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대화의 힘
『웰컴 투 그림책 육아』
그림책은, 읽는 그 자체만으로도 ‘추억’이 됩니다. 심지어 그다지 좋은 책이 아니어도 추억이 됩니다. 아이와 ‘함께’ 읽기 때문이지요.
ㅇ
글자를 아는데도 왜 자꾸 읽어달라고 할까?
어휴, 아직 글자를 모르니 읽어주긴 하지만, 어서 빨리 아이가 한글을 익혀 혼자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고요? 똑같은 책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 읽어주자니, 그 책은 숨겨놓고 싶을 지경이신가요? 하긴, 책도 자기 혼자 읽어야 진짜 독서 같지요. 책을 키 높이만큼 쌓아놓고 책의 바다를 마음껏 유영하는 날은 언제나 올까요? 사실 아이가 혼자 책을 읽으면 엄마는 또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너는 니 일, 나는 내 일.
혹시 큰아이가 동생의 그림책을 옆에서 읽고 있으면 마음이 답답하신가요? 니가 지금 그거 읽을 때냐? 가서 문제집을 풀든가, 역사책이나 과학책을 보거라. 글자가 좀 있는 책은 사는 게 아깝지 않은데, 그림책은 어쩐지 장난감 같아서 사기 아까우신가요? 한번만 봐도 내용 다 아는데…….
하하. 다 제가 했던 생각이거든요. 무슨 일제 강점기도 아닌데 왜 그렇게 ‘읽기 독립’을 간절히 바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아이들은 반드시 혼자 책을 읽는 날이 오는데 말이에요. 그리고 혼자 읽을 줄 아는 것과 몇 권의 책은 엄마와 같이 읽기를 원하는 건 별개의 얘기인데 말입니다. 전 그게 반대말인 줄 알았어요. 엄마가 읽어주다간 영영 읽기 독립이 안 될까 봐 걱정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가 글자를 알면서도 읽어달라고 하는 건 단순한 이유더군요. 왜? 더 재미있으니까! 혼자 읽을 줄 알아도 엄마랑 같이 읽으면 더 잘 이해되니까! 혼자서 읽으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 책도 엄마가 읽어주면 귀에 쏙쏙 들어오니까! 그리고 재미있는 책을 같이 읽고, 같이 이야기 나누면 더 재미있으니까! 재미있는 걸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다섯 살에 동생을 본 꽃님이가 동생의 그림책을 보기에, 속으로 좀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니가 지금 사과, 수박 그려진 사물 인지 그림책을 볼 때냐? 으이구. 그런데 그 책들을 유심히 보더니 아이 그림실력이 쑥 올라가는 겁니다. 꽃님이 동생 꽃봉이가 커서 제법 줄거리가 있는 책들을 읽자, 꽃님이가 동생의 책을 탐하는 일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혼자 꺼내 읽으면 다행이게요? 동생에게 읽어주노라면 어느샌가 쓰윽 고개를 들이밀고 같이 듣더라고요.
“넌 가서 네 숙제 할래?” 잔소리도 했는데요, 어느 순간 딱 깨달았습니다. 초등 고학년 꽃님이가 그림책을 진짜 그림책답게 읽는다는 걸요. 어릴 땐 줄거리만 보거나 그림만 보더니 이젠 그림과 글이 어떻게 조화되는지 살펴서 읽고요, 작가의 집필 의도도 알아차리기 시작했습니다.
제 생각에 그림책을 함께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최고의 시기는 5~10세 같아요. 딱 혼자 읽을 줄 아는 시기, 대부분의 엄마가 함께 읽기를 그만두는 그 시점부터 그림책을 함께 읽고, 함께 이야기 나누기 좋은 시기가 시작되는 거지요.
그림책 대화로 가족이 달라진다
저는 아이들과 그림책을 읽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꽃봉이가 그림책을 통해 세상에 대해 배우고 새로운 걸 알아가고 말귀, 말문이 트이는 재미를 느꼈다면, 꽃님이와는 본격적으로 대화하는 재미를 느끼게 됐습니다.
그림책이 아니었다면 아이들과 제가 나누는 대화는 어떤 색깔이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밥 먹어라. 빨리 좀 해. 다 했어? 오늘 어땠어? 좋았어? 손 씻어. 이는 닦았니? 옷 갈아입어. 숙제 했니? 그만 놀아. 빨리 가자. 싸우지 마. 어서 가서 자. …… 아, 중간 중간에 이런 말이 들어갔겠지요. 엄마가 몇 번을 말했어? 제발 공부 좀 해!
