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내 인생의 클래식 101
음악에서도 외모에서도, 라흐마니노프에게는 ‘귀족적인 침울함’이라고 부를 만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 배경을 몇 가지로 유추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즉 세르게이는 여섯 형제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는데 친가와 외가 모두가 러시아의 장군 가문이었지요. 세르게이의 아버지인 바실리는 물려받은 영지가 대단히 많았을 뿐 아니라 아내인 류보피 부타코비가 결혼 지참금으로 가져온 토지까지 소유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대단히 부유한 귀족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한데 세르게이가 태어나기 직전부터 집안이 슬슬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인 바실리의 한량 기질 때문이었습니다. 가장으로서 무책임했던 그는 낭비가 심하고 놀음까지 즐겼습니다. 당연히 여성 문제도 복잡했겠지요. 그러면서 결국 가문의 재산을 하나하나 탕진합니다.
이렇게 라흐마니노프의 집안이 서서히 몰락해가는 모습은 당대의 전형적 풍경이기도 했지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가 그 지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 소설은 1870년대 러시아 귀족계급이 몰락을 연대기적인 가족사를 통해 그려내고 있습니다. 농노제도에 기반을 뒀던 귀족경제는 점점 몰락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에 밴 씀씀이를 포기하지 못한 귀족들이 상업으로 돈을 번 부호들에게 영지를 팔아넘깁니다. 그러면서 구시대의 귀족들은 정신적으로도 점점 황폐해져 가는 것이지요.
세르게이의 아버지 바실리가 바로 그런 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홉이 <벚꽃동산>에서 묘사한 것과 매우 흡사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이 연극 속에서 ‘벚꽃동산’은 농노 출신의 신흥 자본가인 로파힌에게 경매로 넘어가지요. 벚꽃동산의 원래 소유주였던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가족들은 몇 푼의 돈을 손에 쥐 채, 파리로 모스크바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라흐마니노프의 집안도 그랬습니다. 세르게이가 아홉 살 무렵이 되면서 가족은 페테르부르크의 아파트에서 살게 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경을 맞고, 급기야 아버지는 어딘가로 종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이후 다시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밖에도 세르게이에게는 몇번의 상처가 더 있었습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살던 시기에 두 명의 형제가 병으로 죽었습니다. 특히 어린 동생을 피아니스트로 대동하고 노래 부르기를 즐겼던 큰누나 엘레나의 죽음(1885년)이 적지 않은 상처로 남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말하자면 몰락의 길을 걸었던 가문, 부모의 파경, 아버지의 행방불명, 누이의 죽음 같은 것들을 겪으면서 점점 더 침울하고 내성적인 청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1897년 교향곡 1번의 참담한 실패 이후에 겪었던 우울증도 이와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음악은 어떻게 공부했을까요? 어린 세르게이에게 피아노를 처음으로 가르쳤던 스승은 어머니 류보피였습니다. 네 살 무렵부터였다고 하지요. 또 부모가 이혼한 후에는 모스크바로 가서 니콜라이 즈베레프(1832~1893)의 집에서 기숙을 하면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이때 같은 문하에서 한 살 위의 스크리아빈과 친구가 되기도 하지요. 한데 즈베레프는 굉장히 엄격하고 무서운 선생이었나 봅니다. 어린 세르게이는 아침 6시부터 피아노 앞에 앉아야 했고 심한 꾸지람에 체벌을 당하기도 했던 모양입니다. 어린 아이로서는 견디기 힘들었겠지요. 게다가 세르게이는 작곡도 공부하고 싶었는데 즈베레프는 뛰어난 피아니스트를 만들려는 교육에만 집중했다고 전해집니다. 결국 세르게이는 스승의 집을 나와서 리스트의 제자이자 자신의 사촌형이기도 했던 피아니스트인 알렉산더 질로티(Alexander Ziloti)에게 피아노를 배웁니다. 또 모스크바음악원에 재학하면서 세르게이 타네예프(Taneyev)와 안톤 아렌스키(Arensky) 등에게서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라흐마니노프는 그런 성장 과정과 수업 기간을 거쳐 음악계에 등장합니다.
