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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

기욤 뮈소가 던지는 달콤 살벌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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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인생에도 해피엔딩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그것 또한 사랑에서 온다고 믿는다. 스물두 살의 8월 23일 그날,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얼마나 먼 미래의 일일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결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단 한 번도 그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운명적 사랑

운명적 사랑일수록 더 끌리는 법이다. 연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사랑은 더욱 불타오르고 또한 아름답게 포장된다. 그리고 사실, 세상의 모든 연인들은 자신의 사랑이 운명적이라 믿는다. 사랑은 현란한 도취와 의무 부여에서 시작되는 것이므로.

내가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는 불과 스물두 살이었다. 사랑에 눈이 멀기에는 딱 적당한 나이였다. 동갑인 우리는 오랜 친구였다. 그러니까 ‘저스트 프렌드.’ 사적으로 만난 적도 없었고 길게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다. 그저 스쳐 지나며 인사를 나눌 뿐이었다.

그러나 운명의 그날(8월 23일로 기억한다), 우리는 지리산 어느 수련원의 수영장 가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긴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주 즉흥적인 일이었고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우연한 대화, 나지막한 풀벌레 소리, 반짝이는 별빛, 부드러운 밤바람, 그리고 청춘남녀. 사랑에 빠지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합이었다. 운명의 시나리오대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 바로 그 직전까지, 그러니까 새벽 4시가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지는 ‘저스트 프렌드’였던 우리는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서로에게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로미오와 줄리엣 (Romeo+Juliet, 1996)

사랑은 종종 마법을 부린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사랑에 빠지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수많은 이유들은 그 후에 만들어 진다. 목소리가 좋아서, 얼굴이 아름다워서, 분위기가 있어서, 똑똑해서, 착해서, 배울 점이 많아서, 그리고 기타 등등. 내가 들었던 가장 황당한 이유는 ‘손가락이 예뻐서’였다. 같은 동아리의 선배를 사랑하게 되었다며 떨리는 목소리로 털어놓았던 그 후배 녀석은 이렇게 말했다.

“그 선배 손이 얼마나 예쁜지 아세요? 그 손을 보는 순간 반했다니까요!”

그 후배에게 손은 그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 스스로가 부여한 수많은 이유 중 하나였을 뿐이다. 설령 그녀의 손이 하마의 그것처럼 뭉툭했어도 녀석은 분명 사랑했으리라. 그리고 다른 이유들을 찾았겠지.

그렇게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곧 수많은 이유들과 함께 자신들을 가로막는 장애물들 또한 만들어 낸다. 그런 장애물 하나쯤은 있어야 내 사랑이 더 운명적으로 느껴지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 경우에는 자격지심이 장애물이었다. 못난 남자들이 내세우는 전형적인 장애물. 가난하고 부족한 내가 과연 저 여자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아아.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그때의 번민과 고뇌는 얼마나 컸던가! 나는 사랑의 장애물을 향해 쌍팔년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울분을 토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사랑의 본질

내가 운명적 사랑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건 순전히 기욤 뮈소의 소설 『내일』 때문이다. 프랑스 작가인 기욤 뮈소는 로맨스에 여러 장르를 잘 버무리기로 유명하다.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고 실제로 우리나라에도 고정 독자층이 제법 두텁다고 하는데 ‘경상도 남자’인 나로서는 솔직히 그의 감성이 이해 안 될 때도 많다. 그럼에도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종이 여자』 같은 작품들은 꽤 재미있게 읽었다.

기욤 뮈소의 소설 속 주인공들 또한 운명적으로 서로에게 끌리고 크나큰 장애물을 헤쳐 나가며 결국 사랑에 골인한다. 이 장애물이 크면 클수록 독자들의 염통은 더욱 쫄깃해지고 똥줄은 타들어가기 마련이며 입술은 바싹바싹 타게 된다. 그런 면에서 기욤 뮈소의 최신작인 『내일』 은 거의 끝판 대장이라 할 수 있다.