그림책을 같이 읽으면요, 일단 대화 주제가 무궁무진해집니다. 특히 부모가 일부러 주제로 삼아 이야기 나누기 힘든 것들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해볼 수 있습니다. 『따귀는 왜 맞을까?』(페터 아브라함 지음, 게르트루드 쭉커 그림, 국민서관)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생쥐 로버트는 늘 엄마 아빠에게 장난을 칩니다. 문 앞에 숨었다가 엄마 아빠가 오면 꺅 놀라게 하는 거지요. 그럼 엄마 아빠도 깔깔 웃어요. 그런데 어느 날, 평소와 똑같이 장난을 쳤는데 아빠가 뺨을 철썩 때리는 겁니다. 아니, 평소엔 괜찮았는데 왜 오늘은? 엄마 아빠는 정말 너무해! 치사해! 로버트는 홧김에 화분을 걷어찹니다. 그런 후, 이웃집 까치에게 오늘 엄마 아빠 직장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지요. 아, 오늘 엄마 아빠가 마음이 편치 않으셨구나. 속상해서 예민해지신 거구나. 그제야 로버트는 자기가 걷어찬 화분 생각이 납니다. “아마 누구나 가끔은 공정하지 않은가 봐.”
오오, 이 책만큼 완벽하게 엄마를 변명해주는 책이 어디 있을까요? 평소엔 텔레비전을 보면서 밥을 먹어도 됐는데, 부부싸움을 한 날은 당장 가서 숙제나 하라고 소리를 꽥 질렀던 엄마의 흑역사를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설명해줍니다. 이 책을 읽고 꽃님이에게 오래 묵은 사과도 했고, 설명도 했습니다.
“꽃님아, 엄마도 일관성을 지키도록 애쓸게. 하지만 가끔은 왜 속상한지 설명도 하기 싫은 날이 있단다. 그럴 땐 네가 엄마 기분을 좀 살펴주면 좋겠어. 우리, 서로서로 그렇게 좀 봐주자, 응? 엄마도 네 마음을 잘 살필게.”
심오한 주제에 대해서도 훨씬 더 쉽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킹콩』(넥서스주니어)을 일곱 살 꽃봉이에게 읽어주다 말고 다시 한 번 그림책 표지를 살펴봤습니다. 이거, 애들 그림책 맞아? 영화 <킹콩> 아시지요? 그림책 『킹콩』은 영화와 줄거리는 똑같은데 느낌이 완전히 다릅니다. 아름답지만 가난한 여주인공은 사과를 훔치다 들킵니다. 경찰에게 잡혀가기 일보직전에 영화 제작자가 그녀를 구해주고, 다른 여배우들은 가려고 하지 않는 정글로 그녀를 데려가는데요, 그곳에서 킹콩이 그녀를 보고 그만 사랑에 빠져버린 겁니다. 그녀가 있는 도시, 높은 빌딩에서 최후를 맞는 킹콩을 보며 영화 제작자가 말해요. “킹콩은 단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을 사랑한) 그 마음이 결국 녀석을 죽인 것이지요.” 세상에, 이런 로맨틱한 사랑이라니요!
고릴라는 콧구멍이 커서 좋다는 일곱 살짜리 남자아이도 막연하게나마 사랑이 뭘까 그런 생각을 했나 봅니다. 이날, 잠자리에 서꽃봉이가 묻더군요.
“엄마! 나중에 내가 사랑에 빠졌어. 너무너무 사랑해. 근데 그 사람이 도둑이면 어떡해? 사과 막 훔치고 그러면? 결혼했는데, 안 착할 수도 있잖아. 그런데 나는 사랑해. 그럼 어떡해?”
목소리에 점점 근심이 담기더니, 급기야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이쿠!
“꽃봉아, 만약 안 착한 사람이랑 결혼해도, 니가 그 사람을 많이 많이 사랑하고 잘해주면 그 사람도 바뀌어. 사람들이 왜 사랑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사람을 바꾸기 때문에 기적이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엄마, 그런데 엄마는 어떻게 아빠랑 결혼한다는 걸 알았어? 나는 누구랑 결혼해야 할지 암만 생각해도 모르겠어.”
“아, 그건…… 엄마 심장이 말해줬어. 이 사람이랑 결혼하라고.”
“내 심장도 말해줘?”
