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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고래에게

고래 씨, 돼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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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종인 대왕고래(흰수염고래)의 경우, 몸 길이가 약 30m에 무게가 170톤 이상 나가지요. 이에 필적할 만한 동물은 중생대에 살았던 공룡을 포함해, 전혀 없습니다. 공룡도 가장 몸집이 컸던 용각류라 할지라도 수십톤 이상 나간 사례가 없거든요.

 

나는 늘 고래의 꿈을 꾼다
언젠가 고래를 만나면 그에게 줄
물을 내뿜는 작은 화분 하나도 키우고 있다
깊은 밤 나는 심해의 고래 방송국에 주파수를 맞추고
그들이 동료를 부르거나 먹이를 찾을 때 노래하는
길고 아름다운 허밍에 귀 기울이곤 한다
- 송찬호 ‘고래의 꿈’ 부분

 

 안녕하세요, 고래 씨. 돼지입니다. 낯설고 먼 바다에 있을 당신을 상상하며 처음 편지를 보냅니다. 원래는 제가 편지를 받고 나서 보내야 하는데, 듣자 하니 호랑이가 사라져서 편지가 끊겼대요. 그래서 제가 다시 시작합니다. 제 이야기를 못 읽어서 아쉬운데, 대신 제가 나중에 당신께 추신으로 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해요. 사실 저, 하소연이 조금 필요했거든요

 

흰수염고래.jpg


 당신이 바다에 중계한다는 ‘고래 방송’이 얼마나 근사할지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려요. 울산 장생포에 있는 고래박물관에서 귀신고래의 울음소리를 처음 들었던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우우우웅”하는, 뭐라 흉내낼 수 없는 신비로운 소리에 얼어붙은 듯 오래 멈춰 서 있었지요. 망망한 대해를 가로지르는, 몸을 휘감는 바닷물을 통해 전해지는 당신의 음성은 또 어떻게 다르게 들릴지 사뭇 궁금합니다.

 왜 그렇게 멀리 퍼지는 당신의 소리에 집착하느냐고요. 너른 바다를 헤엄치고 노래하는 당신과 비교하면, 제 현실이 너무나 초라하기 때문이에요. 비좁은 사육장 안에서 느껴지는, 동료들의 거친 숨소리와 미지근한 체온, 발에서 느껴지는 썩은 오물의 뭉근한 열기. 이것이 저를 둘러싼 환경의 전부랍니다. 오늘도 저는 악취와 소음을 견디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오로지 꿈과 환상에 의지해서 겨우겨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제 정신이 잠시나마 먼 바다로 향할 수 있기를, 서해의 조류를 헤치고 쿠로시오 해류도 이겨 태평양과 대서양, 남극해 같이 당신이 사는 바다에 온전히 가 닿기를 간절히 바라며 발굽을 천천히 놀립니다.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쓰고 있는 이 편지엔, 제가 마음에 품은 염원과 상상력의 전부가 담겨 있습니다. 고래 씨, 당신은 그 간절함을 느낄 수 있나요.


