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사전에서 ‘뿔났다’는 화가 났다는 뜻이다. 영화 <혼스>는 분하고 화가 나서 정말 뿔이 생긴 남자의 이야기다. 2010년 <피라냐 3D>를 통해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고어 영화의 진수를 보여줬던,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2010년 출간되어 뉴욕타임즈 6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등극함은 물론 전 세계 22개국에 번역된 작가 조 힐의 동명소설 『혼스 Horns』가 원작이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욕망을 날카롭게 해부하면서 사랑과 구원을 이야기한다는 극찬을 받은 그가 스티븐 킹의 아들이란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여기에 <해리 포터>의 잔영을 지우고 20대 남자배우의 매력을 덧입혀가는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귀여운 얼굴에 당돌한 매력까지 겸비한 주노 템플이 만들어내는 케미까지 더해졌으니 <혼스>는 기대해도 좋은 작품인 것 같다. 하지만, <혼스>는 많은 관객들의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판타지 영화인가?
이그(다니엘 래드클리프)의 연인 메린(주노 템플)은 이그의 청혼을 거절한 날 저녁, 시신으로 발견된다. 경찰과 마을 사람들은 용의자로 이그를 지목하지만 결정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그를 살인자라고 믿어 버린다. 연인을 잃은 충격에 더해,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의심받는 상황에 처한 이그는 어느 날 아침 이마에 돋은 뿔을 발견한다. 악마가 된 것일까? 뿔이 생긴 후 그에게는 놀라운 능력이 생겼다. 경찰이건 의사건, 누구건 상관없이 그 앞에만 서면 사람들은 마음 깊이 숨겨둔 지극히 개인적이고 추악하며, 잔혹한 욕망을 서슴없이 털어놓는 것이다. 아야 감독이 가장 공 들인 장면도 뿔 달린 이그 앞에서 자신들의 속내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사람들이 가면을 벗고 무장 해제되는 에피소드 들이다. 뿔의 힘과 뱀의 도움을 빌어 이그는 메린을 죽인 진짜 범임을 결국 찾아낸다. 극적으로 보면 당연히 의외의 인물이지만,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중반부가 넘기 전에 범인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고 영화를 보는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사실 <혼스>는 결말을 알고 봐도 상관없는 영화다. <혼스>는 관객과의 두뇌게임을 벌이는 영화가 아니라, 황당함 속에 감춰진 블랙 유머와 선물처럼 등장하는 고어를 즐기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알렉산드르 아야 감독은 B급 영화의 감성을 버리지 못했고, 주노 템플은 언제나처럼 도통 주류 영화의 히로인이 되고 싶은 욕심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해리 포터를 지우려고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혼스>는 다니엘 래드클리프의 변신을 대표할 만한 영화가 될 것 같진 않다. 영화는 호러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를 넘어 코미디와 로맨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줄곧 장르적 장난을 친다. 충분히 많은 예산이 있었음에도 공 들인 티가 나지 않는 장면들 사이로 신나게 뒤섞인 장르의 뒤범벅이 호기롭게 새로운 형태로 거듭나진 못했다. 뭔가 굉장히 로맨틱할 것 같으면 멈춰서고, 좀 더 잔혹할 것 같은 순간에 딱 거기까지만 보여준다. 연인들의 감성을 흔들어야 할 순간은 장난스럽고, 가장 잔혹해야 할 순간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굳이 장르로 나눠야 한다면 <혼스>는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작품이다. 하지만 사랑과 구원의 가치를 되묻는 원작소설에 비한다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해진 것은 아쉽다.
악마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악마도 결국 타락한 천사였다, 라는 대사를 통해 <혼스>는 줄곧 선과 악의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악마의 뿔을 단 이그보다 더 추악한 사람들의 욕망을 우스꽝스럽고 씁쓸하게 나열한다. 이그와 멜린의 로맨스를 그린 과거의 장면들은 로맨틱 멜로처럼 서정적이고, 누명을 쓴 이그가 뿔의 힘을 빌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은 판타지 스릴러의 재미를 충분히 선사한다. 하지만 장르적 재미와 상관없이 뱀과 뿔이라는 상징, 십자가 목걸이가 가진 힘, 그리고 사랑과 구원이라는 결말로 나아가야 할 영화의 후반부는 아쉽게도 줄곧 맥락이 없다. 잠깐씩 등장하는 수위 높은 고어적 묘사도 아야 감독의 팬이라면 짧아 아쉬울 테고, 이야기를 쫓아온 관객들에게는 뜬금없어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혼스>는 때론 사랑스럽고 관능적인 멜로의 색채를 유지하고 있는데다, 곳곳에 재미있는 장면들을 숨기고 있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이토록 뜨거운 사랑을 노래하고, 인간의 추악한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애절하거나 진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아이러니라니. 그렇게 <혼스>는 낄낄거리며 관객들에게 실없어 보이는 농담을 거는 영화다.
주목, 주노 템플
2007년 조 라이트 감독의 <어톤먼트>를 통해 주목받았던 주노 템플은 다수의 실험적인 작품을 통해 차츰 성장해가고 있는 배우다. 2009년 조던 스콧 감독의 <크랙>에서 사건의 열쇠를 쥔 소녀로 등장했다. 2010년 그렉 아라키의 <카붐> 등 실험적인 작품에서 주인공을 맡아 특유의 도발적이면서 의뭉스러운 매력을 드러냈다. 주노 템플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베 실비아 감독의 2010년 작품 <더티 걸>이다. 되바라졌지만 밉지 않고, 마음까지 따뜻한 소녀의 성장영화에서 주노 템플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세상을 비웃지만, 게이 친구와 우정을 나누며 자라난다. 이후의 역할들도 평범하지 않다. 롭 앱스타인 감독의 <러브레이스>에서는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함께했고, <씬 시티 : 다크 히어로의 부활>에선 조연이지만 강렬하고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다양한 작품에서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존재감을 늘여가고 있는 그녀는 최근 안젤리나 졸리와 함께 한 <말레피센트>의 시슬 트윗으로 등장, 많은 관객과 소통했다. 도통 주목받는 히로인이 될 욕심이 없어 보이지만, 자꾸 눈길이 간다. 2015년 캐스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영화가 5편 이상 되는 걸 보니, 점점 더 자주 이 배우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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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