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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후기낭만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
슈트라우스와 말러 같은 이들이 활약했던 이른바 세기말과 20세기 초반은 문화사적으로도 큰 변동이 있었던 ‘전환의 시기’입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64년에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습니다. 네 살 위의 구스타프 말러와 더불어 후기낭만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로 자리매김돼 있지요. 한데 이 시기, 그러니까 슈트라우스와 말러 같은 이들이 활약했던 이른바 세기말과 20세기 초반은 문화사적으로도 큰 변동이 있었던 ‘전환의 시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중요한 것으로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의 확산을 꼽을 수 있겠지요. 영화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1895년 12월 23일, 뤼미에르 형제의 필름을 프랑스 파리의 한 카페에서 유료로 상영한 날을 기점으로 꼽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을 대중적으로 복제하는 것을 가능케 했던 또 하나의 테크놀로지, 즉 음반의 탄생은 언제 일까요? 널리 알려져 있는 에디슨의 축음기 발명은 1877년에 이뤄졌고 12년 뒤에 일반에게도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량생산이 가능한 납작한 형태의 음반은 미국의 독일계 이민자인 에밀 베를리너가 1887년에 개발했지요. 점차 기술이 발전해 1920년대 중반에는 베토벤의 모든 교향곡을 음반으로 구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물론 당시의 음반은 한 장에 녹음할 수 있는 분량이 많질 않았으니 베토벤 교향곡을 전부 다 들으려면 아마도 수십장의, 거의 100장쯤의 음반이 필요했을 겁니다.
슈트라우스는 20세기 중반인 1949년까지 살았습니다. 향년 85세였지요. 하지만 말러는 1911년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이 두 명의 음악가는 작곡가인 동시에 당대의 지휘자이기도 했지요. 한데 말러가 지휘한 음악은 음반으로 남아 있질 않습니다. 그렇지만 슈트라우스는 음반을 남겨 놓고 있습니다. 세기말부터 활약한 음악가 중에서는 아마도 유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피아노 연주와 지휘를 음반으로 남겨놓고 있긴 하지만 그는 슈트라우스보다 거의 열살 아래입니다.
오늘은 이 무뚝뚝하고 자신감 넘치는, 그러면서도 세속적인 두뇌회전이 빨랐던 음악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뮌헨 궁정악단의 호른 주자였지요. 그러고 보니 유명한 음악가 중에는 아버지가 호른 연주자였던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로시니가 그렇고요, 또 브람스의 아버지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콘트라베이스와 호른을 연주하던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로시니나 브람스의 아버지가 거의 무명의 연주자였던 것과 달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바이마르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연주자였고 음악원 교수이기도 했습니다. 또 어머니 요제피네는 뮌헨에서 유명한 양조업자의 딸이었지요. 그 시절부터 이미 뮌헨은 독일 맥주산업의 중심지였습니다. 다시 말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습니다.
바이마르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독일에서도 보수적인 곳으로 손꼽힙니다. 몇 해 전에 뮌헨에 간 적이 있었는데, 솔직히 말해 매우 배타적인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면에 일일히 옮기기는 좀 그렇지만, 뮌헨 사람들은 독일의 다른 도시 사람들에 비해 유난히 도도했고 아시아인에 대해 차별적 시선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그로부터 몇 년 뒤에 다녀온 베를린은 완전히 분위기가 달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도시는 젊고 개방적이고 인간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화려한 상업도시의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건축가 승효상씨가 어느 칼럼에선가 베를린을 일컬어 “성찰의 도시”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저 역시 베를린을 며칠간 돌아다닌 끝에 그 말에 동의하게 됐습니다.
어쨌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뮌헨의 유복한 집안에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음악적으로는 정통주의자인 아버지 밑에서 컸습니다. 당연히 아버지에게서 첫 음악교육을 받았겠지요. 뿐만 아니라 그는 아버지의 직장인 뮌헨 궁정악단의 리허설에 가서 연주를 듣는다거나, 아버지의 동료들에게 피아노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당시 궁정악단 악장이었던 프리드리히 마이어는 이 신동에게 작곡이론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정규 음악원에서 공부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20세기를 바라보는 시기였음에도, 정규 음악대학이 아니라 뮌헨의 음악계가 그를 키워낸 셈입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아버지 프란츠의 영향력이 있었겠지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8살이 되던 1882년에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해 뮌헨대학에 들어가는 하지만 그가 공부한 것은 철학과 미학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대학을 다 마치지 않았지요. 이미 바이마르에서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고 있던 슈트라우스는 열아홉 살 때 당대의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1830~1894)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훗날 뷜로와의 만남에 대해 자신의 음악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이었다고 술회합니다. 그 만남은 두 가지 맥락에서 슈트라우스에게 큰 의미를 갖게 되지요. 하나는 지휘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바그너와 리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신독일악파’의 음악에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슈트라우스의 재능을 높이 샀던 뷜로는 1885년에 자신이 지휘를 맡고 있던 마이닝겐 궁정악단에 부지휘자 자리를 마련해줍니다. 물론 슈트라우스가 지휘자로 데뷔한 것은 그보다 한 해 전 뮌헨에서였지요. 하지만 마이닝겐에서 뷜로의 부지휘자가 됐다는 것은 스물한 살의 젊은이가 상상하기 어려웠던 영광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악단의 악장이었던 알렉산더 리터(1833~1896)는 열렬한 바그너 지지자였습니다. 슈트라우스는 훗날 서른 살 많은 리터와 나눴던 우정, 그로부터 받았던 음악적 영향에 대해 고백하기도 했지요. 음악적 정통주의자였던 슈트라우스의 아버지 프란츠는 아들이 ‘신독일악파’에 경도되는 것을 그토록 경계했지만 대세는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독일의 후기낭만 음악에서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지대합니다. 슈트라우스도 결코 피해갈 수 없었지요. 그의 음악에서 나타나는 대규모의 관현악 편성, 반음계적이고 불협화음적인 화성 등은 바그너에게서 적잖은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케 합니다. 또한 그는 리스트와 바그너가 그랬던 것처럼 음악과 음악 외적인 것의 결합을 계승하고 있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음악에 문학과 철학, 역사 등의 결합을 꾀하면서, 음악평론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1825~1904) 등이 주도한 이른바 ‘음악의 순수성’과 대척점에 섰던 것이지요. 오페라와 더불어 슈트라우스의 대표적인 음악적 업적으로 손꼽히는 ‘교향시’가 바로 그 지점을 잘 보여줍니다. 슈트라우스는 음악 인생의 전반부에는 교향시에, 후반부에는 주로 오페라에 집중했지요.
