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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셜록 홈즈인가?

‘고기능 소시오패스’ 셜록 홈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 매력적인 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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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의 셜록 홈즈가 캐릭터 자체로 인기를 끌었다면 지금 셜록 홈즈를 소비하는 독자, 혹은 시청자들은 홈즈 같은 이가 활약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꿈꾸는 게 아닐까? 속사포처럼 지식을 쏟아내며 척척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셜록 홈즈의 ‘심플한’ 세계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드라마 <셜록 Sherlock>, [출처: BBC 홈페이지]

명탐정

명탐정이 되고 싶었다. 그냥 탐정도 아니고 ‘명’탐정. 초등학교 2학년 수업 시간, 장래 희망을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나는 당당히 밝혔다.

“셜록 홈즈 같은 명탐정이 되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노련한 용의자처럼 금세 미소를 짓고는 이렇게 물었다.

“그럼 탐정이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주구장천 읽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를 머릿속에서 아무리 뒤져봐도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도대체 홈즈는 어떤 노력을 했던 거지? 결국 나는 무언가 대답을 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끼며 이런 말을 늘어놓고 말았다.

“벼, 변장을 잘 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고말고. 셜록 홈즈는 변장의 귀재였다. 그는 거지, 목사, 측량기사 등 연령대와 직업군에 상관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장을 했다. 「빈집의 모험」 에서는 고서점 주인으로 변장한 셜록 홈즈를 그의 오랜 파트너였던 왓슨조차 알아보지 못한다. 왓슨이 홈즈에게 속아 넘어간 건 그 외에도 부지기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일종의 패배감에 젖어 홈즈가 나오는 소설이란 소설은 모두 챙겨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타고난 천재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되었다. 곱셈과 나눗셈 앞에서도 끙끙대는 나 따위는 절대 홈즈를 따라갈 수 없을 거야. 백과사전을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홈즈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걸. 나는 셜록 홈즈라는 이 세기의 탐정에 대해 알아가면서 한 가지 슬픈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는 아무래도 홈즈보다는 왓슨과 가까운 인간이라는 사실.

한동안 울적했지만 초등학교 2학년의 머릿속은 늘 새로운 고민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좋아하는 짝꿍이 생겼고, 괴도 루팡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알게 되었으며, 홈즈에 비해서는 비교적 인간적인 포와로 아저씨와 마플 할머니도 좋은 탐정이라 인정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나는 의뢰인의 엉덩이가 의자에 닿기도 전에 출생지며 직업 등을 맞춰버리는 ‘무르팍 도사’급 신기를 보이는 셜록 홈즈를 몇 번이나 만났다. 『주홍색 연구』, 『네 사람의 서명』, 『바스커빌 가문의 개』, 『공포의 계곡』 등 장편 소설은 물론이고 기가 막힌 추리가 돋보이는 단편들도 죄다 읽었다. 그리고 서서히 시들해졌다. ‘셜로키언’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셜록 홈즈가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지나치게 완벽했으며 그렇기에 어딘지 구식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탐정이란 직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셜록 홈즈와 멀어진 이유일 것이다. 아니, 사실은 상대방의 시계를 보고 직업을 맞추는 일보다, 구두에 묻은 먼지를 보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맞추는 일보다 더 현실적인 고민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늘 현실은 더 복잡했다. 나는 더 이상 셜록 홈즈의 단출하고 선명한 세계에서 위안을 얻을 수 없었다.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홈즈는 내게서 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조용히 잊혀졌다.


드라마 <셜록 Sherlock>, [출처: BBC 홈페이지]

셜록 홈즈의 귀환

그런데 홈즈가 돌아왔다. 이제 막 세 번째 시즌을 시작한 영국 드라마 <셜록>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요 몇 년 간 셜록 홈즈 관련 콘텐츠들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은 물론이고 『셜록 홈즈 실크하우스의 비밀』 이나 『홈즈가 보낸 편지』 같은 국내외 작가들의 홈즈 관련 소설도 출간됐다. 작년에는 『주석 달린 셜록 홈즈 전집』 도 세상의 빛을 봤다. 이 모든 것이 2010년에 전파를 탄 드라마 <셜록> 때문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지만 단순히 그렇다고 인정하기에는 의아한 구석이 많다. CSI가 과학수사를 하고 멘탈리스트가 사람 심리를 파헤치고 뼈로 사건을 풀며 온갖 해괴하고 잔인무도한 살인이 벌어지는 21세기에 홈즈라니. 게다가 셜록 홈즈는 옛 세기의 케케묵은 탐정 아니었는가?

