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중혁의 대화 완전정복
택시 안, 술 취한 그 남자의 말
연극 <택시 드리벌>에서 장진 감독이 선택한 대화
자주 만나고 익숙한 사람보다 아주 잠깐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술이 더욱 중요하다. 익숙한 사람들이야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있지만 한번 만나고 말 사람들과는 최대한 유연한 대화가 필요하다. 택시 기사님들뿐 아니라 각종 안내를 도와주는 전화 상담원, 가게의 점원들에게 더 말을 잘해야 한다. 깊은 상처를 주고도 실수를 만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제. 택시 안에서의 대화
다음은 장진 감독의 희곡 <택시 드리벌> 중 일부분입니다. 주인공 덕배가 술에 취한 손님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빈칸에 들어갈 알맞은 대화를 골라보세요.
남 1, 2, 3 탄다.
모두 술에 취해 있다.
남1 : 영동.
차, 간다.
남2 : 야! 엄석대! 우리… 우리 왜 이렇게 됐냐! 우리 안 그랬잖아!
남3 : 김 부장… 그새끼 언젠가 내가 죽일 꺼다! 알겠냐! 내가 죽인다. 건들지 마라!
남1 : 그래, 우리 이렇게 물 먹이고 지는 편할 꺼 같으냐! 오늘 진짜 엎어 버리려다 참았다! 나 해병대다! 알지! 해병대가 참았다! 하지만 속으로 울었다! 해병대의 눈물! 아프다! 해병대 아프다!
덕배 : 술이라도 한잔 먹어야 하고 싶은 말 다 꺼내는 이 불쌍한 샐러리맨들…….
남3 : 친구들! 그 자식은 내가 죽인다! 먼저 행동하지 마라! 내가 죽일 꺼다! 알지! 나 엄석대! 초등학교 때부터… 알지! 난 영웅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일그러져 있지만 나 그 자식 죽이고 부활할 꺼다! 김 부장 그 자식은 내가 죽인다!
남2 : 야! 우리 왜 이렇게 됐냐! 우리 안 그랬잖아!
덕배 : 저기요, …… 1호터널 막히니까 남산 순환도로로 갈게요…!
남2 : 1호터널 왜 이렇게 됐냐? 1호터널 안 그랬잖아?
남1 : 난 오늘 정말로 사표 쓸려고 했다! 해병대가 사표 쓸려고 했다! 해병대! 웬만하면 글 같은 거 안 쓴다!
그런 해병대가 사표 쓸려다 참았다! 비록 일병에 의가사 제대했지만 해병대 가슴으로 울었다! 해병대
박 일병이 울었다!
남3 : 거칠은 벌판으로 달려가자. 젊음의 태양을 마시자~.
남1 : 하지 마. …… 하지 마…….
남2 : (문제)
문제. 남2는 어떤 말을 했을까?
(1)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2) 뭘 하지 마, 뭘 하지 마.
(3) 우리 왜 이렇게 됐냐! 우리 이렇게 살지 말자…….
(4) 난 육군 병장 제대했다.
(문제 해설)
정답은 차근차근 알아보기로 하고, (솔직히, 정답이 뭐가 중요하겠어요!) 우선 대화의 재미를 즐겨보자. 내 생각에는 여러 사람이 등장하는 대화를 한국에서 가장 맛깔 나게 쓸 줄 아는 사람이 장진 감독이다. <기막힌 사내들>과 <킬러들의 수다> 같은 초기작을 재미있게 본 사람이면 내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장진 감독의 주인공들은 함께 모여서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반복하는 사람들이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긴 하지만 입장은 잘 좁혀지지 않는다. 거기에서 코미디가 생겨난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실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들이다.
오래 전 연극 <택시 드리벌>을 보러 갔을 때가 생각난다. 배우 정재영이 주인공 덕배를 연기했던 것 같다. (자세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커다란 무대 위에 택시 한 대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덕배는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택시 승객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다. 수많은 대사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는데, 내게는 모든 대사가 독백 같았다. 연극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던 때라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그 모습이 이상했다. 왜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이야기를 할까. 왜 관객을 향해 이야기를 할까. 모든 대사가 독백 같았고, 허공에다 내뱉는 한숨 같았다.