슈트라우스의 음악 인생에서 표제를 지닌 교향시에 집중했던 이른바 ‘교향적 시대’는 <돈 후앙>(‘돈 주앙’으로도 표기)을 완성했던 1888년부터 약 10년간입니다. 그는 이 10년 동안에 그의 교향시들을 대부분 작곡했지요. <돈 후안> 이후에 <죽음과 변용>(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1895),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96), <돈 키호테>(1897), <영웅의 생애>(1898) 등으로 이어집니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를 듣겠습니다. 아마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일 겁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1968년에 만든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덕분에 대중적으로도 유명해졌지요. 물론 이 영화에서는 리게티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음악도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인상에 더욱 강하게 남는 게 사실입니다. 음향 자체의 강력함 때문일 수도 있겠고 영화 속 장면이 인상적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영화의 막이 오르고 서서히 태양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장면에서, 또 유인원들이 정체불명의 돌기둥 앞에서 죽은 짐승의 뼈다귀를 들고 뼈더미를 내려치며 포효하는 장면에서도 이 곡이 등장합니다. 또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암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도 역시 이 곡이 들려옵니다. 오르간의 지속음에 팀파니와 금관이 어울려 장쾌한 포효를 터뜨리지요.
알려져 있다시피 이 교향시는 니체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작곡의 영감을 받은 곡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니체는 이 저작을 1883년부터 1885년에 걸쳐 썼는데, 한때 뮌헨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던 슈트라우스도 물론 이 책을 읽었겠지요. 하지만 그가 니체의 자유의지와 초인 사상에 얼마나 절실하게 공감했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삶은 니체적이라고 하기는 좀 어렵지요. 니체는 안락한 삶을 거부하라고, 가혹한 운명 속으로 뛰어들어 투쟁하라고 말했던 철학자입니다. 그 투쟁 속에서 인간은 보다 강하고 심원하며 아름다운 존재로 고양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초인이 등장하는 겁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 사람, 그 고난 속에서 자아를 완성하는 사람이지요.
어쨌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니체의 책 제목을 음악의 표제로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니체의 서문을 악보의 머리에 게재하기도 했지요. 말하자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이 곡은 음악에 철학의 결합을 꾀하고 있습니다. 물론 슈트라우스는 “나는 철학적 음악을 쓰려는 것이 아니고 니체의 위대한 저작을 음악으로 그리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음악으로 인류의 기원과 발전의 여러 양상을, 니체의 초인이라는 관념에 이르기까지를 전하려고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모두 4부로 구성했던 것처럼 이 곡도 4부로 이뤄져 있는데 책의 순서를 똑같이 따르진 않았습니다. 곡의 진행에 따라 8개의 에피소드적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일출’(Sunrise)로 흔히 부르는 서주가 끝나면 1 ‘세상 저 편의 사람들에 대하여’(Of the people of the unseen world), 2 ‘위대한 동경에 대하여’(Of the great longing), 3 ‘기쁨과 열정에 대하여’(Of joys and passions), 4 ‘만가’(Dirge), 5 ‘학문에 대하여’(Of Science and Learning), 6 ‘치유 받고 있는 사람’(The convalescent), 7 춤의 노래(Dance Song), 8 ‘밤 나그네의 노래’(Night Wanderer‘s Song) 등이 이어집니다.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사용돼 유명해진 부분은 바로 이 곡의 서주입니다. 전곡 연주시간은 30분이 조금 넘습니다.
▶프리츠 라이너,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1954년/RCA
오래도록 애청돼온 명연이다. 50년대의 녹음으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음질도 좋다. 최근 SACD로도 나왔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태생의 프리츠 라이너(1888~1962)는 1953년부터 시카고 심포니의 상임지휘자를 맡아 타계할 때까지 이끌었다. 여러 녹음 중에서도 특히 바르토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서 명연들을 내놨다. 지금 들어도 지휘자의 카리스마와 단원들의 집중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지휘자의 명쾌한 해석에 단원들이 기민하게 호응하는 연주다. 곡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현악기와 목관,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금관이 곡의 구조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카라얀,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1983년/DG
카라얀과 베를린 필하모닉이 1973년에 녹음한 음반도 수작으로 손꼽힌다. 그 이전에 빈 필하모닉을 지휘한 1950년대의 음반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카라얀의 대표적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다. 1973년의 레코딩에 비해 1983년 녹음은 보다 섬세한 해석을 보여준다. 앞의 레코딩에서 힘이 느껴지는 반면에 후자는 디테일에서의 표현력이 돋보인다. 특히 현악기의 음색이 부드럽다. 관악기들도 거칠게 뻗어나가는 부분 없이 정제된 소리를 들려준다. 이 곡이 지닌 묘사적 특성을 잘 살려내면서 음악의 세부가 생생히 살아 있는 연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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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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