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사는 친구로부터 “Aran passed away peacefully at 1:41 AM this morning”으로 시작되는 메일을 받았을 때 정서적 충격에 앞서, 그녀의 전 생애를 말해주는 듯한 이미지가 먼저 떠올랐다.
안개, 또는 눈보라가 자욱한 신비로운 공간에 홀로 서 있는 겨울나무 한 그루. 나무는 있던 자리 그대로, 그 모습이 어딘가로 사라지기 직전 같기도 하고, 어딘가로부터 홀연히 나타나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이미지 속에서 보면, 그녀의 생사는 ‘있어도 가는 것 같고, 가도 오는 것 같은’ 영혼들의 정원의 한 풍경이다.
언제부터 그녀는 소리없이 성큼성큼 영혼 세계로 중심 이동을 해왔던 것일까. 돌이켜보면, 언제라는 시간을 따져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지원은 날 때부터 ‘올드 소울(Old Soul)’이었다. 타고난 고결함, 선험적 앎 같은 것이 있었다. 뚜걱뚜걱 물수제비뜨듯 떠오르는 장면들의 귀맞춤이 끝난 지금에서야 친구들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머니인 최정희 선생님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다 큰 딸을 앞에 두고 최 선생님은 손으로 입부터 가리고 웃음을 참지 못하는 듯이,
“저거 아란이는 어렸을 때 글쎄 바람이 무섭다고 엄마, 바람 무서워, 바람 무서워 그랬단다.”
그러자 아란이 ‘끼익끼익’ 하는 웃음을 터뜨리며 부끄러워했다.
어째서 아이는 보이는 형체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듯이’ 무섭다고 했을까. ‘끼익끼익.’ 마치 차가 급정거하는 듯한 아란의 기이한 웃음소리는 어쩌면 신비한 새의 울음소리 같았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든다.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한 지원은 그곳에서 두 아들을 키우고, 가족이 운영하는 ‘리쿠어 스토어’를 돌보며, 틈틈이 소설을 써서 데뷔를 했다.
당시 《문학사상》 편집 일을 하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편집자로서 검은 얼룩무늬 노트에 동글납작한 글씨로 쓴 그녀의 소설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었다. 그리니치빌리지를 배경으로 한 이민자의 고단한 삶이 그려져 있음에도, 그녀의 소설엔 항상 한 가지 특징이 있었다.
비명이 나올 만큼 벅찬 현실에 짓눌리다 못해, 남을 원망하거나 미움을 품는 것이 아니라, 서늘하도록 흔쾌하게 ‘내가 감당하고 말지’로 자신을 다독이는 장면들이 늘 작품의 정점에 있었다. 그것은 이미 인생을 몇 번 살아본 듯한 작가 자신의 내면의 소리로 느껴졌다. 지원의 소설은 현실임에도, 먼 나라(멀어서 먼 것이 아니라, 차원이 달라서)에서 소풍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아련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어, 경직된 리얼리즘이 대세였던 그 시절, 가려진 듯 돋보이는 여백의 아름다움으로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사람을 만나기 전, 그렇게 소설을 통해 더 가까워진 친구. 만난 시기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첫인상은 지금도 또렷하다. 부드럽고 가만가만한 음성, 세상 사람들 누구라도 어렵고 어려워 연신 몸을 낮추는 타고난 겸손, 이마를 삼킨 여신 풍모의 긴 펑크 머리 밑으로 그윽하게 빛나는 눈, 속치마처럼 보이는 허름한 긴 치마, 뒤축이 열려 있는 슬리퍼형 샌들……. 옷차림도 외모도 유형을 찾기 어려운 이채로운 분위기였다.
지원이 뉴욕으로 떠난 뒤, 사람들은 나를 통해 그녀가 언제 돌아오는지 끈질기게 챙겼지만, 그녀가 기대앉아 있던 책 무더기가 날로 다른 책들로 더 높아져가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 뉴욕에 다녀온 친지들에게 그녀에 대한 소식을 물어보면, 마치 깨끗이 치워져 있는 책상을 훔쳤을 때 손에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는 것처럼 “잘 있어.” 하는 한마디뿐이었다.