셜록홈즈book.jpg

나는 약간 혼란스러웠다. 드라마 <셜록>이 아주 잘 만들어지긴 했지만 이미 유행이 한참 지나버린 명탐정이 다시 살아난 데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지 싶었다. 아무리 유행이 돌고 돈다지만 이 험악한 세상 속에서 권투와 펜싱만으로 적과 싸우고 자신의 계략에 빠져 뱀에게 물려 죽는 어리숙한 범죄자들만 상대하던 셜록 홈즈가 새롭게 부각되는 일이 나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아무렴, 이제 홈즈의 추리력만으로 범인을 잡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 무서워졌지 않은가.

어찌 됐든 나는 책상 깊숙이 잠들어 있던 셜록 홈즈를 다시 꺼내 읽었다. 그 옛날 내게 명탐정의 꿈을 꾸게 했던 작품들이 누레진 얼굴로, 그러나 변함없는 재미로 나를 반겼다.

『주홍색 연구』 는 데뷔작이라 하기에는 여전히 참신했으며 『바스커빌 가문의 개』 는 괴기스러운 면도 있었다. 「마지막 사건」 은 그 결말을 알면서도 두근거렸고 「빈집의 모험」 에서 홈즈가 3년 만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나 역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 셜록 홈즈는 다시 읽어도 무척 재미있었다. 그리고 새로이 인기몰이를 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그 옛날의 셜록 홈즈가 캐릭터 자체로 인기를 끌었다면 지금 셜록 홈즈를 소비하는 독자, 혹은 시청자들은 홈즈 같은 이가 활약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길 꿈꾸는 게 아닐까? 속사포처럼 지식을 쏟아내며 척척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셜록 홈즈의 ‘심플한’ 세계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농담 섞인 말로 사람 한 명 죽여서는 뉴스에 나올 수도 없다는 지금 이 시대, 사이코패스와 연쇄살인이라는 단어가 일상 언어가 되고 도무지 진상을 알 수 없는 사건들이 어느새 다른 사건으로 슬쩍 덮여버리는 작금의 현실 앞에서 셜록 홈즈의 명쾌함은 얼마간 우리의 속을 후련하게 해 준다.

최첨단 장비 하나 없이 오직 지식과 추리력만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그의 듬직하고 우직한 모습은 잊고 있던 옛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어린 시절의 나는 홈즈와 같은 명탐정이 되기를 꿈꾸었지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나, 배나온 아저씨는 홈즈이기 보다는 왓슨이 되기를 바란다. 셜록 홈즈라는 든든한 친구를 둔 평범한 사람. 어떤 어려운 일이라고 쉽게 해결해 버리는 이 괴짜 천재와 함께라면 아무리 소심한 나라도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마음일지 모르겠다. 내가 명탐정이 아니어도 좋으니 그런 친구가 활약하는, 베이커가 221번지 2층이 존재하는 바로 그 세상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아마도 그 세상 속에는 처음 만난 여자를 모텔로 끌고 가 토막 내 죽여 버리는 십대도, 자신들의 아들을 죽이려는 비정한 부모도, 성적을 비관해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초등학생도,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국가도 없지 않을까?

그런 바람들이 모여 21세기의 이 황량한 세상에 “감정상의 좋고 나쁨은 명쾌한 추리와는 양립하지 않는다.”는 이 매력적인 탐정을 무덤에서 끌어낸 걸지도 모르겠다.


[관련 기사]

-걸작은 시대를 초월해서 즐거움을 주지요. - 『셜록』
-완전범죄를 꾸민 여인, 사랑에 빠져 결국… - 봄에는 셜록을!
-환자를 보자마자 완벽한 진단 내리던 의사 - 아서 코난 도일 <셜록 홈즈, 1887~1927>
-같은 사건, 서로 다른 증언?! 몰입도 최강 뮤지컬 <셜록홈즈 : 앤더슨가의 비밀>
-진실에 도달하는 일은 언제나 옳을까? - 뮤지컬 <셜록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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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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