모스크바음악원을 졸업하던 1891년, 라흐마니노프가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그의 작품 번호 1번이 세상에 나오지요. 상당히 규모가 큰 첫 번째 피아노 협주곡이었습니다. 역시 라흐마니노프는 피아노에 자신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후기 낭만주의 이후의 음악가 중에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라는 수식어가 라흐마니노프처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찾기 힘듭니다. 그는 관현악곡, 성악곡, 실내악 등도 작곡했지만 오늘날 일반적으로 애청되는 곡들은 주로 피아노와 관련한 음악들입니다. 19세에 작곡해 그의 이름을 유럽 곳곳에 알린, 초기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전주곡 C샤프단조>를 비롯해 팝음악에까지 인용된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파가니니 주제에 위한 광시곡> 같은 곡들이 오늘날 가장 인기있는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음악으로 남아 있습니다. 한데 라흐마니노프는 열여덟 살에 작곡했던 첫번째 피아노 협주곡이 좀 미흡하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이 최초의 작품을 1917년에 개작한 것입니다. 협주곡 2번과 3번을 완성한 뒤에, 고국인 러시아를 떠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완성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1897년에 교향곡 1번의 참담한 실패로 의기소침했던 그는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재기합니다. 이와 관련한 꽤 오래 전에 이 지면에서 이미 했습니다. <내 인생의 클래식 101> 2012년 10월 25일자에서입니다. 거의 3년 전이군요. 그러고 보니 연재를 참 오래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많이 사랑받는 클래식 레퍼토리 101곡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 어느덧 후반부입니다. 앞으로 10여곡이 남았습니다.
1901년에 두번째 피아노 협주곡으로 재기한 그는 이듬해에 결혼합니다. 상대는 사촌누이였던 나탈리아 사치나였지요. 고모의 딸입니다. 여기서 잠깐 짚어봐야 할 것은 라흐마니노프가 10대 시절부터 고모인 바르바라 사치나의 집에서 지내던 시간이 많았다는 점이지요. 나탈리아는 어린 시절부터 같이 놀았던 네 명의 사촌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둘의 연애는 아주 오래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러시아 귀족사회에서 사촌간의 결혼은 흉잡히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 정착해 신혼살림을 시작하지요. 그 이듬해에는 첫딸 이리나가 태어납니다.
자, 이때부터 라흐마니노프는 남편과 아빠의 역할을 자각했는지 환금성이 좋은 오페라 작곡에 힘을 쏟고 볼쇼이극장에 지휘자로 취직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이 시기의 그는 작곡보다는 지휘와 연주 쪽에 좀더 비중을 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정세는 불안했습니다. 이른바 1905년의 혁명. 특히 10월부터 12월까지는 총파업을 비롯해 정부군과 혁명군 사이의 전투가 치열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는 12월에 접어들면서 로스토프 연대가 반란을 일으켜 정부군과 충돌했고, 이어진 노동자들의 총파업은 무장봉기로 발전했습니다. 상황이 이랬으니 극장에서 오페라를 공연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했겠지요.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극장의 지휘자를 사임한 채 아내와 딸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이어서 독일 드레스덴으로 건너갑니다.
라흐마니노프 가족은 드레스덴에서 약 3년간 머물지요. 그곳에서 둘째딸 타치아나가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에 전념합니다. 상징주의 화가 아놀드 뵈클린(1827-1901)의 그림에서 영감을 받은 교향시 <죽음의 섬>(The Island of the Dead), 첫번째 피아노 소나타, 피아노 협주곡 제3번 등을 드레스덴에서 작곡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남긴 3곡의 교향곡 중에서 오늘날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교향곡 2번 e단조>가 이 시기에 태어납니다. 1906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에 걸쳐 작곡한 이 곡은 교향곡 1번의 참담한 실패 이후 꼭 10년 만에 날린 회심의 일격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모스크바음악원 시절의 스승이었던 타네예프(Sergei Taneyev)에게 헌정됐고, 작곡 이듬해인 1908년에 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가 본인의 지휘로 초연됐습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지요.
러시아적 감성이라는 측면에서,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2번>은 흔히 차이코프스키의 뒤를 잇는 교향곡이라는 평을 듣습니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지요. 러시아 낭만주의의 계보를 잇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데 두 사람의 교향곡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특히 4번부터 6번까지에서 느껴지는 광기 어린 열정, 혹은 극단적인 비극성을 라흐마니노프에게서 만나기는 어렵습니다. 그보다는 좀더 순화된, 어찌 보면 약간 차가운 느낌마저 감도는 낭만성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성싶습니다. 제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귀족적인 침울함’이 교향곡 2번에도 역시 느껴집니다.
