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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 살인사건의 공포를 마주하다
연극 <날 보러 와요>의 수사 반장 손종학
“영화나 방송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연극이 갖는 매력은 좀 더 특별한 것 같아요. 오롯이 무대 위에서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긴 호흡을 갖고 간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특히 무대 앞에는 관객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어떤 밀도가 생겼을 때, 관객들이 이동도 못하고 배우를 통해 작품에 빠져든 상태에서 들었다 놔줬다 그게 아주 기막히게 이뤄질 때는 정말 황홀하죠. 마약입니다 마약(웃음).”
화성 연쇄 살인사건. 지난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시에서 10명의 여성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미해결 사건입니다. 중학생에서 70대 할머니까지 나이를 가리지 않은 피해자의 시신은 일부가 잔인하게 훼손되곤 했습니다. 당시 이 사건에만 180만 명의 경찰이 동원됐고 3000명의 용의자가 조사를 받았지만, 8차 사건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건의 범인은 끝내 검거되지 않았죠. 이들 사건의 공소시효는 2006년 4월 2일로 모두 끝난 상태여서 국내 최대 미스터리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을 소재로 한 연극 <날 보러 와요>가 5년 만에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공연 때마다 화제가 됐던 작품이라 수사팀을 이끌고 있는 김 반장 역의 손종학 씨를 공연장 근처 카페에서 만나 봤습니다.
“감정이입이 된 상태에서 연습 때부터 쭉 오니까 배우들도 피폐해지죠. 공연이 끝나면 바로 집에 못 들어가고 꼭 한 잔 하게 돼요.”
기자는 손종학 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지난 3월 27일 오픈한 <날 보러 와요>의 첫 무대를 관람했습니다. 그런데 연극이 끝난 뒤의 그 찜찜한 여운이란. 도대체 배우들은 집에 돌아가 어떻게 잠자리에 들까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보는 관객들도 그런데 배우들은 얼마나 찜찜하겠어요. 실제 있었던 일을 연극으로 만들었는데 아직도 미제의 사건이잖아요. 그러니 깔끔하게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도 없고. 할 때마다 아프죠. 몸에 타격이 올 정도예요. 첫 공연 끝내고도 짧게 회의하고 무대 감독하고 소주 한 잔 했습니다.”
기자들도 관객인지라 첫 무대는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삐거덕거리기 때문이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첫공의 면죄부’를 인정하지 않는 편이라서 첫 무대를 보고 그 무대의 완성도를 점쳐보곤 하는데요. <날 보러 와요>는 첫공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매끄러웠습니다.
“재밌게 봤다니 다행이네요. 연습의 힘이죠. 연습을 많이 했고, 제작진이나 배우들도 대학로에서 총망 받고 잘하는 사람들만 모아놨어요. 그래도 배우들은 항상 부족하다고 느껴요. 허점들이 눈에 보이고 사람 마음이 나 같지 않으니까요.”
연극 <날 보러 와요>는 화성에서 첫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째 되는 1996년 초연됐습니다. 기자는 이 사건이 2000년대에 일어났다면 연극 무대에서는 덜 재밌지 않았을까 생각해봤습니다. 2014년의 무대 역시 그 시절로 고스란히 되돌아갑니다. 휴대전화가 존재하기는커녕 경찰서 내 전화는 당겨 받는 기능도 없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 SNS가 아니라 엽서를 보내고, 시를 짓고 낭독하고, 신문이 미디어의 중심이던 시절. 90년대 초반의 우리 사회는 연극무대의 아날로그적인 감성과 딱 들어맞습니다. (CSI의 과학수사나 네티즌 수사대는 잊어주세요.)
“저는 2006년부터 벌써 네 번째 이 작품에 참여하는데, 시대가 정말 급변한다는 걸 느끼죠. 96년에 초연할 때만 해도 저렇게들 살았거든요. 시대극이 돼 버린 거죠. 저는 어차피 그 시절을 살아왔으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재밌어요. 그 모습이 무대 위에 있으니까 향수도 있고 매력도 있습니다.”
아날로그적인 것이 연극의 가장 큰 매력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급변하는 사회와는 괴리가 있지 않을까요? 배우 중에서도 가장 배고픈 ‘연극배우’라는 타이틀이 외롭지는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연극 <날 보러 와요> 역시 더 대중적으로 알려진 영화 <살인의 추억>의 원작으로 소개되는 게 현실이니까요.
