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하게 생채기를 내는 예술이 있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갈증>은 차가운 시선으로 객관화된 이야기를 관찰하게 하는 영화가 아니다. <갈증>은 뜨겁게 부글부글 끓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이 부어 화상을 입히는 영화다. 인간의 가장 저열하고 추악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죄의식을 공유하게 만든다. 마치 상처 난 살갗에 소금을 뿌리는 것 같다. 다양한 사람들의 시점과 미스터리한 이야기의 배치를 통해 소녀 ‘카나코’의 실체를 되짚어가면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손잡이가 아니라 날이 선 칼날을 관객에게 들이댄다. 그래서 불편하거나 불쾌할 수 있다. 어차피 즐기라고 만든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이라는 민낯을 감당할 자신이 있는 관객에게만 권하고 싶은 영화다.
<갈증>은 전직 형사 후지시마(야쿠쇼 코지)의 찌질하고 대책 없는 삶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혼한 아내가 갑자기 실종된 딸 카나코(고마쓰 나나)를 찾아달라고 전화한다. 여기에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더한다. 그의 기억 속 딸은 평범하고 착한 아이였다. 단순한 피해자일거라고 생각한 딸의 행적을 쫓아가던 중 후지시마는 절대 보고 싶지 않은 딸아이의 실체와 마주한다. 나의 사랑스러운 딸은 그저 예쁘고 선량한 그런 아이였을까? 나카시마 데쓰야 감독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폭력밖에 없는 찌질한 후지시마라는 남자의 비극을 우스꽝스럽게 비틀면서, 갈증의 실체를 드러낸다. 전작 <고백>을 통해 학교 폭력과 인간의 잔혹함을 차갑고 냉정하게 드러냈던, 테츠야 감독은 <갈증>을 통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일본 사회의 폐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아주 골 깊은 현실이 된 원조교제, 방치된 학원폭력, 배려 없는 이혼가정, 손댈 수 없는 경찰 비리와 야쿠자의 행태 등이 똬리 틀고 있다가 갑자기 독이 든 이빨을 드러내는 뱀처럼, 일상적인 모습으로 동그마니 웅크려 있다.
이야기와 주제의 무게감 때문에 어둡고 칙칙한 느낌을 가지겠지만, <갈증>은 꽤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비튼다. 타란티노를 떠올리게 하는 키치적인 타이틀도 뜬금없지만, 곳곳에 배치된 스타일리시한 화면 위를 흐르는 음악은 깃털처럼 가볍고 경쾌하다. ‘가장 격렬하고 과격하며 현란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표현처럼 그의 영화는 지나치게 냉정하거나, 부글부글 끓는 물처럼 뜨겁다. 과거와 현재,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정신없이 오가는 이야기 구조 속에 선과 악의 경계가 무너진 인물들, 잔혹한 신체훼손 장면 사이에 뮤직 비디오를 닮은 감각적인 영상, 때론 이와이 슌지가 연상되는 청춘 로맨스 같은 이미지도 녹아들어 있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차가운 복수를 담아내는 <고백>이 냉정하고 차분해서 더욱 차갑고 시린 메시지를 전했던 것과 반대로 악마 같은 딸아이의 행적을 발견하는 <갈증> 속 아버지의 자각은 그 분노의 대상이 용암처럼 들끓어 주위를 모두 녹여버린다.
CF 감독 출신답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감각적이고 역동적인 영상 속에 극단적이지만 충분히 이해 가능한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재능이 뛰어나다. <불량공주 모모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고백> 등 주로 여주인공을 통해 이야기를 직조해 갔다면 <갈증>의 중심은 야쿠쇼 고지가 만들어내는 후지시마에 실려 있다. 잔혹하면서도 찌질하고, 불쾌하면서도 연민을 느끼게 만드는 복합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여기에 늘 온화하고 밝은 미소로 기억되는 쓰마부키 사토시가 비열한 미소를 짓는 불량 형사로 등장해 불쾌감을 선사하고, 오다기리 조가 비리 경찰로 등장해 반가울 새도 없이 죽어나간다. 백지처럼 연기경력이 없는 신인배우 고마쓰 나나는 선량하고 예쁜 얼굴 뒤에 숨겨진 악마성을 드러낸다. 여기에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의 나카타니 미키가 카나코 실종의 비밀을 알고 있는 담임선생으로 출연하여 테츠야 감독과의 인연을 이어간다.
<갈증> 속 세상은 현실이라 더욱 뜨거운 지옥 같아 보인다.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한 여인의 기구하고 서러운 인생을 화려하고 감각적인 영상 속에 담아낸 뮤지컬 형식의 영화였다. 테츠야 감독은 한 여인의 잔인한 불행을 화려한 춤과 노래, 과장된 CG와 애니메이션 속에 녹여낸다. 이 잔혹한 여성 수난극의 판타지는 이야기를 흩어놓지 않고 그녀의 인생에 ‘희망이라는 자기기만’이 얼마나 간절했었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역설’의 미학을 통해 이 보여준 삶의 지옥은 <갈증>에서 더욱 짙어졌다. <갈증>의 마지막 장면은 후지시마의 풀어낼 방법이 없는 죄의식과 집착으로 끝난다. 영화를 보는 동안 알게 되겠지만, 후지시마의 기억 속에 아내와 딸 카나코는 CF 속 모녀처럼 정제되고 인위적인 모습이다. 카나코의 과거를 되짚어가는 과정에 카나코와 후지시마가 함께 있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사실이었는지, 후지시마의 환상이었는지 밝혀지진 않았지만 후지시마와 카나코는 가장 지독하고, 추악한 욕망 속에서만 함께 한다. 테츠야 감독은 후지시마와 카나코가 결국은 악마의 피를 공유한 하나의 욕망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카나코와 사랑에 빠진 왕따 소년 나(시미즈 히로야)의 대사는 무척 인상적이다.
인간이 적성에 맞지 않아
시민 케인?
마치 교과서처럼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닌 공부하고 분석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가 있다. 또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알지만, 실제로 본 사람은 적은 영화가 있다.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도 그런 영화 중 하나이다. 사실 큰 기대와 걸작에 대한 부담감을 내려놓고 굳이 분석을 하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보면, <시민 케인>은 굉장히 스타일리시하고 흥미로운 영화다. 5명의 내레이션과 교차편집, 다양한 촬영기법이 시도되었다. 무엇보다 <시민 케인>의 가치는 지금에도 유효하고 설득 가능한 이야기 그 자체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그 속의 개인의 욕망,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한 질문은 21세기에도 유효한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갈증>에서 <시민 케인>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이고, <시민 케인>을 언급하는 <갈증> 관련 평론도 꽤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갈증>을 통해 의도적으로 거장에 대한 오마주를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형식으로만 보면, <갈증>은 필름 누아르나 1960년대 탐정영화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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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