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어느 거칠었던 순간 <원 와일드 모먼트>
불어에 대한 추억
영화의 배경이었던 ‘코르시카’ 해변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여배우가 애처롭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코르시카’는 아름다웠다는 것. 그리고 절벽을 향해 치닫는 아슬아슬한 사랑은 언제나 추락한다는 것.
이런 말을 내입으로 하긴 뭣하지만(이라 해놓고, 해보자면) 나는 극도로 한가한 사람이다. 남들이 보기엔 한심하다고 할 정도로 한가하다. 그런고로, 성수기 때 휴가 행렬에 끼어 복잡한 곳을 더 복잡하게 만들기엔 미안함을 느낀다. 하여, 휴가철이 되면 ‘음. 어쩔 수 없군’ 하는 심정으로 극장에 가서 해변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고 대충 때워버린다. 이런 까닭에 내 가슴 속 추억 서랍 안에는 아름다운 바다를 선사하는 몇 몇 영화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영화는 대니 보일 감독의 <비치>다. 태국의 피피 섬의 비밀스러운 자태는 언제나 감춰둔 속살을 보는 것처럼 흥분과 묘한 안식을 가져다준다.
하지만, 마냥 안식만 하고 있을 순 없으므로 종종 자극이 필요할 때 보는 영화도 있다. 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피라냐 3DD>를 상당히 즐겨본다. 개봉했을 때 상영관에 달려가 오렌지 에이드를 쪽쪽 빨면서 본 것은 물론이고, 개봉 후에도 영화를 구해 종종 봤다. 이번 여름에도 혹서로 고생할 때, ‘뭐, 어쩔 수 없잖아’ 하는 심정으로 <피라냐>를 또 봤다. 시대가 변해 이제 IPTV로도 영화를 보는데, 마침 올여름 무슨 무슨 특집이라는 이름으로 <피라냐>가 공짜로 제공돼 또 한 번 ‘거 참. 또 어쩔 수 없잖아’하며 봤다. 이제는 어떤 여배우가 무슨 수영복을 입고 있는지 외울 정도다(이렇게 뇌리에 남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다. 거, 참).
여하튼, 휴가를 시월에 가기로 작정한 나는 이번 여름 역시 그럭저럭 오렌지 에이드나 쪽쪽 빨면서 지냈는데, 무슨 영문인지 입추가 지났는데도 여름이 물러날 생각을 안 해 결국 다시 극장으로 기어들어갔다. 나처럼 사람들 눈치 보느라 휴가 못 간 노동자를 위한 영화가 없나 기웃거리니 마침 <원 와일드 모먼트>라는 프랑스 영화가 눈에 띄었다. 맙소사. 프랑스 영화라니. 여기서 잠깐, 딴 소리.
나는 학부시절 미국에서 교환학생을 하며, 기숙사에서 지냈는데, 2인 1실 원칙에 따라 룸메이트를 배정받았다. 나의 룸메이트는 카메룬에서 온 유학생이었는데, 카메룬이 그렇듯 그 역시 불어를 썼다. ‘알랭’이라는 이 친구는 영어를 항상 불어식으로 했는데(예컨대, ‘디듀 코흐피 뒤스 도큐흐멩뜨?: Did you copy this document?). 그는 언제나 불어에 대한 상당한 그리움을 간직하는 듯한 표정으로, 걸음걸이로, 손짓으로, 발짓으로, 눈빛으로 생활했다. 잠자는 모습도, 뒷모습도, 모두 불어가 그립다는 것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였다(예컨대, 잘 때면 불어 e 모음 위에 있는 삿갓모양(?)으로, 걸으며 어깨를 으슥하면 역시 e모음 위에 있는 점 두 개 모양(‥)이 되는 것이다). 그런 그가 쌓인 불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활화산처럼 분출시킨 날이 있었으니, 그 날은 어느 일요일 오전 내가 간만에 늦잠을 즐기기 위해 꿈속에서도 숙면을 취하는 날이었으니, 그는 수화기를 붙들고 자신의 친누나와 울면서 불어로 싸움을 하고 있었다. 그날 나의 꿈은 갑자기 불만에 가득 찬 프랑스 혁명대원들의 막강한 수다에 시달리며 공격당해 어딘가로 잡혀가는 걸로 바뀌었으며, 그러다 눈을 떠보니 그건 프랑스 혁명대원의 수다가 아니라 ‘알랭’의 눈물 젖은 불어였다는 걸 깨닫고 불어의 수면 뇌파에 대한 호전성을 깨달았다. 뭐랄까, 그 불어는 당장 귀마개를 사러 달려가고 싶게끔 만든달 까나. 여하튼, 그 날 이후 나는 지난 13년간 불어에 대한 공포를 품고 있었는데, 결국 바캉스 영화 <원 와일드 모먼트>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 하나. 영화 <원 와일드 모먼트>는 휴가를 간 여고생이 아버지 친구인 ‘뱅상 카셀’과 위험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뱅상 카셀은 실수를 저지르긴 했으나, 이 여고생이 안중에 없으니 그만 여고생은 몇 번이나 눈물을 머금고 말을 하려했다. 나는 ‘아아, 제발 울부짖으며 불어를 하진 말아줘’라고 애원했으나, 그녀는 내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행인 것은, 여배우의 울부짖음은 ‘알랭’의 절규만큼이나 소란스럽지도, 뇌파를 자극하지도 않았다. 당장, 극장을 뛰쳐나가 귀마개를 사고 싶은 욕구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모난 부분이 세월에 깎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영화의 배경이었던 ‘코르시카’ 해변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만큼 아름다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여배우가 애처롭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코르시카’는 아름다웠다는 것. 그리고 절벽을 향해 치닫는 아슬아슬한 사랑은 언제나 추락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 ‘알랭’도 다시 보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알랭. 이 원고 보면 전화해. 크루아상 사줄게’
(물론, 알랭이 한국어로 된 이 원고를 볼 일이 없어서 하는 말이다. 잘 먹고 잘 살아라. 울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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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