라흐마니노프는 성품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음악적 관점에서도 극단을 지향했던 사람이 결코 아니었지요. 그런 맥락에서, 훗날 미국으로 망명한 그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카네기홀 데뷔 연주회장에 나타나 했다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날 호로비츠가 연주한 곡은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이 광폭한 야생마는 그날도 역시 뜨겁게 내달리는 연주를 한바탕 펼쳐 청중을 완전히 흥분시켰다고 하지요. 한데 라흐마니노프는 고국에서 온 후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옥타브 연주는 최고로 빨랐고 최고로 우렁찼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해둬야겠는데, 그건 음악적이진 않았네. 지나쳤네.”(<피아노의 역사>, 스튜어트 아이자코프, 포노)
<교향곡 2번>의 1악장은 저현악기들의 느리고 우울한 울림으로 시작합니다. 이어서 목관과 호른, 바이올린이 등장합니다. 이 느린 서주를 잘 기억해두기 바랍니다. 전악장에 걸쳐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이어서 템포가 라르고에서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전환되면서 바이올린이 첫 주제를 제시하고 그것이 점차 확장됐다가 애잔한 클라리넷 독주, 이어서 목관과 현악기가 어울려 서정적인 두번째 주제를 연주합니다. 악기와 악기, 선율과 선율의 이음새가 참으로 매끄럽습니다.
2악장에서는 빨라집니다. 리드미컬한 전개가 돋보이는 스케르초풍의 악장입니다. 템포가 모데라토로 전환되면서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악구들이 잠시 펼쳐지지요. 그러다가 다시 경쾌한 리듬을 타고 음악이 점점 빨라집니다.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다시 고조됩니다. 이렇게 잠깐의 휴지부를 뒀다가 고조되는 악상의 전개가 또 한번 펼쳐집니다. 서정적인 악구들도 다시 한번 얼굴을 비춥니다. 다시 템포가 점점 빨라졌다가 마지막에 금관악기들이 코랄풍의 연주로 방점을 찍습니다. 관현악의 색채가 매우 화려할 뿐 아니라 생기가 넘치는 악장입니다.
아다지오로 흘러가는 3악장은 <교향곡 2번>에서도 가장 애청되는 악장입니다. ‘Never gonna fall in love again’이라는 팝음악에 차용되면서 굉장히 유명해진 악장이기도 하지요. 악장의 머리에서 바이올린이 리드하는 선율이 인상적입니다. 이어서 클라리넷이 긴 호흡으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릅니다. 마지막 4악장은 알레그로 비바체. ‘빠르고 힘차게’라는 뜻이지요. 약간 소란스러운 듯이, 행진곡풍으로 전개되는 악장입니다. 중간에 잠시 템포가 느려졌다가 다시 본래의 활기찬 분위기로 돌아옵니다. 금관과 팀파니가 주도하는 마지막 장면은 화려하고 힘이 넘칩니다.
▶앙드레 프레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1973년/Warner Classics
앙드레 프레빈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의 인기를 끌어올린 대표적인 지휘자다. 라흐마니노프 교향곡의 권위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런던 심포니를 이끌고 1965년에도 교향곡 2번을 레코딩했다. 이 녹음은 특히 관악기의 화려한 에너지가 빛난다. 반면에 1973년의 연주는 좀더 차분하고 유려하다. 연주시간 1시간에 달하는 원곡을 일체의 압축 없이 연주한, 일종의 무삭제판이기도 하다. 특히 부드럽게 흘러가는 현악기들의 향연이 매혹적이다.
▶마리스 얀손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1993년/Warner Classics
우리 시대의 거장 얀손스가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을 지휘한 이 음반에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전곡이 담겼다. 2번뿐 아니라 3번도 탁월한 연주라고 할 만하다. 서구의 악단들과는 맛이 다른,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의 러시아적 감성을 유감없이 맛볼 수 있다. 프레빈의 연주가 낭만적 흥취를 강조하는 것에 비해, 얀손스는 음악의 구조와 세부의 표현을 좀더 조탁해내고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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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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