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결국은 각자의 몫 <이미테이션게임>
반복적 선택과 포기의 게임
2차 대전이 행해졌던 70년 전의 유럽에서도, 고독이든 연대든 어느 쪽이라도 전쟁 같은 일상을 치러야 하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택함과 포기는 계속 된다.
지난 2주간 황사까지 뿌려대며 성미를 부린 겨울의 끝자락에서 DVD로 <용서받지 못한 자>와 <축제일: Jour de Fete>을, 개봉관에서 <이미테이션게임>을 봤다.
홀로 <이미테이션게임>을 보러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으니, 스크린 속의 주인공 앨런 튜닝 역시 외로워 보였다. 우리는 표면적으로는 외롭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둘이 겪는 외로움의 본질적인 이유는 화성과 목성의 거리만큼 멀었다. 그가 외로운 이유는 간단했으나, 희소했다. 그는 자신을 천재로 여기기고, 다른 이들과 ‘경계짓기’를 시도했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그는 동료와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스스로 천재라고 칭하며 주변을 무시하는 사람은 간단히 말해 재수가 없고, 냉정히 말해 사회성이 부족하고, 엄밀히 말해 배려심이 부족한 것 아닌가. 지성적으로는 합격점을 넘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적으로는 수준 미달인 것이다. 결국 외로움을 자초한 셈이다.
하나 현대인들이 외로운 이유는 자신을 천재라고 규정짓기 때문이 아니다. 경제적 동물로 생존하기 위해 바쁘게 지내다보니 외로워졌다는 사실을 차치하자면, 현대인들이 외로운 것은 내 생각에 기대치가 높기 때문인 것 같다. ‘이 정도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 ‘이 정도의 배려는 기본이 아닌가?’ 하며 저마다 설정해놓은 기준이 실제로 사람들이 행하는 행동의 수준보다 높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평가를 거듭할수록, 반대급부처럼 자신에 대한 연민은 깊어지며, 그럴수록 자기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들과만 상대하려 하다 보니 더욱 외로워진다. 함부로 평가하지 말자는 윤리 교과서에나 실릴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반성 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여기까지 내 이야기였다. 물론 과거형이다.
나는 작년부터 많은 것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인간에 대한 기대치를 낮춘 것이다. 이제는 갑자기 내게 와서 주먹질만 해대지 않는다면, 내 기준치의 이하로 떨어지지 않는다. 좀 더 복잡하고 골치 아파졌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 물론, 이 기준치는 각자 선택하기 나름이다. 어떤 이는 고귀하고 고독한 삶을 택할 것이고, 어떤 이는 부대끼지만 함께하는 삶을 택할 것이다. 어차피 인생에서 취하는 모든 선택에는 양과 음이 있으니까. 고귀한 삶을 택한 이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행복’을 포기할 것이고,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택한 이는 ‘숭고하고 고결한 삶’을 포기할 것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앨런 튜링은 2차 대전 당시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영국군 정보부에 스카우트된다. 동료들과의 불화, 상관의 압박을 겪고, 자괴감에 빠지게 한 시행착오를 거듭한 후, 그는 마침내 독일군의 암호를 해독해내고야 만다. 하지만, 그는 해독해낸 독일군의 암호를 작전에 전부 반영해 모든 전투를 승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 자신들의 암호체계가 연합군에게 발각됐다는 것을 눈치 챈 독일군이 암호를 바꿀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몇 몇 전투의 승리를 택하고, 몇 몇 전투의 승리를 포기한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 같은 몇 몇 대규모 작전의 승리를 택하여, 결국은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2차 대전이 행해졌던 70년 전의 유럽에서도, 고독이든 연대든 어느 쪽이라도 전쟁 같은 일상을 치러야 하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택함과 포기는 계속 된다. 결국, 모든 것은 각자의 몫이다.
<용서받지 못한 자>와 <축제일>은 커피숍에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봤다. 어색했지만, 그런대로 매력이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선택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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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