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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 기욤 뮈소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후회 없는 삶을 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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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뮈소의 소설을 읽고 나면, 마치 할리우드 영화를 한 편 보고 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디테일한 묘사와 속도감 있는 장면 전환, 구어체 대사 등이 어우러져 어떤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소설책 위에다 콘티를 짤 수 있을 정도다. 거기에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하면서도 세련된 감수성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소재와 줄거리의 익숙함을 눈감아 주고 싶을 정도로 상당히 매력적이다.

그의 얼굴에 고통은 없었다
다만, 심장을 찌르는, 쩌릿쩌릿한 회한 같은 것을 지그시 참고 있는
흐릿한 우울이 떠있다

- 황지우, 「주인공의 심장에 박힌 총알은 순간, 퍼어런 별이 되고」 중에서

얼마 전, 내과 레지던트인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잘해야 1년에 한두 번 볼까 말까 한데, 그건 순전히 그 친구가 너무 바쁘기 때문이다. 고된 병원 생활 때문에 그녀는 만날 때마다 에너지 고갈 상태였고, 우울하다는 말도 종종 했다. 물론 보람을 느끼는 순간들도 적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24시간 긴장 상태인데다 주로 환자와 환자 보호자들만 상대하다 보니 많이 힘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의사들이란 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넘치는 열정보다는 냉철한 판단과 신중함이, 가벼운 농담보다는 묵직한 태도가 높이 평가되는 곳.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연차가 올라가면서 말기 암 등으로 소생 가능성이 전혀 없는 환자들을 종종 맡게 되는데, 환자 가족들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는 수술이 거의 의미가 없다. 어차피 완치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기 때문에, 수술로 인한 극도의 고통만 가중될 뿐이다. 나는 심장 마사지가 늑골이 부러지고 피가 튀는 고통스러운 방법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그런데도 어떤 가족들은 끝까지 포기를 못한다고 했다. 고통스러운 과정들을 감수하면서까지 어떻게든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환자는 목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수술대 위에서 격렬한 통증을 겪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어떤 의사를 떠올렸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 며칠, 아니면 몇 주일?’
엘리엇은 어느 때보다 더 살고, 달리고, 숨 쉬고, 나누고, 사랑하고 싶다는 생각을 절박하게 느꼈다. 실패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사랑하는 딸이 있고, 의사를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 보탬이 되었고, 여행도 많이 했고, 행복한 순간도 많았고, 절친한 친구 매트와 좋은 시간도 함께 보냈다. 그러나 가슴이 터져버릴 것처럼 간절한 후회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 있었다.

- 본문 중에서

그의 이름은 엘리엇 쿠퍼. 올해로 예순 살.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메디컬 센터에서 30년째 소아외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그는 최근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이미 치료는 불가능한 상태. 이제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길어야 한 달 정도다. 비교적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엘리엇에게도 회한은 남아 있다. 30년 전 사고로 잃은 사랑하는 여인 ‘일리나’의 존재가 늘 마음 한구석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온다. 캄보디아 노인에게 받은 황금색 알약 10개. 그리고 10번의 시간 여행. 주어진 시간은 짧다. 이제 그는 30년 전 그날로 되돌아간다. 단 하나의 사랑, 일리나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두 눈에 붕대를 감고 현재를 통과한다. 시간이 흘러, 붕대가 벗겨지고 과거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될 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비로소 살아온 날들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깨닫는다. (밀란 쿤데라)
- 본문에서 재인용

생각할수록 시간의 흐름은 기묘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현재라는 순간을 살아가지만, 그것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정신없이 일을 하고,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고, 멍하니 흘려보내는 모든 순간들은 현실적인가 하면 동시에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그것은 한 손 가득 움켜쥔 모래처럼 어느 틈에 스르르 빠져나가 버리는 시간의 속성 때문이다. 또한 이 모든 순간들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 기욤 뮈소는 『완전한 죽음』에서 몽테뉴를 인용하여 죽음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다. ‘하루하루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마침내 마지막 날이 오는 것이다.’ 문제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하루하루를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의 엘리엇도 그랬다. 그는 연인인 일리나를 자기 목숨처럼 사랑했고, 그녀와 평생 함께할 거라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했다. 우리의 인생, 내일 당장 백골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우리의 인생에서 ‘영원’이란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30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엘리엇과 일리나는 사소한 일로 말다툼을 벌인다. 서로 감정이 상한 채, 전화를 끊은 두 사람. 그리고 그날 밤, 일리나가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죽기 직전 그녀의 가슴은 후회로 가득 찼다. 엘리엇과 싸우며 헤어졌고, 그의 뇌리에 영원히 간직될 자신에 대한 마지막 이미지가 회한과 원망으로 얼룩졌다는 것이 못내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

과거로 돌아온 60세의 엘리엇은 30세의 엘리엇에게 일리나의 죽음을 예고한다. 그리고는 젊은 엘리엇이 당혹감과 분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말해준다. “자네는 인생이 한참이나 남은 것처럼 일리나를 대했지. 하지만 사랑은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라네.” 그리고 이어지는 두 엘리엇 간의 은밀한 거래. 그러나 그 자신이 예감했듯이, 정해진 운명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난 대가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기에.

