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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슬픔의 협주곡,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엘가 <첼로 협주곡 e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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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부 남자들뿐일까? 혹시 그런 의구심을 가져본 적 있는지요?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여성의 이름을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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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부 남자들뿐일까? 혹시 그런 의구심을 가져본 적 있는지요? 우리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의 역사에서 여성의 이름을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역사 이래로 모든 권력이 남성에게 쏠려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여성은 남성에 비해 연약하고 열등한 존재, 그래서 남성의 보살핌과 지배를 받는 존재로 수천년간 인식돼 왔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재능과 끼를 가진 여성들이 숱하게 많았겠지만, 대부분 재능을 꽃 피워 보지도 못한 채 사라졌을 겁니다. 물론 아주 드물긴 하지만 여성이 음악사에 등장하는 경우들이 가끔 있긴 했지요. 예컨대 중세 시대에도 힐데가르트 폰 빙엔(Hildegard von Bingen, 1098~1179), 브리지타 폰 슈베덴(Birgitta Von Schweden, 1303~1373) 같은 여성 작곡가들이 있었습니다. 한데 이 두 명은 중세 가톨릭의 ‘고위층 수녀’였지요. 말하자면 종교적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었기에 음악을 작곡해 이름을 남기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근대로 들어오면서 여성 음악가들의 이름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누가 있을까요? 모차르트의 누나였던 난네를, 멘델스존의 누나였던 파니, 또 슈만의 아내였던 당대의 피아니스트 클라라 등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어떤가요? ‘모차르트의 누나’ ‘멘델스존의 누나’ ‘슈만의 아내’ 같은 수식어들이 꼭 따라붙습니다. 말하자면 동생이나 남편의 삶 속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부차적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지요. 재능은 뛰어났지만 사회적으로 여전히 숱한 제약을 받아야 하는 시대에 살았던 탓입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딸 난네를에게 아예 작곡을 가르치지 않았지요. 배워봤자 소용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이 아버지는 난네를이 18세가 되자 “이제 집에서만 연주하라”며 연주여행마저 금합니다. 파니는 어땠나요? 그녀는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작곡에도 뛰어났던 음악가였습니다. 하지만 역시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이 ‘적’이었지요. “음악은 너한테 장식일 뿐이니, 결혼 준비나 잘 하라”는 것이 아버지의 명령이었습니다. 결국 파니는 집안 친지들 앞에서 연주하면서 아까운 재능을 썩혔지요. 또 클라라는 10대 시절부터 당대의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쳤지만 남편을 위한 내조와 육아의 짐을 내려놓을 수 없었습니다. 스물한 살에 결혼한 그녀는 아이를 여덟 명이나 낳았지요. 그중 한 아이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일곱을 키우는 일이 간단치 않았을 겁니다. 그녀는 자신의 일기에 “로베르토가 작곡하는 동안, 나는 밀린 일을 해야 한다. 나 자신을 위해 한 시간도 쓸 수가 없다”고 털어놓기까지 합니다.

 