“그럼, 말해주지!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고, 이 사람하고 있으면 어려운 일이 있어도 막 힘이 나서 헤쳐나갈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 만나면, 꽃봉이 마음이 다 말해줘.”
“말 안 해주면 어떡해? 내가 막 나이 들고 할아버지 됐는데도 말 안 해주면?”
“할아버지 때 말해주면 할아버지 때 결혼하지 뭐. 결혼할 나이가 됐다고 아무나 만나서 결혼하면 안 돼. 아무나랑 결혼 딱 하고 나오는데, 어떤 여자랑 마주친 거야. 근데 심장이 ‘앗, 이 여자야! 이 여자랑 결혼해!’ 하면 어떡할래? 그러니까 그 사람인 게 확실할 때 결혼해야 해. 그냥 아무나랑 하지 말고. 알았지?”
“알았어. 다른 사람 말고 내 마음의 소리를 잘 들을게. 근데, 아빠! 아빠는 어떻게 엄마랑 결혼한다는 걸 알았어? 아빠도 심장이 말해줘서 알았어?”
나 원 참. 남편이 뭐라고 대답했냐면요.
“아빤 몰랐어. 아빤, 그냥…… 당했어.”
콱!
궁금한 아이 마음 들여다보기
함께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은 점이 또 있습니다. 일단 엄마가 편하답니다. 처음 아이의 말문을 열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방법 중에 제일 편한 방법일 겁니다. 엄마 체력은 딸리는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칼싸움과 괴물놀이, 역할 놀이? 잠깐 즐겁고 나서 온 집 안을 치우느라 녹초가 되는 일? 오, NO! 눕든 앉든 그저 편한 자세로 함께 낄낄대며 몇 권 같이 읽고, 아이와 수다를 떨면 그만이거든요.
책만 잘 고르면 아이가 내내 종알거리기 때문에 엄마는 수다를 떨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그래?”, “정말?”, “우와~” 하고 추임새를 넣어가며 듣기만 하면 됩니다. (중간에 아이의 손을 가져다 뽀뽀를 하며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가 더 신이 나서 떠들지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죽겠는 내 아이의 마음을 더 오래,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랄까요? 남편과 연애할 때,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고 싶던 그 기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짜릿하답니다.
믿어지지 않으신다고요? 제가 아이와 노는 방법으로 책까지 냈을 정도로(『초간단 생활놀이』!) 어지간히 놀아봤는데요. 책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큼 초간단, 최고 재미는 드물다는 거! 보장할게요.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면 아이가 똑똑해지고 어쩌고 하는 그런 장점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히 그런 면이 있지만, 다른 장점들에 비하면 가장 사소한 것이거든요. 엄마 아빠와 함께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림책 읽고 이야기 나누기의 가장 큰 장점이니까요.
그림책은, 읽는 그 자체만으로도 ‘추억’이 됩니다. 심지어 그다지 좋은 책이 아니어도 추억이 됩니다. 아이와 ‘함께’ 읽기 때문이지요. 대부분 어떤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도 읽기는 각자 따로 하잖아요? 하지만 그림책은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순간에,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노라면, 어느새 기적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통하고 추억이 쌓이는 특별한 기적이요! 아이가 글자를 알아도, 혼자 책을 읽을 줄 알아도, 더 오래 책을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독서란 어차피 궁극적으로는 혼자 하는 것입니다. 작가와의 대화이고, 나 자신과의 대화이지요. 하지만 엄마 아빠와 같은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건 ‘독서’가 아니라 ‘관계’ 차원에서 정말 소중한 시간이거든요.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되고, 더 놀라워하고(“네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더 많이 같이 웃을 수 있는 기회랍니다.
웰컴 투 그림책 육아 : 0세부터 6학년까지 생각의 힘을 키우는 그림책 독서법전은주 저 | 북하우스
『웰컴 투 그림책 육아』는 0세부터 6학년까지 자녀를 둔 부모라면 유용하게 읽힐 수 있는 실질적인 그림책 안내서다. 딸과 아들을 키우며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 육아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연령에 따른 그림책 이해력의 차이와 남아와 여아가 선호하는 그림책도 참고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독후활동으로 미술놀이하기에 좋은 그림책’, ‘세계 공부가 되는 그림책’, ‘그림이 멋진 전래동화’, ‘3~7세 아이들에게 실패 없는 추천도서’ 등 주제별 베스트 그림책 목록도 착실히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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