도 4중주 편성으로 이 곡을 연주한 음반을 발표했습니다. 한국에서는 한때 TV ‘주말의 극장’에서 시그널 음악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친숙한 곡입니다.
초연은 1940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필하모닉의 연주로 이뤄졌는데, 기타리스트는 앞서 언급했던 레히노 사인스 델라 마사였습니다. 로드리고로부터 이 곡을 헌정받은 기타리스트였지요. 초연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이어서 스페인 각지에서, 이듬해 1월에는 마드리드에서도 연주되면서 ‘스페인의 작곡가 로드리고’의 이름을 마침내 탄탄하게 만들어준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곡이 초연된 직후에 캄히와의 사이에서 딸을 얻은 로드리고는 어느덧 40대에 접어들었고, 이후에는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다가 거의 100세에 가까운 나이에 세상을 떴습니다. 사실 그는 평생에 걸쳐 약 200곡의 음악을 썼습니다만, 오늘날 주로 연주되는 곡들은 기타 곡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아랑훼즈 협주곡>과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이 자주 연주된다고 볼 수 있지요. 프랑스에서 편찬된 <라루스 음악사전>은 그의 음악에 대해 이렇게 언급합니다. “진보와는 무관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 나르시소 예페스, 아타울포 아르헨타ㆍ스페인 국립 오케스트라/1958년/Decca
오랜 세월 ‘최고의 연주’로 호평을 들어온 명연이다. 스페인적 향취가 물씬하면서도, 예페스의 기타는 정확하고 명료하다. 10현의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약간의 차가움을 겸비한, 과도하게 감상에 빠지지 않는 절제의 미학에 신뢰를 갖게 한다. 음악적 색채감과 연주의 정교함이라는 두 측면을 완벽하게 종합해내고 있는 연주다. 한데 아쉽게도 국내에서 CD로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차선책으로 오돈 알론소가 ‘Orquesta Sinfonica RTV Espanola’을 지휘한 1969년 녹음(DG)을 권한다. 최근에 예페스 전집으로 새롭게 출시됐다. 5장의 CD에 예페스가 남긴 명연을 두루 담고 있다. 가격대가 좋다.
▶ 페페 로메로, 네빌 마리너ㆍ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더필드/1978년/Philips
예페스와 쌍벽을 이루는 음반이다. 스페인의 토속적 색채감은 전자가 좀더 강하다. 스페인 말라가 태생의 페페 로메로는 ‘기타 명가’로 불리는 로메로 집안의 일원이다. 예페스에 비해 좀더 온화하고 낭만적이라고 할 만하다. 냉정하고 정교한 연주보다 음악적 굴곡이 좀더 느껴지는 연주를 선호한다면 이 음반을 권한다. 로메로의 현란한 기교가 스피커 밖으로 튀어나오는 듯한 느낌마저 있다. <아랑훼즈 협주곡>뿐 아니라 <어느 귀인을 위한 환상곡>도 함께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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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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