음악에서 여성들의 진출이 활발해진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지요. 오늘날에는 지휘자와 작곡가, 또 오케스트라에서도 여성연주자들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피아노와 바이올린, 관악기 중에서도 플룻과 오보에 같은 악기들에서 여성들의 활약이 두드러집니다. 최근에는 금관과 타악기에서도 여성 연주자들의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한데 첼로는 많은 악기들 중에서도 특히 오래도록 ‘금녀의 악기’로 여겨졌습니다. 다리 사이에 끼고 연주하는 모습이 여성답지 못하다는 인식 때문이었지요. 물론 지금 생각하면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입니다. 한데 그 잘못된 터부를 허물어뜨린 여성은 누구였을까요? 바로 포르투갈 태생의 첼리스트 귀예르미나 수지아(Guilhermina Suggia, 1885~1950)였습니다. 때로는 ‘파블로 카잘스의 연인’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수지아는 20세기 초반에 주로 활약했던 첼리스트입니다. 영국의 화가 어거스트 에드윈 존(1878~1961)이 그녀의 연주 장면을 회화 작품으로 남겨놓고 있는데, 그림 속의 수지아는 약간 매부리코에 팔다리가 아주 긴 체형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당당한 모습이지요. 그래선지 ‘첼로의 헤라클레스’라는 별명이 따라붙기도 하는데, 이 또한 남성 중심적 표현 같습니다. 또 그녀를 일컬어 ‘세계 최초의 여성 첼리스트’라고도 하지만 이 역시 정확한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요. ‘여성 첼리스트로 이름을 날린 최초의 연주자’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겁니다. 그녀는 음반으로 연주를 들어볼 수 있는 최초의 여성 첼리스트입니다. 물론 음반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수지아는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유언을 남겼지요. ‘내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팔아서 대영제국 예술위원회가 관리하는 수지아 재단의 기금으로 쓸 것, 국적에 관계없이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스물한 살 미만의 첼리스트에게 수지아 상을 수여할 것.’ 포르투갈에서 태어난 그녀가 영국의 예술위원회에 기금을 맡긴 것은 자신이 연주자로서 큰 성공을 거둔 곳이 영국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한데 ‘국적에 관계없이’라는 단서가 있긴 하지만 영국 예술위원회가 수상자를 선정하면서 영국인을 더 염두에 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래서 재미있는, 어찌 보자면 매우 의미 있는 인연이 만들어집니다. 1956년, 수지아 상의 첫번째 수상자가 다름 아닌 열한 살의 꼬마 재클린 뒤 프레(1945~1987)였던 것이지요.
 
수지아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에 태어났던, 그리고 지금도 세계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성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뒤 프레는 그렇게 ‘신동 첼리스트’로 세상에 등장합니다. 이어서 17살이던 1962년, 런던 로열페스티벌홀에서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성인 연주자 신고식을 치르지요.

 

엘가의 <첼로 협주곡 e단조>는 이 두 명의 여성 첼리스트들이 즐겨 연주했던 레퍼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첼리스트들에게는 협주곡 레퍼토리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하이든, 생상스, 드보르자크, 슈만 등 손에 꼽을 정도로 제한적입니다. 이렇게 레퍼토리도 부족했을 뿐더러 수지아의 전성기 활동 무대가 런던이었기 때문에, 또 뒤 프레에게는 엘가야말로 모국의 대표적인 작곡가였기 때문에 그의 협주곡을 자주 연주했을 겁니다. 뒤 프레는 이 곡으로 데뷔했을 뿐 아니라, 1965년 존 바비롤리(1899~1970)가 지휘하는 런던 심포니와의 협연을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명연으로 남겼습니다. 아마도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한 음반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엘가의 협주곡은 그녀를 대표하는 레퍼토리였고, 거꾸로 보자면 그녀로 인해 엘가의 협주곡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게 됐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857년 영국 브로드히드의 농촌에서 태어난 엘가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이른바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자국의 작곡가를 배출하지 못했던 영국의 음악적 자존심을 세워준 인물로 평가받지요. 고상한 격조와 우울한 슬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땅에 대한 짙은 향수 같은 것들이 음악에서 배어나옵니다. 당연하게도 영국인들의 칭송과 자부심이 예나 지금이나 대단하지요. 비슷한 연배의 영국 작곡가로는 네 살 아래의 프레데릭 델리어스가 있는데,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냈습니다. 음악적 스타일도 프랑스의 인상주의와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가 혼합된 양식을 보여줍니다. 좀더 아래로 내려가면 본 윌리엄스(1872~1958)가 엘가에 이어 영국적인 스타일을 구축하지요. 영국의 민요에 대한 애착, 아울러 약간의 신비주의적 성향이 담긴 음악들을 썼습니다. 또 한 명의 영국 작곡가인 구스타프 홀스트(1874~1934)도 민요에서 영향 받은 음악들을 많이 썼고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여준 음악가였습니다. 특히 그는 선배인 엘가와 친분이 돈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첼로 협주곡 e단조>는 엘가의 음악인생에서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유명세를 안겨줬던 <수수께끼 변주곡>을 1899년 발표했고, <위풍당당 행진곡>을 1901년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초연했지요. <첼로 협주곡 e단조>는 60세가 넘은 1918년에 작곡을 시작해 1919년에 세상에 선보입니다. 오케스트라의 음향을 절제하면서 독주 악기인 첼로의 역할을 뚜렷하게 부각하고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갈수록 웅장하고 거창해지는 후기 낭만주의의 관현악법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간결하면서도 애절한 ‘첼로의 노래’에 좀더 집중하고 있는 협주곡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곡은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을 예감한 음악이 되고 말았습니다. <첼로 협주곡 e단조>가 초연되고 다섯 달 뒤에 엘가의 아내 캐롤린 앨리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 아내는 엘가에게 매우 특별한 존재였다고 하지요. 원래는 엘가의 제자였습니다. 엘가는 29세였던 1886년에 자신보다 9년 연상인 앨리스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엘가는 가난한 평민이었고 앨리스는 귀족의 딸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앨리스 집안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1889년 5월 결혼합니다. 그래서였는지 엘가의 아내 사랑은 대단히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작곡했던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품 <사랑의 인사>가 바로 아내를 생각하며 쓴 음악이지요.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앨리스는 그다지 미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엘가에게로 왔던 그녀는 헌신적으로 남편을 내조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녀는 엘가의 음악에 영감을 주는 뮤즈였을 뿐 아니라 작곡에 대한 비평가이기도 했습니다. 영국의 귀족 사회에 적응하지 못했던 평민 출신의 작곡가 엘가, 그래서 심하게 내향적이거나 때로는 대인기피증까지 보였던 남편을 돌봐주고 격려한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엘가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런던 근교 햄스테드에 있던 대저택을 팔고 고향으로 내려가 거의 은둔하다시피 합니다. 이후 몇 곡의 소품을 제외하곤 작곡을 해달라는 모든 제의를 거절한 채 살다가 1934년에 77세를 일기로 타계하지요.