‘왜 지원에 대한 소식에는 군더더기가 따르지 않을까. 하다못해 무슨 옷을 입었다든지, 누구랑 같이 있더란 말까지도 생략되는 것일까?’ 하고 궁금해하다 보면 저절로 답이 떠올랐다.
어느 모임에서든지 그녀는 항상 한발 물러나 있었다. 그녀의 존재는 있는 듯 없는 듯, 고요하고 부드럽고 희다. 어떤 문제를 놓고 설왕설래하던 얘기가 언쟁에 이를 즈음이면 불현듯 그녀의 조용함이 좌중을 환기시켰다. 그녀는 누군가의 앞으로 접시를 슬그머니 밀어놓는 식으로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슬쩍 비켜나거나, 그래도 그 시선들이 집요하게 자기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할 수 없이 ‘왜 날 쳐다보지?’ 하는 듯이 ‘끼익끼익’거리는 그 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뉴욕에 다녀온 지인들이 그녀의 소식을 한마디로 “잘 있어.” 하고 전하는 것은, 그녀가 그들을 만났을 때 자의식의 화살을 함부로 날려, 그들이 자기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주변에 대해 무해(無害)한 존재일 수 있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영혼 쪽으로 중심 이동을 많이 한 결과로 느껴졌다.
그 이후에 접한 그녀에 대한 소식은 어쩌면 예상된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머리 염색을 그만두었다는 것. 그래서 새로 나는 머리카락 밑뿌리는 하얗고, 다른 부분은 까매서 그 흑백 대조가 까치를 닮았다는 것인데, 그것은 그녀가 더 이상 외모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는 신호였다. 자신의 저작을 포함해 집에 있던 책을 모두 버렸다고도 했다. 작가가 책을 버렸다는 것은 글을 써야 할 의미도 내려놓았다는 뜻이었다.
사 년 전쯤, 어느 날 밤이었다. 지원의 전화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가만가만 조용했으나, 급한 부탁이라며 그녀가 하는 말은 의외였다. oo사 사장님 전화번호를 급히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들어본 얘기에 의하면, 그 사장님 은행 계좌로부터 어떤 손이 돈을 마구 빼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원이 ‘본다’는 것이 사실일 거라고 믿었다. 뿐만 아니라, 지원이 너무나 절실한 목소리로 “영은아, 이 세상에 진짜 악이라는 것이 있단다. 나는 그것이 보여. 때문에 사람들이 해코지당하기 전에 도와주고 싶어.”
그 말을 백 프로 믿었지만, 나는 사장님에게 그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원이 말했던 것과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고, 사장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삼 년 뒤의 일이었다.
지금 그때 지원의 목소리를 떠올려보면, 내가 좀 더 깊이 감응하지 못한 어떤 것 때문에 눈물이 난다. 삶의 멍에에 숨이 막힐 때마다 ‘차라리 내가 감당하고 말지’로 자신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던 그 아름답고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 때문에 자기 먼저 악령의 공격을 당하는 고통을 치르고 나서, 괴롭힘당하는 영들을 위해 스스로 수호령으로 변신한 내 친구 지원.
세월조차도 ‘지나갈 어느 날’로 모두 비켜준 지금, 그녀가 떠난 너무도 희고 깨끗한 빈자리는 상실이 아니라, 눈부신 채움이어서 나는 그녀처럼 ‘끼익끼익’ 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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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나갈 어느 날’은 김지원의 동명 소설 제목이고, 지원의 본명은 아란, 채원의 본명은 항란으로 지원, 채원은 데뷔 때 김동리가 지어준 이름이다.
* 이 글은 《문학사상》(2013년 3월 호)에 실린 「지나갈 어느 날」 에서 발췌ㆍ수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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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김지원 작가는 맑고 섬세한 감수성과 아름답지만 절제된 문체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탐구해온 독자적인 문학세계를 가지고 있다. 김지원 작가는 미국이라는 나라뿐만 아니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세계에서 타자이자 이방인이었던 여성으로서의 삶과 정체성을 탐구했으며, 남녀 관계를 통해 인간관계의 본질을 파고드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김지원 소설 선집』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 김지원의 40여 년에 걸친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고 보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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