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아 하석진 <세 번 결혼하는 여자>, 김수현의 시계에 과거는 없다
근작(近作)이 가장 문제작인 작가 김수현을 말하다
2-30대 여성의 결혼관과 사회적 고민을 담은 새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도 ‘김수현표 가족’은 예외 없이 등장한다. 자식에게 헌신적인 은수네 부모, 자식이라 하더라도 모든 입장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준구네 부모, 자식을 명예 지키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광모네 부모…….
현역 활동중인 최고령 드라마 작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원고료를 받는 드라마 작가, ‘연장 방송’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최초의 작가, 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
드라마 작가 김수현을 수식하는 말은 다양하다. 그러나 단순히 원로라고 해서,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를 쓴다고 해서 최고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녀가 유일무이한 존재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김수현의 시계에 과거는 없다는 것. 그녀는 언제나 ‘지금’ 가장 문제적인 작품을 쓴다. 알고 있지만 공론화하기가 주저되는 것, ‘거기까지는 조금…….’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부분에서 그녀의 드라마는 시작된다. 하여 그녀가 걸어온 길은 대한민국 드라마가 통념에 맞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던 역사일 수밖에 없다.
수면 위로 떠오른 우리의 현재
앞서 말했듯, 김수현의 펜 끝은 언제나 현재에서 딱 반 보 앞선 지점을 향해 있다. 많은 이들이 심은하의 “당신, 부셔버릴거야”라는 대사로 기억하고 있는 드라마 <청춘의 덫>은 사실 1975년에 김수현이 쓴 동명의 드라마다. 존재했지만 드러내지 못했던 그것, ‘불륜’과 ‘혼전임신’이라는 소재는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경직된 분위기의 군사정권 시절에 그녀가 내놓은 메시지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강렬했고, 결국 20부작만 방영 후 조기종영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20년도 훌쩍 지난 1999년에 리메이크된 드라마는 평균 시청률 40%를 넘나들며 대성공을 거뒀다. 스스로가 내놓은 문제에 화려하게 답한 것이다.
김수현이 다루는 내용은 우연의 연속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막장 드라마나 허무맹랑한 신데렐라 스토리가 아니다. 그녀는 우리 주변에 분명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브라운관에 녹여낸다. 자폐아를 둔 가정을 다룬 <완전한 사랑>, 가사노동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엄마의 모습을 그려낸 <엄마가 뿔났다>가 그것이다. 하지만 김수현은 이를 결코 미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적인 부분들을 툭툭 건드린다. 자폐아를 사랑으로 감싸는 모습 대신 자폐아를 둔 가정이 심적으로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우리 인생에서 짐처럼, 그러나 선물처럼 함께 가야 하는 것이 가족임을 촘촘한 솜씨로 엮어낸다.
하지만 그녀의 돌직구는 끝나지 않았다.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동성애를 다룬 것이다. 하지만 후폭풍은 거셌다. 기독교연합회, 학부모연대가 격렬한 항의를 했고 두 남남 커플의 언약식 부분은 편집되기도 했다. 그녀는 이를 두고 “걸레에 얼굴을 닦인 기분”이라며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드라마에서나 현실에서나 그녀는 언제나 직설적이고 솔직한 화법을 구사했다. 그것을 지렛대 삼아 현실은 문득 수면 위로 떠올랐고, 김수현은 우리에게 묻는다. 지금 당신의 현재가 바로 이것이 아니냐고.
통속과 리얼리티, 그 사이에서
그러나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대중문화의 영역이기에, 통속성을 지우기는 힘들다. 지난주 시작한 그녀의 새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다분히 통속적 요소를 기본으로 하여 출발하는 드라마다. 주인공 오은수(이지아)는 악덕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있는 시월드에서 탈출해 더 좋은 조건의 준구(하석진)와 재혼한다. 그러나 준구는 아직 예전에 사귀던 다미(장희진)와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상태다. 한편 또다른 주인공이자 은수의 언니 오현수(엄지원)는 오랜 시간 동안 짝사랑하던 광모(조한선)이 결혼식장에서 뛰쳐나와 자신의 집으로 오자 패닉에 빠진 상태다. 내용만 놓고 보면 자극적인 드라마와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김수현은 여기에 이혼한 은수와 태원(송창의) 사이의 아이 문제를 끼워넣음으로써 현실성을 회복한다. 아이를 떼어놓고 재혼해야 했던 은수는 점점 자신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아이 때문에 죄책감에 시달린다. 엄마와 살다 덩그러니 외가에 혼자 남겨진 아이는, 아빠와도 엄마와도 살지 않기에 ‘고아’라는 놀림을 받는다. 이혼하면 ‘새 삶’이 펼쳐졌던 이전의 드라마와 달리, 김수현은 아이라는 매개체를 등장시킴으로써 두 주인공을 연결하는 무척 현실적인 이유를 만든다. 아이를 둔 채 이혼한 부부에게 관계의 단절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는다. 현실은 김수현의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 더 단단해지고, 설득력을 얻는다.
여전히 지키고자 하는 이야기, 가족
김수현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가족주의다. 늘 현실의 끈을 단단히 붙들고 있는 그녀의 드라마가 조금 느슨해지는 것이 바로 가족을 그려낼 때다. 그녀는 요즘 보기 힘든 대가족의 모습을 즐겨 다룬다. 김수현의 홈드라마에서 카메라는 어김없이 노부부로 시작해 모든 구성원을 한 차례씩 담는다. 마치 가족을 소개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회를 거듭하며 가족들이 한 공간에서 지지고 볶는 모습은 향수마저 불러일으킨다.
2-30대 여성의 결혼관과 사회적 고민을 담은 새 드라마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도 ‘김수현표 가족’은 예외 없이 등장한다. 자식에게 헌신적인 은수네 부모, 자식이라 하더라도 모든 입장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준구네 부모, 자식을 명예 지키기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광모네 부모……. 각양각색 가정의 모습을 통해 시청자들이 다시금 가족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 누구보다 시대에 앞선 이야기들을 써낸 김수현 작가가 놓지 않고 지키고자 하는 주제는 바로 그것,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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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길에 들어설 수는 있지만 오래 머무르는 것은 쉽지 않다. 오랫동안 길을 갈 만한 열정과 동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를 향한 그녀의 외길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이, 아직도 더 전할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이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가울 따름이다. 언제나 차기작이 가장 기대되는 현재진행형의 작가 김수현, 그녀가 선보이는 새로운 이야기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 또다시 기대를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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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궁금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했다. TV와 영화, 책과 음악이 숨 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좋은 저녁이 매일 이어지기를 꿈꾼다.