 

<첼로 협주곡 e단조>는 고결한 슬픔의 협주곡입니다. 모두 4개 악장으로 이뤄졌지요. 1악장과 2악장은 구분 없이 연주됩니다. 첫 악장에서 등장하는 첼로의 격렬하면서도 슬픈 노래를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 서주는 전곡을 통해 빈번히 등장합니다. 클라리넷이 잠시 첼로의 슬픔을 달래주다가 명상적인 느낌의 주제선율이 연주됩니다. 반면에 2악장은 활기찹니다. 스케르초 풍으로 들리는 경쾌한 악장입니다. 16분 음표를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장면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3악장은 깊은 인상을 남겨주는 가요풍의 악장입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첼로의 비가(悲歌)가 느릿하게 울려 퍼집니다. 행진곡풍으로 문을 여는 4악장은 매우 격렬하고 뜨겁습니다. 첼리스트의 기교와 에너지가 폭발하는 악장입니다.


 

 

 

 

 

▶재클린 뒤 프레, 존 바비롤리,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1965년/Warner Classics

 

본문에서 언급한 녹음이다. 작은 키의 거장 존 바비롤리는 엘가와 시벨리우스의 음악에서 일가를 이룬 지휘자다. 혈통으로는 영국계가 아님에도 ‘영국 지휘자’로 언급된다. 그의 지휘는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동시에 웅혼한 낭만성을 드러낸다. 이 음반에서 만나는 뒤 프레의 첼로는 뜨겁고 순수하다. 음악을 향한 혼신의 집중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놓칠 수 없는 음반이다.
 

 

 

 

 

▶미샤 마이스키, 쥬세페 시노폴리,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1990년/DG


국내에서 구하기 용이한 음반 중에서 고른다면 미샤 마이스키의 연주를 선택하는 것도 좋다. 마이스키의 장점으로 손꼽히는, ‘노래하는 첼로’의 미덕이 살아 있다. 음악의 격렬한 생동감도 놓치지 않는다. 2장의 CD에 엘가 외에도 하이든, 슈만, 드보르작의 첼로 협주곡을 함께 수록했다. 오리지널 음반을 고집하는 애호가가 아니라면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음반이다.      

 

 

 

 

 

 

 

 

 

[관련 기사]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 >
- 브람스, 소박하고 엄숙한 기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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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릭 사티, <6개의 그노시엔느> (6 Gnossien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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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문학수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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