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음악 > 주목, 이주의 앨범
신보의 모양새는 어느 정도 예상됐다. 2000년 무렵서부터 블러의 지휘권은 데이먼 알반의 손으로 들어갔다. 같은 시기 일렉트로니카와 아트 록, 월드 뮤직으로 향했던 이 프론트 맨의 왕성한 시도는 자연스레 그리고 당연히 밴드에 영향을 끼쳤다. < Think Tank >가 그랬던 것처럼 < The Magic Whip > 역시 데이먼 알반의 실험이 가득 찬 결과물로 나올 공산이 컸다. 하지만 동시에 블러에게는 블러일 의무도 있었다.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한 명의 시각으로 그룹 전체가 묶이는 상황은 그리 반갑지 않은 일이다. 데이먼 알반의 예술관과 그룹의 정체성 사이에서 이들은 괜찮은 접점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 점에 있어 < The Magic Whip >는 현 시점의 블러가 보일 수 있는 가장 멋진 산물에 해당한다. 물론 데이먼 알반의 솔로 앨범 < Everyday Robots > 식의 일렉트로닉 사운드로부터 완벽히 자유롭지는 못 하다. 그러나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블러라는 이름 아래서 네 멤버는 훌륭한 호흡을 보이고 있다. 데이먼 알반의 스타일과 긴 공백을 깨고 돌아온 기타리스트 그레엄 콕슨의 터치가 탁월한 균형미를 보이고 여전한 멜로디 감각이 노래의 곳곳에서 상당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장르와 작법을 가리지 않고 여러 시도로 무장한 트랙 리스트 내의 다채로운 접근법들이 이들의 역량을 더욱 부각시킨다.
밴드 이름을 한자어로 표현한 앨범 자켓 위의 단어처럼 모호(模糊)한 사운드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댄서블한 로큰롤 「Lonesome street」을 시작으로 < Blur > 시기와도 어느 정도 연결되는 노이즈 록 「Go out」과 뉴웨이브 넘버 「I broadcast」, 사운드스케이핑에 한껏 집중한 「Thought I was a spaceman」, 「New world towers」, 「Pyongyang」로 이어지는 전반의 흐름은 소구를 자극할 장치들을 좀처럼 노출하지 않는다. 각양으로 갈라진 곡들과 파편처럼 부서진 듯한 소스들이 쉬운 접근을 막는다. 밴드가 그려낸 이질적인 상들은 햔 눈에 들어오기보다는 주변시(周邊視)에서 자주 아른거린다.
< The Magic Whip >에 놓인 블러의 방법론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밴드는 우선 다각으로 소리를 변형하는 데에 외연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간감을 불어넣어 부피를 키워내고 노이즈를 집어넣어 이질감을 끌어내 여러 분위기를 연출해내고자 한다. < 13 >서부터 시작된 그룹의 소리 실험 위에 < Everyday Robots >까지 도달하면서 한 차례 완성된 데이먼 알반의 전자음악이 더해진 형상이다. 소리의 혼합으로 독특한 상(像)을 잘 구현해내는 「Go out」과 「Thought I was a spaceman」을 이번 음반의 대표 양상으로 꼽을 만 하다.
가치는 더 나아간 지점에서 형성된다. 고난도의 변이만이 음반의 미학을 채우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멜로디 주조에서의 높은 역량은 앨범에 즐길 모먼트들을 다수 부여한다. 훌륭한 오프닝 「Lonesome street」의 전체를 관통하는 팝 멜로디는 말할 것도 없고 「Go out」과 「I broadcast」의 재미있는 훅 라인, 「Pyongyang」의 차분한 선율에도 매력이 담겨있다. 그레엄 콕슨의 기타 또한 마찬가지다.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캐치한 리프들은 기타리스트의 부재에서 비롯된 그간의 갈증을 단숨에 해소시킨다. 음반의 의미는 새로운 사운드 콜라주와 기존의 멜로디 메이킹이 이루는 결합에서 발생한다. 휴지기에 가졌던 변화가 밴드의 흐름에 잘 녹은 형태다. 20년이 넘는 지난 시기동안 보여 온 밴드의 재기에 더욱 복잡다단한 방식을 얹는 이번 작품의 형태로부터 그룹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다. 블러는 자신들의 행로에 < The Magic Whip >이라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2015/05 이수호 (howard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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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blur, The Magic W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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