기욤 뮈소의 소설을 읽고 나면, 마치 할리우드 영화를 한 편 보고 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국의 도시를 배경으로 한 디테일한 묘사와 속도감 있는 장면 전환, 구어체 대사 등이 어우러져 어떤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다. 소설책 위에다 콘티를 짤 수 있을 정도다. 거기에 작품 전반에서 느껴지는 말랑말랑하면서도 세련된 감수성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지는 소재와 줄거리의 익숙함을 눈감아 주고 싶을 정도로 상당히 매력적이다. 텍스트의 영상화야말로, 이 젊은 프랑스 작가의 탁월한 재능임에 틀림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줄곧 떠올랐던 영화 한 편이 있다.

영화 <이프 온리>의 한 장면

“고마워.”
“뭐가?”
“완벽한 하루를 선물해줘서.”

- 영화 <이프 온리(If only)>(2004) 중에서

영화 <이프 온리>는 번화한 런던의 아침 풍경으로 시작한다. 분주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그리고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의 풍경들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장면이기도 하다.

남자 주인공 ‘이안’은 워커홀릭이다. 그는 여자 친구 ‘사만다’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바쁜 업무에 쫓겨 그녀에게 소홀하기 일쑤다. 마음과 달리 표현을 잘 못하고, 매사에 무심한 그에게 사만다는 서운함을 느끼면서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결국 사만다의 졸업 연주회에서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폭발하고, 혼자서 택시를 잡아타고 떠나간 그녀는 이안의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때늦은 후회와 자책으로 눈물을 흘리는 이안. 그런데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그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 어제와 반복되는 하루가 거짓말처럼 주어진 것. 그는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오늘 밤 닥쳐올 사랑하는 그녀의 죽음, 그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하루뿐. 처음에 그는 운명을 바꿔보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친다. 그러나 모든 상황이 그에게 예고된 운명이 찾아올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시간을 감지한 이안은, 사만다를 위해 영원히 잊지 못할 하루를 선물한다.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의 엘리엇도 처음에는 비슷한 선택을 한다. 정해진 운명을 거스르고 일리나의 목숨을 구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를 비웃으며 더욱 잔인한 방법으로 응징한다.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킨 삶 속에서, 모든 가능성은 희망이자 동시에 저주가 될 수 있음을 엘리엇은 다시 한 번 처절하게 깨닫는다. 이와 관련해 떠오르는 단어가 하나 있다. 마크툽.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이 말은, ‘모든 것은 이미 기록되어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이 단어가 희망과 위안을 주는 주문처럼 여겨졌는데, 뮈소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왠지 두렵게 느껴졌다. 동시에 문득 드는 생각 하나. 인생이 그렇게 수동적인 것이었던가?


‘원뿔과 원기둥이라…….’
엘리엇은 체스 말을 보고 있자니 학생 때 배운 우화가 한 가지 생각났다. 그는 원뿔을 책상 위에 평평하게 올려놓은 다음 힘을 가했다. 입체 원뿔은 제자리에서 뱅그르르 돌았다. 원기둥에도 똑같이 힘을 주었다. 원기둥은 책상에서 구르다가 땅에 떨어져 깨지고 말았다. 똑같은 충격을 가했지만 두 물체는 서로 다른 궤도를 따라 움직였다. 똑같은 시련에도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사람들처럼…….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는 없더라도 운명에 대처하는 방식은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 본문 중에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설령 하늘의 뜻이 정해져 있다 하더라도, 현재의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몫이다. 그리고 겸허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것. 엘리엇의 선택도 다르지 않았다. 운명의 흐름을 바꾸려는 그의 시도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일리나의 목숨을 위협했지만, 그는 침착하게 이미 벌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결국은 그의 대응방식이 이미 정해졌다고 믿었던 결과마저 뒤바꿔놓게 된다.

사실 이 소설의 결론은 명명백백하게 교훈적이다. 그런데도 왠지 느낌이 좋다. 따뜻하기도 하고, 설레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날 출근길. 유난히 자동차 사이드 미러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로 다가왔다. 죽음의 순간 혹은 행복의 순간. 죽음은 시간의 틈새마다 도사리고 있다가,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우울하고 두려워진다. 하지만 어쩌면 그 예고 없음이 우리 삶에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의외로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더욱 소중하다는 것, 그래서 더 행복하게 더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까닭이다. ‘후회 없는 삶을 살 것.’ 이것은 죽음을 향해 일방적으로 달려가는 시간이, 돌이킬 수 없는 순간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강력한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시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하기 때문이다. (세네카)
- 본문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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