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지원을 읽고 쓰고 그리다
당신의 주머니에 남은 그것
「바닷가의 피크닉」 밑줄 긋기
김지원의 소설은 단호히 인생이 무엇이라고 논하거나, 들끓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날을 세우진 않는다. 텅 빈 부엌 한편에서 홀로 놓인 찻주전자가 떠오른다. 불을 꺼서 넘칠 리는 없지만, 아직은 열기를 간직한. 그러다 조용히 식어가는 주전자 말이다. 자글자글 속의 말을 하다 찻잔에 담겨 맑은 차를 우려낸다. 찻잔을 곁에 두고,「바닷가의 피크닉」 을 펴 들었다.
소리 없는 천둥, 빛 없는 번개.
하지만 조용히 울부짖고 멀찍이서 타오른다.
김지원의 소설은 단호히 인생이 무엇이라고 논하거나, 들끓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날을 세우진 않는다. 텅 빈 부엌 한편에서 홀로 놓인 찻주전자가 떠오른다. 불을 꺼서 넘칠 리는 없지만, 아직은 열기를 간직한. 그러다 조용히 식어가는 주전자 말이다. 자글자글 속의 말을 하다 찻잔에 담겨 맑은 차를 우려낸다. 찻잔을 곁에 두고, 「바닷가의 피크닉」 을 펴 들었다.
피크닉을 가본 적이 있나요?
‘바닷가’와 ‘피크닉’의 조합은 내겐 낯설다.
바다로 소풍을 가거나 산책을 하거나, 피서를 가긴 했다. 하지만 그런 경험에 피크닉이란 단어를 붙이긴 머쓱하다. ‘피크닉’ 하면 대나무로 엮은 바구니나 체크무늬 깔개가 어울린다. 밀짚모자도 두툼한 책으로 살짝 눌러놓아야 할 듯싶다. 찬란한 햇빛과 나비 몇 마리가 팔랑거리는 풍경도 곁들여야 한다.
피크닉은 어쩐지, 나른하고 우아하다. 소풍엔 김밥, 야유회엔 삼겹살, 혼자 찾아간 밤바다엔 팩 소주가 제격이다. 하지만 피크닉에는 뭘 가져가야 할지 난감하다. 고로 나는 소풍이나 산책, 여행은 갔어도 피크닉은 가질 못했다.
김지원의 소설 「바닷가의 피크닉」 의 배경은 미국의 한 바닷가다. 미국의 갈매기라고 새우깡을 마다하진 않겠지만, 뭔가 세련된 이미지부터 떠오른다. 파리에서는 봉투에 싼 바게트 빵을 겨드랑이에 끼고 노천카페에 앉아야 하고, 뉴욕에 가면 왼손에 베이글을, 오른손으론 커피 컵을 감싸 쥐어야 한다. 고정된 이미지에 맞춘 코스프레다. 스쳐 지나갔거나 가보지 않은 장소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에 맞춘 상상만 가능하다. 먼 곳에 대해 품은 환상을 좀처럼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김지원의 「바닷가의 피크닉」 은 내 짐작과는 달랐다.
바닷가와 바닷속
사람들은 미국의 한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다 구워 먹는다. 미국 바닷가에서 조개 구이라니 생급스럽다. 풍경마저도 피크닉답지 않게 을씨년스럽다. 바다는 비를 간간히 뿌리는 날씨를 닮아 칙칙하다. 미국의 바다라고 별다르진 않다. 어느 땅에 닿건 바다는 그 모양새 그대로다. 피크닉이라 하든, 소풍이나 여행이라 명명하든 짬을 내서 낯선 곳에서 먹고 마시고, 이야길 나누자는 거다. 사교적인 모임이 그러하듯 할 법한 얘기나 의례적인 말을 나누곤 뿔뿔이 흩어진다. 대단한 사건은 없다. 단지 생경한 것들의 만남이 있을 따름이다.
화자인 정이를 비롯한 사람들이 피크닉에서 만난 호레이스의 늙은 신부도 짐작과는 다르다. 늙은 신부(新婦)라니. 신부답게 하얀 투피스를 걸쳤건만 “누런 금니를 입안 가득히 물고 호박꽃이 흐드러지듯 웃”는 모습은 서울 어느 골목에서 본 듯한 할머니 같다. 미국이란 낯선 땅에 나타난 서울 할머니라니 어쩐지 민망스럽다. “침팬지가 양장한 듯한 어색한 모습”의 신부는 주책 맞으며 자기 감정에 취해 있다. 외양은 여느 노파인데, 속은 이팔청춘이다. 할머니와 사랑을 짝지우긴 버겁다. “난 이래 봬도 뽑혀가지고설랑 시집온 사람이야.”라는 식으로 젠체하는 모습도 볼썽사납다. 미국 땅에서 만난 한국 할머니는 한국 사람이 보기엔, 자꾸 삐져나오는 속치마처럼 숨기고만 싶은 존재다. 자기들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짐작건대, 미국행을 결심하거나 미국에 막 왔을 때 정이를 비롯한 다른 한국 사람들도 같은 심정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미국 생활은 그들의 짐작과는 달랐다. 이제 막 미국에 온 호레이스 신부의 모습은 정이의 과거를 연상시킨다. 거리에서 화들짝, 마주친 부모처럼 되도록 피하고만 싶다.