“주객이 전도된 거죠. 대중적으로 알려지면 그게 주가 되니까. 그렇지 않으면 소외되는. 서글플 때도 있어요, 어떨 때는. 그래도 50년이나 100년 뒤에는 바뀌지 않을까(웃음). 요즘은 가끔 TV 드라마도 하곤 해요. 아직도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이 어색하지만 세상이 변하듯이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진실하게 살아가고, 그 안에서 아니면 아니라고 얘기하고, 잘하면 잘한다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솔직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대중적인 인지도를 바라는 배우도 있을 테고, 또 다른 것을 보고 살아가는 배우들도 있겠죠. 사람은 다양하니까요.”
역시 연극배우다운 답변입니다. 하지만 요즘은 대학로에서도 배우가 관객을 동원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요.
“배우가 티켓파워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에는 반대 입장이에요 연극이라는 게 좋은 대본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면, 그 작품을 보고 관객들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작업이 이뤄지는 거죠. 작품 안에서 배우들은 살아 숨 쉬고, 그렇게 전체적인 걸 좋아하고 즐겼으면 좋겠어요. 어느 배우 하나에 포커스가 맞춰지면 거기에 따른 부작용도 많고,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우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손종학 씨는 1987년부터 무대에 서오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가 빠져든 연극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영화나 방송도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연극이 갖는 매력은 좀 더 특별한 것 같아요. 오롯이 무대 위에서 배우가 처음부터 끝까지 긴 호흡을 갖고 간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죠. 특히 무대 앞에는 관객들이 계시잖아요. 그분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어떤 밀도가 생겼을 때, 관객들이 이동도 못하고 배우를 통해 작품에 빠져든 상태에서 들었다 놔줬다 그게 아주 기막히게 이뤄질 때는 정말 황홀하죠. 마약입니다 마약(웃음).”
연극 <너와 함께라면>을 봤던 관객이라면 20대와 결혼하겠다고 소동을 벌이는 일흔의 켄야를 기억할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 능청맞고 코믹한 역을 연기한 배우가 바로 손종학 씨입니다. 주의 깊게 보지 않는다면 두 인물이 같은 배우라고 누가 믿을까요?
“캐릭터가 다르니까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는 텍스트에 충실한 편이에요. 좋은 대본들은 캐릭터가 살아 있어요. 그래서 대본에서 기본적인 것을 찾고 거기에 살만 붙이면 인물화가 돼요. 외형적으로 포장하고 그런 건 잘 못합니다.”
연극하면 대학로, 대학로하면 젊음의 공간으로 통하는데, 손종학 씨는 이렇게 수많은 연극과 함께 대학로에 출근하듯 드나듭니다. 젊음의 공간이 익숙한 대신 동년배 친구들과는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저는 대학로가 편해요.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 친구들하고는 이제 대화가 안 돼요. 외형 자체도 할아버지 같고(웃음). 직장에 다니는 친구도 있고, 사업을 하는 친구도 있는데,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니까요. 배우는 작품을 탐구하고 그 안의 인물을 공부하고 매번 그런 과정이니까 많이 다르죠. 젊었을 때는 모르는데 40대 중후반을 넘기니까 차이가 많이 나더라고요.”
참, 그 마약 같다는 무대에서의 희열은 연기 생활 25년이 지난 지금도 효력이 있나요?
“그럼요,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거니까 변할 수가 없어요. 행복한 직업이죠. 가정적으로는 조금 무책임해질 수 있지만(웃음).”
아직 공연 초반이라 낮부터 리허설이 있어서 손종학 씨와 많은 시간을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매일 저녁의 무대를 위해 석 달을 연습하고, 그런데도 또 낮부터 리허설을 하고. 도대체 그 마약이 어떤 맛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연극 <날 보러 와요>는 5월 31일까지 대학로 아트센터K 세모극장에서 공연됩니다. 탄탄한 대본과 짜임새 있는 연출, 그리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초연 이후 꾸준히 관객들이 찾았던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뛰어넘는 <날 보러 와요>의 무기는 여전히 종결되지 않은 살인사건을 마주하는 긴장과 공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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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손종학, 날 보러 와요, 윤하정, 수사 반장, 연쇄 살인사건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