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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보다 대관람차를 『조이랜드』
느리고 부드러운 즐거움이 필요할 때
나는 결혼을 하고도 자주 놀이공원에 갔다. 롤러코스터는 아내 혼자 탔다. 바이킹도 마찬가지고 자이로드롭도 마찬가지였다. 빠르고 짜릿하고 정신없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놀이기구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즐거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들과 함께 타는 회전목마, 유유히 폐달을 밟는 하늘자전거, 그리고 대관람차!
롤러코스터, 다람쥐통, 대관람차
절대 겁이 많은 건 아니야. 오히려 겁이 없는 편이지. 밤중에 심부름을 가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했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저 따위 롤러코스터를 타지 않으려는 건, 그 뭐냐, 무섭다기보다는, 그래, 어지러운 게 싫어서야.
내 변명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애인이자 먼 훗날 아내가 될 여자는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어디서 약을 팔아?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딱 그런 표정이었다.
우리 앞의 줄은 속속 줄어들었다. 둥그렇고 시커먼 폭탄덩어리 끝에 달린 심지가 시시각각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속이 울렁거렸고 아랫배가 살살 아팠으며 급기야 문득, 갑자기, 폭발적으로 엄마 생각이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롤러코스터는 바람을 가르며 달렸으며 사람들이 내지르는 즐거움에 찬 비명이 5월의 맑은 하늘 아래 울려 퍼졌다.
“롤러코스터가 얼마나 위험한 놀이기구인지 알면 깜짝 놀랄 걸.”
“훗. 이걸 타지 않으면 예쁜 귀걸이를 사 주지!”
“나 몸이 좀 안 좋아졌어. 아무래도 암에 걸린 것 같아.”
나의 갖은 협박과 회유, 그리고 애원에도 애인은 넘어가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오늘만은 반드시 함께 롤러코스터를 타겠다는 굳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그 단호한 마음을 확인하던 순간, 나는 차라리 헤어져버릴까 아주 잠깐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때의 내 사랑은 롤러코스터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만큼은 되었던 가 보다.
몇 분 후 나는 창백한 표정으로 롤러코스터에 올랐다. 이미 죽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뻣뻣해졌다. 전력질주를 시작한 가슴 위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한 안전 바가 내려왔다. 나는 애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만족한 표정으로 씩 웃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며 출발합니다.”
안내 멘트가 떨어지기 무섭게 롤러코스터는 하늘을 향해, 저 멀리 천 길 낭떠러지를 향해, 비명과 공포가 휘몰아치는 허공으로 달려 나갔다. 그 후 기억은 단편적이다. 나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도 같다. 유체이탈을 경험했던 것도 같다. 엄마를 애타게 찾았던 것도 같다. 아무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친 질주는 끝난 상태였고 나는 다리가 풀려 일어서기도 힘들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내가 롤러코스터를 탄 건. 나는 빠르고 짜릿하고 정신없는 즐거움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게는 다람쥐통이 한계였다. 그 정도면 참을 만 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뭐니 뭐니 해도 대관람차였다. 삐걱대며 올라가는 그 동그란 통에 앉아 까마득하게 펼쳐진 놀이공원의 전경을 바라보며 느리고 부드럽기까지 한 속도감에 몸을 맡기다 보면 내 마음은 즐거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대관람차는 정상까지 아주 천천히 올라간다. 그러고는 또 순식간에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꼭짓점에서의 황홀경을 지나 맨 밑바닥으로 내려온다. 누군가 말했던가. 인생의 상승과 하강은 찰나의 일이라고.
나는 결혼을 하고도 자주 놀이공원에 갔다. 롤러코스터는 아내 혼자 탔다. 바이킹도 마찬가지고 자이로드롭도 마찬가지였다. 빠르고 짜릿하고 정신없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놀이기구들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 즐거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아들과 함께 타는 회전목마, 유유히 폐달을 밟는 하늘자전거, 그리고 대관람차!
나처럼 느리고 소심한 사람들, 겁이 많고 예민한 사람들은 롤러코스터식 즐거움에 현기증을 느끼기 마련이다. 빠르고 즉각적인 쾌감보다 느리지만 부드러운 즐거움이 간절하다. 이 세상은 너무도 빨리 변하고,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즐거움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대중소설도 마찬가지. 자극적이고 센 작품들을 자꾸 접하다 보면 머리가 어지럽고 명치끝이 쿡쿡 쑤셔온다. 때로는 싱거울 정도로 느리고 부드러운 소설을 읽고 싶다. 세상에 슬픔이 가득하니 그런 마음이 간절하다. 스티븐 킹의 신작 『조이랜드』는 그런 의미에서 딱 맞는 소설이다.