 문득 생각해봅니다. 육지에 있는 저에게, 하늘의 동물에게 편지를 쓰는 게 더 어려울까요, 바다의 동물에게 쓰는 게 더 어려울까요. 혹은 작은 동물에게 쓰는 게 더 어려울까요, 큰 동물에게 쓰는 게 어려울까요.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편지를 쓴다는 행위를 통해 밖의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으면 저는 그걸로 족합니다. 언제 전해질지 몰라도, 혹은 아예 전해지지 못할지 몰라도요. 당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저는 속박되지 않는 당신의 자유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어요. 당신이 연안의 수면에서 모터보트와 경주를 하거나, 대양에서 해류를 수천 km나 거스르며 헤엄을 치는 광경을 그리며 빙그레 웃습니다. 크고 자유롭고 풍성한, 태고적 꿈을 담은 당신의 거센 몸짓과 부드러운 움직임이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제게는 없는 자유가, 제 몸 하나 겨우 뉘일 수 있는 마리당 1m2 남짓한 장방형 사육장의 컴컴한 어둠과 퀴퀴한 냄새 사이에서,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미소를 감출 수 없습니다. 흔히, 돼지가 웃으면 복이 들어온다고 하지요. 그래서 고사도 많이 지냈다고 하지요. 지금 짓는 제 웃음을 고래 당신의 복을 기원하는, 그러니까 온전히 당신에게 드리는 웃음이라고 합시다. 건강과 번영을 기원합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 이후, 당신에 대해 몇 가지 조사해 봤습니다. 그리고 당신에게는 경이로운 점이 참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지요. 당신이 지금까지 지구에 등장했던 어떤 동물보다 크고 무거운 동물이라는 사실이 그 중 하나입니다. 가장 큰 종인 대왕고래(흰수염고래)의 경우, 몸 길이가 약 30m에 무게가 170톤 이상 나가지요. 이에 필적할 만한 동물은 중생대에 살았던 공룡을 포함해, 전혀 없습니다. 공룡도 가장 몸집이 컸던 용각류라 할지라도 수십톤 이상 나간 사례가 없거든요.


 당신은 깊이 헤엄칩니다. 지금까지 인간이 알고 있는 기록으로는, 2014년 초 <미국공공도서관학회지PLoS>에 발표된 민부리고래의 잠수 기록이 최고입니다. 위성 추적 장비를 통해 미국 서부해안에서 측정됐는데, 2992m 바다속에서 헤엄치고 있었지요. 물범 등을 제치고 가장 깊이 헤엄친 포유류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연구팀은 이런 행동을 이상행동으로 봤습니다. 해군의 소나(초음파 탐지기) 때문에 이를 회피하는 과정에서 깊이 헤엄쳐 갔다는 것이지요.
 인간도 이제는 잘 알다시피 당신은 초음파로 대화를 나누지요. 그런데 갑자기 기계로 만든 강력한 초음파가 선박에서 발사돼 당신에게까지 들려온다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만약 저나 사람이 어느날 길을 가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커다란 스피커가 내려오더니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큰 소리를 바로 귀를 향해 발사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 그림 같은 이 광경을 직접 경험한다면, 사람이라면 어떻게 할까요. 아마 귀를 막고 도망가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달리는 곳이 자동차가 달리는 도로일지, 절벽 아래가 될지 모른 채 혼비백산하겠죠. 저라면 머리가 깨지도록 우리를 들이받고 탈출할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비슷한 일이 바다에서 갑자기 일어났어요. 거대하고 강한 신체를 지닌, 바다를 누리기를 ?장자?의 소요유 편에 나오는 붕새 같이 하는 고래일지라도, 별수 있겠어요? 위험을 무릅쓰고 깊이, 더 깊이 들어갈 수밖에요.


 깊이 헤엄친다는 것은 분명 고래 당신이 보여주는 경이로운 생명의 신비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경이로운 진화적 신비도 있습니다. 지금은 바다에 사는 당신이, 불과 약 5500만 년 전까지만 해도 뭍에서 살았던 육상 동물이었다는 점입니다. 네 발로 바닷물이 찰랑찰랑 들이치는 물가를 조심스럽게 걷던 털 달린 육상 포유류가, 어떻게 바다를 자유롭게 헤엄치는 매끈한 몸의 바다 동물이 됐을까요. 거기에 어떤 사연이 숨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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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 가는 것들의 안부를 묻다윤신영 저 | MID 엠아이디
생물학 이야기를 하는가 싶더니 문학과 철학 이야기가 나오고, 생태학 주제를 다루는가 싶더니 주역으로 넘어간다. 과학 지식을 전한다고 인접한 다양한 세계를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런 시선은 반쪽짜리 시선에 불과할 것이다. 과학 역시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사회문화적 맥락 없이 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은 이 책은 쉽지 않으나 난해하지 않고, 에두르지 않으면서도 명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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