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소설 출간을 맞이하여 - 『셀』 &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멋진 일을 해줬습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두 편이나 출간한 것이지요. 스티븐 킹의 팬이라면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겠죠?
황금가지 출판사에서 멋진 일을 해줬습니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두 편이나 출간한 것이지요. 스티븐 킹의 팬이라면 이보다 더 즐거울 수는 없겠죠? 그런데 이럴 때 좀 걱정거리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바람직한 걱정거리는 ‘어느 것부터 봐야 하나?’이고 부담스러운 걱정거리는 ‘혹시 하나는 떨거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잖아요. 시쳇말로 작품 하나가 ‘떨이’처럼 딸려오는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기발한 설정
먼저 압도적인 관심을 받는 『셀』은 이색적인 설정이 눈에 띕니다. 어느 날 갑자기 휴대전화로 통화한 사람이 ‘좀비’가 된다는 설정이지요. 좀비!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황당무계하지만, 그 대목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가 떠오릅니다. 그만큼 기괴한 상황을 밀도 있게 그려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황당한 순간을 마주한 때에 ‘이게 뭐야?’ 하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심상치 않은 징조가 보일 뿐이지요.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는 어떨까요? 이 작품은 소녀가 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에서 시작합니다. 길을 잃어버린 소녀! 뭔가 좀 평범하지요? 맞아요. 줄거리는 지극히 평범합니다. 하지만, 작품은 평범하지가 않습니다. 기발한 설정이 들어가 있거든요. 그것은 바로 소녀가 톰 고든을 열렬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톰 고든은 지금은 미국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작품이 쓰일 당시에는 아메리칸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무리 투수였습니다. 이 투수에게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세이브(마무리 투수가 무사히 게임을 마무리할 때 주어지는 포인트)를 거두면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고 하네요. 소녀는 그런 고든을 아주 좋아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뭐 특별한가 싶지 않나요? 톰 고든이 아니더라도, 그 나이 또래는 나름대로 열렬히 좋아하는 게 있잖아요. 그리고 그것이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길 잃은 소녀도 그래요. 울고, 무서워할 뿐이죠. 그런데 묘하게도 소녀는 가방에 워크맨이 있다는 걸 기억합니다. 중요한 대목이지요. 덕분에 톰 고든이 등장하는 야구 경기의 중계를 들을 수 있거든요. 그리하여 길 잃어버린 소녀의 모험은 특별해집니다. 톰 고든이 함께한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단절과 미지의 존재가 주는 공포
두 작품은 각각의 설정이 묘하게 다르지만, 공포심을 자극하는 건 똑같습니다. 먼저 그것은 고립과 단절에서 시작합니다. 세상과의 단절이라고 할까요? 『셀』은 휴대전화로 통화한 수많은 사람이 좀비가 되는데, 알다시피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 별로 없잖아요? 그러니 정상인은 극소수가 되어버리지요.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서 떨어져 나온 셈입니다.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녀는 완벽하게 고립됐고 또한 단절돼 있습니다. 게다가 이상한 녀석이 쫓아옵니다. 소녀는 그것을 ‘파괴하는 녀석’이라 부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스포일러 때문에 밝힐 수 없지만, 어쨌거나 정체를 확인할 수는 없어도 무시무시한 녀석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두운 밤, 낯선 길을 헤매는데, 확실히 모르지만 뭔가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는 녀석이 쫓아온다? 확실히 무섭지 않을까요?
너무나 분명한 명암
스티븐 킹의 트레이드마크가 무엇일까요? 역시 흡인력 아닐까요? 『셀』을 읽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역시 재미가 있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묘한(?) 단점이 생깁니다. 단점이라고 말해야 할지 애매한 것이기는 한데, 초중반의 팽팽한 긴장감이 워낙에 강력한 에너지를 만드는지라, 후반부에 좀 밀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가족’에서 찾으면 지나친 ‘오버’일까요?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흔히들 가족애를 지나치게 부각한다고 하잖아요. 『셀』도 그런 경향이 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중반의 화끈하고도 신비로운 이야기가 가족이라는 것에 갇혀 흐지부지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더라고요.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 역시 화끈하면서, 무서움으로 따지자면 『셀』에 견줘도 아쉬움이 없는데 정작 엉뚱한 것에서 아쉬움이 생깁니다. 첫 번째는 역시 야구 이야기겠지요. 야구 모르는 분들, 특히 보스턴과 양키스의 경쟁심리를 모르는 분이라면 좀 얼떨떨하실 겁니다. 타자가 노 스트라이크 스리 볼에서 괜히 방망이 휘둘렀다가 병살타 친 것을 보고 사람들이 비난할 때, 비난하는 그 심정을 모른다면 아무래도 이 작품의 묘미를 깊게 파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또한, 작품이 좀 길어진 경향도 있습니다. 3분의 2로 팍 줄였다면 좀 더 인상적인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중간 중간 들 때가 있답니다.
스티븐 킹은 역시 스티븐 킹
주머니 사정을 고려할 때 어떤 작품부터 봐야 할까요? 이건 엄마와 아빠 중에 누가 더 좋으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난감한 질문입니다. 스티븐 킹은 역시 스티븐 킹이니까요. 『셀』이든 『톰 고든을 사랑한 소녀』든 간에 스티븐 킹의 매력을 느끼는 데는, 그리고 이 추운 밤을 즐겁게 장식해줄 기쁨을 얻는 데는 무리가 없습니다.
너무 뻔한 말일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말 자주 못한다는 거 아시죠? 작가의 명성만으로 수상쩍은 작품들이 출간되는 걸 자주 봤으니 그럴 테지요. 하지만, 킹 마크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단점이 있다고 하지만, 그것도 작품의 장점에 비춰서 억지로 찾아낸 감이 있다고 할 수 있으니 KS 마크보다 믿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번 킹은 영원한 킹이다.” 어느 책이든 이 말이 나오고 말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