하버드 대학의 잘 생긴(아주 중요하다!) 철학 교수 매튜 샤피로와 유명 식당의 와인 감정사인 아름다운(이것 역시 중요하지) 엠마 로벤스타인은 여차저차 사랑에 빠지게 된다. 매튜는 아내를 잃은 후 상실감에 빠진 인물이며, 엠마는 자존감이 낮고 우울증을 앓고 있다. 상처 입은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독자들이 기다린 장애물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생각보다 큰 장애물이다. 이건 뭐, 작가가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을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매튜는 2011년에 살고 있고, 엠마는 2010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각각 다른 시대에 사는 두 사람이 과연 사랑을 이룰 수 있을까?

『내일』 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사건이 커지면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진다. 처음에는 환상적인 설정의 로맨스처럼 시작했다가 곧 서슬 퍼런 스릴러로 급선회하며 독자들을 매혹시키는 솜씨가 일품이다.

매튜와 엠마가 시간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넘고 만나게 되는지, 그 결말은 직접 확인해 보길 바란다. 수습 불가능할 것 같던 이야기를 제법 잘 봉합했고 나름의 감동까지 선사하니까. 물론 논리적인 허점을 찾자고 달려들면 몇 가지가 걸리기도 하지만 『내일』 에서 중요한 건 논리가 아니다. 원래 사랑 자체가 논리가 배제된 감정이지 않는가. 로맨스 소설도 마찬가지다.

대신에 나는 기욤 뮈소가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당신은 과연 사랑을 믿는가?
사랑하는 사람을 믿는가?
운명적인 상대라 생각했던 지금의 그 혹은 그녀를 온 마음을 다해서 믿고 있는가?

『내일』 은 믿음에 대한 소설이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 또한 믿음에 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는 건 전혀 논리적인 일이 아니다. 따라서 이유 같은 건 없다. 사랑하게 된 후 비로소 이유를 찾아나간다. 이 과정은 불과 3개월 사이에 다 끝난다. 내가 당신을, 당신이 나를 사랑하게 되는 표면적인 이유 따위는 3개월이면 유통기한이 끝나 버리는 것이다.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정해놓으면 그 기간은 조금 더 늘어난다. 장애물이 너무 크다면 이별로 이어지지만 적당한 크기의 장애물은 오히려 사랑을 곤고히 만드니까.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다. 그 뒤부터는 다른 원동력이 필요하다.

아내와 나는 칠년 동안 연애를 했다. 정말로 길고 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 내내 나는 여전히 가난했고 아무 것도 더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의 아슬아슬한 연애를 지탱해 주었던 건 ‘믿음’이었다. 나는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된 그 순간부터 칠년이 흐르는 동안 단 한 번도 아내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믿음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래 전에 헤어졌을 것이다. 결혼도 하지 못했을 것이며 잘생긴 아들 녀석을 낳아 지지고 볶으며 사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가끔 그때 생각을 한다. 우리가 연애를 했던 그때. 아내는 불투명한 내 미래를 믿어주었고 나는 아내가 나를 믿는다는 사실을 믿었다. 믿음과 믿음이 쌓여 결국 장애물을 넘을 수 있었다. 과연 그 믿음들은 어디에서 왔던 걸까? 누군가 내게 질문을 한다면 나는 그 역시도 ‘사랑’이라고밖에 대답하지 못하겠다.

사랑했기에 믿었고 믿었기에 사랑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 역설은, 그 역시 논리와는 무관한 사랑이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내일』 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를 믿었고, 다른 누군가는 그 믿음을 이용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랑 그 자체를 믿었다. 이 이야기가 길고 끔찍한 사건을 돌아 결국 해피엔딩에 이르게 되는 것은 어쨌든 사랑을 믿은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해피엔딩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그것 또한 사랑에서 온다고 믿는다. 스물두 살의 8월 23일 그날, 나는 이 여자와 결혼하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얼마나 먼 미래의 일일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결혼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단 한 번도 그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렇게 14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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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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