허망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택시만한 데가 없다. 같은 방향을 보고 앉은 데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지 못한다. 만나자마자 곧 헤어질 사이이기 때문에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기사님, 제발 정치 얘기는 묻지 말아주세요. 저랑 100분 토론 하실 생각이시면 자리를 따로 한번 마련하고요.) 곧 휘발될 만한 이야기를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짧게 나누어야 한다.
택시에 타면 기사님께 말을 거는 편이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므로 다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한다.그래야 한다. 어떤 식으로든 말을 건네야 한다.’ 투철한 직업 정신으로 말을 걸지만 후회할 때도 있다. 오랜 시간 말을 아껴두어 에너지가 응축된 기사님께서 폭포수 같은 방언을 터뜨리실 때면, 아뿔싸, 내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구나 싶어서 말을 걸지 말고 잠이나 잘걸 후회한다. 그래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자식들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던 것 같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5분 다이제스트 버전으로 들려주신 기사 분도 있었고 (아, 파란만장하여라!) 물론 정치 얘기 하시는 분도 많고, 때로는 음악 이야기를 하시는 분도 있었다. 몇 년 전부터 차를 없앤 관계로 택시 탈 일이 점점 늘어날 테니 택시에서의 화술을 좀더 익혀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자주 만나고 익숙한 사람보다 아주 잠깐 만나는 사람과의 대화술이 더욱 중요하다. 익숙한 사람들이야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있지만 한번 만나고 말 사람들과는 최대한 유연한 대화가 필요하다. 택시 기사님들뿐 아니라 각종 안내를 도와주는 전화 상담원, 가게의 점원들에게 더 말을 잘해야 한다. 깊은 상처를 주고도 실수를 만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 이제 문제 풀이로 돌아가보자. 택시에서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다. 시끄럽고, 분주하고, 엉망진창이고, 헛소리들이 난무한다. (아, 술에 취해 탔던 모든 택시의 기사님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남1은 일병 의가사 제대하긴 했지만 해병대 출신이다. 남3은 엄석대다.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이다. 엄석대는 김 부장을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른다. 남2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왜 이렇게 됐냐고, 옛 생각에 빠져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사람이다. 1호터널이 왜 이렇게 됐냐고, 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이렇게 됐냐고, 술에 취해서 소리를 지를 때 웃기면서도 짠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서로 소리를 지르는 가운데, 남2는 어떤 말을 했을까. 보기를 하나씩 들여다보자.
보기 (1)의 경우
“보석보다 찬란한 무지개가 살고 있는 저 언덕 너머.”
남3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순간, 택시는 개판이 될 것이다. 남1은 “하지 마, 하지 마.” 소리를 지르고, 남2와 남3이 노래를 부를 경우, 아마 덕배는 택시를 세울지도 모른다.
보기 (2)의 경우
“뭘 하지 마, 뭘 하지 마.”
술에 취했을 때 상대방의 말을 계속 따라 하는 사람이 있다. 상황을 짜증으로 몰고 갈 필요가 있다면,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아가고 싶다면 추천해줄 만한 정답이다.
보기 (3)의 경우
“우리 왜 이렇게 됐냐! 우리 이렇게 살지 말자…….”
가장 정직한 정답이 될 것이다. 남2의 캐릭터라면, 술에 취해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겠지.
보기 (4)의 경우
“난 육군 병장 제대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던 남2가 갑자기 정색하는 경우다. 남2가 육군 병장 제대 이야기를 꺼내면, 남1은 다시 해병대 이야기를 꺼낼 것이고, 이번에는 노래를 부르던 남3이 “하지 마, 하지 마...”를 외칠 것이고, 택시는 다시 아수라장이 될 것이며 덕배는 택시를 세울 것이다.
장진 감독이 선택한 답은 (3)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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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고 산문도 쓰고 칼럼도 쓴다. 『스마일』, 『좀비들』, 『미스터 모노레일』,『뭐라도 되겠지』, 『메이드 인 공장』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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