온 사람과 갈 사람
화자인 정이는 미국을 떠나려 하고, 호레이스의 신부는 이제 막 미국에 도착했다. 온 사람과 갈 사람이 한데 모였다. “범상해 보이는 피크닉이 사실은 축하와 송별의 의미를 지”닌다. 썰물과 밀물이 바다를 이루듯.
호레이스의 신부는 미국을 떠나는 정이를 안타까워한다. 자기는 겨우 온 미국을 떠난다는 게 안쓰럽다. “아니, 왜 간다지? 내가 가까스로 온, 아 이 좋은 데를 두구, 하는 듯”하다. 정이의 눈에 비친 호레이스 신부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신참의 희망은 부질없어 보인다. 누군가가 품은 희망을, 절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곤혹스러운 노릇이다. 바다는 멀리서 보면 그저 아름답다. 그러나 바닷속으로 들어가면 자맥질을 해야만 가라앉지 않는다. 죽은 해초들과 플라스틱 병, 과자 봉지들도 떠다닌다. 바닷가로 피크닉을 가는 것과 바닷속으로 잠수하는 건 다르다.
바닷가와 바닷속이 차이지듯, 상상했던 미국과 뛰어들어 겪어본 미국은 다르다. 거기가 어디든 사람살이의 속내는 겉보기와는 다르다. 우리는 남의 속을 어림짐작할 뿐이다. 양무인은 귀국하는 김승언과 정이를 부러워하지만, 그들 부부의 사정은 모른다. 남들 눈에 호레이스의 선택은 어이없어 보이지만 마음이 어떨지는 알 도리가 없다. 겉으로 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비도덕적으로 비칠 여지마저 있다. 정이는 호레이스와 신부의 관계를 ‘전기’에 빗댄다. 전기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불이 켜진 걸 보고, 전기가 흐른다는 걸 알 뿐이다. 한 길 사람 속도 미궁이지만, 삶의 과정에서 무슨 일을 만날지도 알 수 없다. 바다가 피크닉에 맞춤인 날씨를 준비해두는 건 아니다. 아이를 봐주러 온 할머니를 마땅치 않게 본 호레이스의 신부도 한 달 뒤면 손자를 봐주러 보스턴으로 가야 한다. 원대한 꿈을 품고 미국에 온 부부도 4년 후 회한에 가득 차 귀국한다.
당신의 주머니 속에 남은 그것
이십 대에 배낭여행을 갔을 때 “다음에 오면”이란 말을 종종 했다. 다시 오면 찬찬히 둘러보고 입장권을 끊어 성당에도 들어가고 미술관도 들르고 특산품도 사가야지. 다시 돌아오겠노라며 로마의 트레비 분수에 동전도 던져 넣었다. 시간이 많이 남은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젠 어딜 가든 마지막이라고 생각한다. 풍경들이 애잔하다. 영원히 머무는 사람도 없고, 모두 그저 지나쳐간다. 그렇다면 우리가 남기고 가는 건 뭘까?
주머니를 뒤지면 예전에 넣어두었던 뭔가를 발견한다. 영수증이나 껌 종이, 영화 티켓이나 명함, 동전과 쿠폰. 내가 보냈던 시간의 조각들이다. 내 주머니에 남은 것들을 헤아린다. 내가 지나 보낸 시간들과, 내가 맞을 마지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겨질 무언가를.
정이는 수집가였다.
이와 같은 작은 조개껍질로부터 뜻 아니한 타인의 친절, 꽃, 정다운 말씀, 아름다운 사람, 노래, 날씨, 풍경, 한 번 지나가면 언제 다시 그 같은 것과 만나게 될는지 전혀 확신이 없는 때문이었다.
이 작품을 쓴 작가는 일 년 전 세상을 떠났다. 밀물과 썰물이 오가도 바다는 변함없다. 하지만, 물이 오간 사실은 변치 않는다. 바닷물이 어루만진 땅엔 한때, 흔적이 남는다. 종이 위로 글자들이 흘러간다. 쓴 사람은 갔지만, 읽는 사람은 남아 있다. 썰물과 밀물은 바닷가에서 만난다.
찻잔이 비었다. 차의 맛과 향은 혀끝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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