줄거리만 놓고 보자면 완벽한 호러 소설, 조이랜드
스티븐 킹은 어느 지점부터 글 쓰는 스타일이 변했다. 아니, 스타일이라기보다는 글의 맛이 변했다고 하는 게 더 적확한 표현일 것이다. 『캐리』로 데뷔한 그는 시종일관 빠르고 센 작품들을 써왔다. 미국의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듯 소설 속에는 저속한 표현과 욕설이 가득했고 끊임없이 누군가가 죽어나가거나 유령이나 괴생명체가 등장해 사람들을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물론, 그런 중에도 스티븐 킹이 펼쳐놓는 이야기들은 신선했고 때로는 유머가 넘쳤으며 언뜻 인간애가 비쳤다.
하지만 『듀마 키』를 이후로 그는 조금은 다른 조리법을 써서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향신료 사용은 최대한 적게. MSG 무첨가. 간도 싱겁게. 이런 변화가 스티븐 킹 개인의 결정인지, 혹은 편집자의 입김이 작용한 건지, 아니면 더 이상 젊은 날처럼 힘 있게 쓸 수 없어 선택한 방법인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캐리』와 『샤이닝』, 그리고 『그것』 같은 초기 작품들을 선호하는 것과 달리 나는 최근에 나온 ‘느리고 부드러운’ 작품들이 더 마음에 든다. 확실히 밋밋하고 싱겁지만 재료 본연의 맛이 들어 있다.
『조이랜드』는 연쇄살인과 유령이 등장하는 호러ㆍ스릴러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롤러코스터보다는 대관람차에 가까운 소설이다. 배경은 1973년 미국. 스물한 살의 대학생 ‘데빈 존스’는 여자 친구와 헤어진 뒤 ‘조이랜드’라는 이름의 놀이공원에서 여름 아르바이트를 한다. ‘조이랜드’는 작고 오래된 놀이공원이지만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기쁨을 선사하기에는 충분하다. 하지만 조이랜드 깊숙이 자리한 어둠의 놀이시설 ‘공포의 집’에서는 한 때 잔혹한 살인 사건이 있었고, 우리의 주인공 데빈 존스는 조이랜드에서 만난 각양각색의 인물들과 인연을 맺으며 이 살인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줄거리만 놓고 보자면 완벽한 호러 소설이다. 스티븐 킹의 장기가 펼쳐질 것만 같다. 독자들을 슬금슬금 공포의 늪으로 이끌어 꼼짝도 못하게 옭아매는 것. 책장을 덮은 후에도 찜찜함과 두려움이 끈적끈적 달라붙어 악몽을 꾸게 만드는 것.
실제로 이 작품 『조이랜드』에도 온갖 무섭고 기괴한 요소들이 다 등장한다. 미래를 예언하는 여자, 끔찍하게 살해당한 소녀, 사람들을 공포에 빠트리는 유령, 잔인한 연쇄살인마……. 데빈 존스가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은 스릴 넘치고 마지막 반전도 꽤 충격적이다. 재미있다는 사실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단, 『조이랜드』가 선사하는 재미, 혹은 ‘기쁨’은 느리고 부드러우며 따뜻하고 감동적인 정서에 기대고 있다. 전작인 『11/22/63』에서 그랬듯 스티븐 킹은 온갖 무섭고 짜릿하고 폭발적인 속도를 자랑할 만 한 요소를 모아서 ‘사람’과 ‘인생’에 대한 이야기로 버무렸다.
데빈 존스가 만나게 되는 인연들, 조이랜드에서 일하는 직원들, 친구들, 하숙집 주인, 그리고 희귀병을 앓는 소년 ‘마이크’와 젊은 엄마 ‘애니’는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데빈 존스는 하숙집과 조이랜드를 오가며 그들의 삶을 엿보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해 또 다른 사연을 만들기도 한다. 그 과정들이 사뭇 감동적이다.
『조이랜드』는 속도감에 지친 사람들에게 딱 어울리는 소설이다. 온갖 자극적인 놀이기구를 섭렵한 후 무언가 공허한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발견하게 되는 대관람차처럼, 그 속에 앉아 느리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이 커다란 놀이기구가 선사하는 편안한 기쁨을 만끽할 때처럼, 『조이랜드』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조금 쉬었다 가.
스티븐 킹의 최근작들은 양념을 많이 덜어냈다. 어쩌면 『캐리』와 『샤이닝』 같은 폭발적인 작품을 더 이상 구경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대신에 스티븐 킹은 ‘위로’라는 새로운 양념(자극적이지 않으며 심심하기까지 한)을 넣기 시작했는데 롤러코스터보다는 대관람차 형 인간인 내게는 요즘 작품들이 썩 마음에 든다.
특히 요즘처럼 세상이 무서울 때, 삶이 막막하고 두려움으로 가득할 때 미국의 낡은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그야말로 ‘기쁨’이 된다. 세상은 아직 살 만 하고, 사랑으로 넘쳐나며,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게 해 주는 소설 『조이랜드』.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나는 대관람차에 올라 탄 기분이었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 반짝이고, 모두 아름답다. 때로는 그런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스티븐 킹> 저/<나동하> 역11,7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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