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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된 시간의 상실과 그 공포, <내가 잠들기 전에>

기억의 복원, 그 불완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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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잠들기 전에>가 더욱 기대되었던 이유는, 주인공이 매일 눈을 뜨자마자 스스로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매일 인식해야 하는 비관적이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억상실이란 소재는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꽤 구태의연하게 사용되어 식상한 감이 있지만, 선입견을 내려놓고 보면 꽤 묵직하고 철학적일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어느 날 기억이 멈춘 나를 발견할 때의 공포를 상상해 보라. 젊고 팽팽하고 예쁘던 얼굴이 아닌, 늙어버린 얼굴로 깨어나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다. <내가 잠들기 전에>는 지금 현재에 우뚝 선 내게 공유된 시간이 뭉텅 사라져 버린 순간의 그 공포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여기에 한 가지 철학적 질문이 붙는다. 대체 나는 누구인가?

 

 

기억의 복원, 그 불완전함

 

우리의 기억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의 한 마디에, 우연히 듣게 된 노랫말에 우리의 기억은 과거로 돌아갔다가, 다시 현실로 되돌아온다. 영화의 점프 컷처럼 구성된 우리의 기억은 편집이 화려한 영화처럼 역동적이지만, 기억을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전혀 맥락이 없는 화면처럼 보인다. 오늘의 내가 있는 이유는, 아마 어제 잠들기 전의 나를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 사라진 후, 도저히 나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의 공포는 어쩌면 근원적이다. S. J. 왓슨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한 로완 조페 감독은 <내가 잠들기 전에>는 기억의 불완전함과 현재의 나 자신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주인공 크리스틴(니콜 키드먼)은 40대 주부지만, 20대에 기억이 멈춰있다. 아침에 눈을 뜰 때 마다 난생 처음 보는 남편 벤(콜린 퍼스)과 중년이 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놀라는 일이 그녀에게는 일상이다. 벤은 끈기 있게 크리스틴의 상황을 설명해주고, 그녀는 매번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지만 무언가 남편의 태도에는 비밀이 감춰진 듯하다. 어느 날 남편이 출근한 후 정신과 상담의라는 내쉬 박사(마크 스트롱)가 전화를 걸어 침대 서랍장 아래에 카메라가 숨겨져 있다고 말한다. 카메라에는 ‘벤을 믿지 말라’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찍혀 있다. 과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내가 잠들기 전에>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아무도,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는 암흑 같은 기억 속에서 대체 나는 누구인가, 내 주위의 그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 미스터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어느 날 툭 낯선 현실에 떨어진 크리스틴의 기억은 백지 상태이다. 역시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관객들은 크리스틴과 함께 이 기억이라는 미스터리, 나의 존재를 찾아가는 미로 게임에 동참하게 된다. 니콜 키드먼의 신경병적인 연기와 콜린 퍼스의 뭔가 미심쩍은 듯한 분위기는 영화를 더욱 긴장감 넘치게 만든다. 알 듯 말 듯한 기억의 파편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파생되는 팽팽한 강박 역시 중반까지 꽤 내밀하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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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잠들기 전에>가 더욱 기대되었던 이유는, 주인공이 매일 눈을 뜨자마자 스스로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매일 인식해야 하는 비관적이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강박증에 빠진 병약한 크리스틴은 과거의 자신을 유추하거나, 과거의 자신이기를 희망하는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자신이 과거에 나쁜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는 공포, 자신의 과거가 기대 이하였다는 답을 들을 때마다 좌절되는 그녀의 모습은 병적인 아픔을 준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아주 많이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남편과 의사, 이 모두를 믿을 수 없다. 이들 역시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완전히 타인이다. 그들과 어떤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지, 어떤 시간을 함께 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완전한 공포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이런 긴장감이 반전으로 이어져, 관객과의 두뇌게임을 해야 하는 시점에서 이야기가 너무나 평이해 진다는 것이다. ‘모성’으로 답을 찾으려는 시도는 뭉클한 감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그 동안 쌓아왔던 것들에 비해 너무 쉬운 답안지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러 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잠들기 전에>는 가장 두려운 순간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공유한다. 극적 재미를 위해 반전과 비밀들을 곳곳에 배치해 두지만, 크리스틴이라는 여인과 함께 단절된 하루하루를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그녀의 인생에 아무런 희망도 없을 거라는 인식은 좌절감을 안긴다. 어쩌면 내 인생도 그럴 수 있다는 좌절이야 말로 이 영화가 주는 가장 뚜렷하고도 확고한 공포다.

 

 

 

● 함께 보면 좋을 영화 <헨리의 이야기>

 

기억시간 15분이라는 소재로 기억상실에 대해 가장 창의적인 변주로 기억되는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00년 작품 <메멘토>이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2004년 <이터널 선샤인>은 자신의 의지로 기억을 지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멜로, 로맨스로 풀어낸 흥미롭게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이외에도 기억상실에 대한 영화는 다양하지만, 그중 <내가 잠들기 전에>와 함께 비교해 보면서 봐도 좋을 작품은 마이크 니콜스 감독의 1991년작 <헨리의 이야기>다. 아름다운 아내와 딸을 가진 뉴욕 최고의 변호사. 뜻하지 않은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에서 깨어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수록, 과거의 나는 내가 기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거를 되짚어 가는 과정이 미스터리한 재미가 있고, 결국 가족에 대한 사랑이 최고의 미덕임을 강조하는 결말도 억지스럽지 않다. 당시 꽃중년 해리슨 포드와 30대였던 아네트 베닝의 모습이 너무 풋풋해서 반갑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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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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